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예수
병들고 아프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다. 통증이 너무 많아서 어디가 아픈지 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고, 만성통증으로 인해 항상 몸 어디 한곳에서 통증신호를 보내기 때문에 신경이 거기에 곤두서있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게 된다. 머릿속에는 '아프다'라는 생각만 가득차있다. '오늘 모 하고 놀지?', '점심 메뉴는 몰까?' 등. 단순한 일상생활의 질문은 사치다. 그저 아프지 않았으면, 통증이 좀 완화됐으면, 이게 전부다.
때론 너무 아프면 없던 원망도 생긴다. 하나님이 전능하다면서 손짓 한번이면 치료되는거면 그깟거 왜 안해주는거지? 병에 걸린 사실보다 이 지긋지긋한 통증에서 해방시켜주지 않는 것에 대해 차오르는 분노다.
그래서 아프고 병들고 가난한 자들에게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전능할 수록 거리감만 생길 뿐이다. 그들의 하나님은 같이 연약하고 아프고 힘없어야 한다. 나에게 예수는 그런 존재다. 같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존재. 그 손짓 한번의 기적을 베풀어주지 않은 냉혈한 같은 하늘 아버지를 끝까지 신뢰하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낸 예수. 나에게 십자가는 단순 천국행 티켓을 약속하는 부적이 아니라 그 신뢰의 삶을 살아낸 마침표다. 그가 없었다면 난 진작 신앙을 버렸을 것이다.
아내가 위로하면서 말을 건낸다.
"그래도 이렇게 아프니까 우리처럼 아픈 사람들의 마음을 더 잘 위로할 수 있겠지"
그때 내 머릿속에 든 생각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위로가 필요한게 아니라 편안한 죽음을 원할지도 몰라.'
진짜 아파보니까. 보인다. 위로는 별의미가 되지 않는다. 차라리 죽음만이 나를 구원할 것 같은 순간들이 매일 찾아온다.
그동안 목사로 사역한답시고 아픈 사람들을 향해서 위로한답시고 기도하겠습니다. 라는 식의 입에 발린 말들이 얼마나 사탄적이었는지 깨닫는다.
현실은 지옥인데, 여기서 버티라는 가스라이팅을 하면서, 지옥에 사는 자들이 구원받을 길을 막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구원이라는 것. 이 땅에 아프고 가난한 자들이 살만하다 혹은 살고 싶다 라는 생각을 들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건강하고 돈을 벌 수 있는 자들만의 사회가 아니라. 아프고 병들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일상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에 신경쓰지 못했다. 단순히 돈 몇푼을 건네면서 그들에게 위로한다는 것이 이 지옥에서 죽지 말고 버티라는 가스라이팅이 복음이라고 떠들어 대는 모든 종교지도자들이 사기꾼처럼 보인다.
교회가 전도랍시고, 몇명을 전도했냐는 식의 숫자 놀음에 빠져있느라 정작 단 한명도 제대로 섬기지 못했고, 제대로 구원하지 못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고 살아내는 것이 전부였던 예수의 삶을 전파하면서 정작 우리는 그들을 성밖으로 밀어내고, 그들에게 죽음 후를 기대하라는 세뇌를 외치고 있었다.
더 이상 전능한 하나님은 필요없다. 전능한 하나님을 섬긴답시고 깝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거대한 집단도 필요없다. 같이 아프고 힘없는 하나님. 전능한 자에게 버림받은 인간. 예수가 필요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