[암환자의 기묘한 모험 2]
포항의 척추전문병원에서 암이 의심된다는 의사 선생님 말씀에 아내는 바로 짐을 싼 후 사설 응급차를 불러서 나를 태우고 서울 대형병원 중에 하나인 A병원으로 출발했다. 저녁7시에 출발한 응급차는 저녁11시에 서울의 한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차로 이동하는 동안 4시간동안 편하게 잠이라도 자면 좋겠지만, 이미 허리가 5군대 이상 골절이 되어버린 내 몸은 작은 진동에도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방지턱은 물론, 조금만 길이 좋지 않은 곳에서 운행하면, 나는 여지없이 비명을 질러댔고, 이런 나를 위해 아내는 옆에서 내가 조금이나마 진동을 덜 느끼게 해주려고 내 허리 보조대를 온힘을 다해서 손으로 눌렀다.
그냥 쉬면서 가도 지치는 장거리 운행이건만, 나는 비명을 지르고, 아내는 온힘을 다해 보조대를 눌러댔다. 그렇게 도착한 병원 앞에서 우리는 곧 입원을 하고 침대를 배정 받아 좀 쉴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렇게 겨우 버텨냈다.
그러나 저녁12시에 도착한 A병원의 응급실은 활기찼다(?). 바로 가면 등록하고 입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상상이 어리석은 망상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수 많은 대기 환자들을 보면서 그동안 내가 편안하게 자고 있던 그 시간에도 응급실 앞에서 발을 동동거리는 사람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긴 대기열 앞에서 아직 버리지 않았던 희망은 바로 암환자라는 사실이었다. "나 암환자야!" 라는 외침 한번이면 왠만한 아픈 사람들은 다 비켜줄줄 알았다. 하지만 병원에서 나를 보는 객관적인 모습은 암환자가 아니라 암가능성이 있는 그냥 단순 골절 환자였다. 간호사나 의사에게 말해도 그것을 증빙할 수 있는 서류는 없었다. 또한 암환자였다 해도, 이미 내 옆에서 더 응급해 보이는 환자들이 지천에 널려있었다. 나는 그렇게 응급실 앞에서 버려진 채 입원은 커녕 아무도 나에게 놀랄 만큼 관심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치료해 줄 것이 없다고 자리 차지 하지 말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라는 축객령만 내려졌다.
베데스다 연못의 38년된 병자의 마음이 이랬을까? 연못에만 누가 넣어주면 살아날것 같은데, 서로 살기 바빠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상황, 아픈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 죽기 직전의 상태가 아니면 환자 취급도 못받는 상황. 그때 만난 예수님은 참 구세주였을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그날 그 순간엔 나에겐 나타나지 않았다. 예수님 나빠요.
나는 병원 복도에 있는 간이침대에 누워있었고, 아내는 앉을 곳도 없어서 내 침대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녁12시, 이미 4시간 동안 차량으로 이동하면서 온 힘을 다 써버린 아내와 나는 춥고 배고팠다. 특히 아내는 서 있을 기력조차 없었다. 그냥 그렇게 있으면서 눈물밖에 안났다. 버려진 기분, 소외된 기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다는 것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내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다른 대형 병원에 전화를 다 돌려봤지만, 아무도 우리를 받아주지 않았다. 아니, 받아줄 수 없다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나는 단순 암 의심 환자였고, 입원하고 싶으면 그 대형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서 의사가 입원을 허락해야 한다. 이것이 절차였고 이런 절차를 거치지 않고서는 서울의 대형병원에서 입원한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와 같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물론 그 교수를 만나서 진찰을 받고 수 많은 검사를 한 뒤에 "암 의심이 되니 입원해서 정밀검사를 합니다" 라는 허락을 받기까지 5-6개월이 걸린다. 이미 1개월 사이에 골절의심에서 5군대 척추골절로 변한 나의 몸상태가 그때까지 버텨줄지 의문이었다. 그렇게 저녁12시부터 아침9시까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며 여기 저기 전화해서 도움을 구하다가 장인어른의 도움으로 겨우 한 병원이 받아주기로 했다. 그곳은 경기도 군포에 있는 암전문 병원이었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그 병원에서 다시 고통스러운 종합 검사를 다 받게 되었다. 척추골절이 더 심해진 내 상태는 허리보조기가 더 이상 효과가 없었다. 그냥 죽는게 더 편할 정도의 상태였다. 그나마 깨어있을 때에는 대략적으로 어떤 자세에서 통증이 오는지 알았기 때문에 최대한 통증을 오지 않도록 노력할 수 있었다. 정말 힘들었던 건 잠이 들었을 때다. 잠을 자는게 너무 무서웠었다. 왜냐면 잠이 들었을 때에 무의식 적으로 몸을 뒤척이는 순간 "아악!"소리를 지르며 항상 잠에서 깼기 때문이다. 원래 골수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국소마취만을 한 상태에서 진행한다. 하지만 나는 그 엎드려있는 자세조차 불가능해서 부득불 수면마취를 하고 검사를 진행했을 정도의 상태였다. 그렇게 검사를 통해서 드디어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암환자가 되었다. (참고로 암환자는 국가에서 관리한다.)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되는 검사 하나 못할 정도의 몸상태로 인해 의사선생님은 마약성 진통제를 처방해줬다. 할렐루야. 마약이 정답이었다. 나는 통증에서 해방되었다. 그렇다고 걷거나 뛰게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적어도 누워있을때, 혹은 잘 때 뒤척이면 찾아오는 고통이 약화되었다. 정말 이 정도만 되어도 살 것 같았다. 침대 각도도 40도까지 올려서 식사를 처음 하는데 앉아서 밥을 먹는 것에 대한 감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암환자에게 소소한 행복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잠깐이나마 고통에서 해방되었지만, 동시에 마약 부작용이 발생했다. 하루 24시간을 잠만 자고, 밥맛이 없어서 밥을 먹지 않았다. 꿈과 환상을 보기 시작했고, 꿈과 현실의 경계선이 무너져서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사이비 종교 집단에 잡혀온 것으로 착각을 해서 아내에게 탈출하자고 이야기를 하고, 시간마다 라운딩을 하는 간호사에게 나의 탈출을 막는 악한 전도사라며 비난했다. 옆방에는 이미 아랍사람들(?)이 잡혀있었고, 그들은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참고로 병원에는 아랍사람도 없었고, 옆방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내에게 비장하게 작전을 명령했고, 아내는 나를 미친놈이라고 했다. (난 아내도 세뇌되었다고 믿었다.)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나를 암살하기 위해 뱀을 풀었다. 나는 병상에 쳐진 커튼사이에서 나를 노리는 뱀을 발견하고 아내에게 조심하라고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군대를 갔다오지 않은 아내는 뱀을 발견하지 못했고, 나 홀로 싸워야 했다.
그렇게 혼자 지랄병을 하는 나의 상태를 아내는 의사에게 말했고, 그렇게 찾아온 정신과의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조금은 안심했다고 한다.
"환자들 중에 너무 극심한 통증을 느끼면 일시적으로 섬망증세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섬망 증세를 없애기 위해서 아내는 담당의사와 상의를 하며 나에게서 마약을 빼내기로 합의를 한다. 그렇게 의사는 나에게 마약을 빼내는(?) 약물을 주사했다. 그렇게 나는… (3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