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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빵떡씨 Apr 29. 2023

석기의 상경 스토리

석기는 서울이 처음이었다. 서울역에는 사람이 많았다. 바쁜 사람도 많았다. 석기는 승강장에서부터 두리번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친구가 석기를 마중나오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강원도에서부터 초, 중,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친구였다. 석기는 시계를 봤다. 친구와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석기는 역 밖으로 나왔다. 8월의 서울은 강원도보다 훨씬 더웠다. 석기는 땀이 나고 목이 말랐다. 역 바깥은 공터였고, 그늘마다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석기도 그늘 한 구석에 들어가 해를 피했다. 옆 그늘에는 30~40대쯤 돼보이는 남자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가운데에서 두 남자가 장기를 두고 있었고 그 주위를 구경꾼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그냥 장기를 두는 것이 아니었다. 오천 원을 내고 장기를 둬서 이기면 낸 거에 오천 원을 얹어 만 원을 준다고 써있었다. 석기는 친구를 기다리는 동안 구경이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몇 분이나 봤을까. 장기를 잘 모르는 석기가 보기에도 파란 조끼를 입은 남자의 실력이 시원치가 않았다. 석기는 중얼거렸다.

 "저래서 만 원 타가겠나"

그러자 석기 옆에 있던 남자가 석기를 슥 보더니 말했다.

 "뭐를, 저 사람이 돈 주는 사람인데."

그러니까 파란 조끼 입은 남자가 도전자가 아니라 주최자라는 말이었다. 아니, 실력이 저렇게 형편없으면서 내기 장기를 두자고 했단 말이야? 석기는 어이가 없었다. 좀 더 지켜봐도 파란 조끼 남자의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석기는 뻔히 보이는 수를 두는 남자가 답답했다.

 "아니 그거를 거따가 두나? 참나..."

석기가 혼자말을 하니 옆에 있던 남자가 또 한 마디 했다.

 "아 그럼 댁이 한 번 둬보시지."

정말이지 석기는 이기고도 남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천 원이면 석기의 한 달 용돈이었다. 그렇게 큰 돈을 한 번에 잃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잃는다고 생각하지 말고 이긴다고 생각하면 한 달 용돈을 따가는 것이었다. 오천 원이 생긴다고 생각하자 석기는 횡재한 것처럼 마음이 두근거렸다. 파란 조끼는 판을 뒤집지 못하고 결국 졌다.

 "나도 한 번 해볼게요."

파란 조끼는 도전자에게 만 원을 주어 보내고 석기에게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파란 조끼는 별로 실망한 기색도 없고 담담했다. 파란 조끼는 손을 슥 내밀었다. 석기는 그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아" 하며 가방에서 주섬주섬 오천 원을 꺼냈다. 막상 오천 원을 남의 손에 거저 쥐어 주려니 불쑥 겁이 났다. 하지만 이제 와서 못하겠다고 하기는 가오가 상해 오천 원을 파란 조끼 손에 쥐어주었다. 석기는 속으로 생각했다. '겁 먹을 거 없어. 내가 이기지. 이기고도 남지.'


파란 조끼는 무덤덤하게 말을 놓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번 주고받는데 웬 걸, 파란 조끼의 실력이 몇 분만에 갑자기 월등해진 것이다. 파란 조끼는 별로 오래 생각도 안하고 말을 턱턱 놓았다. 석기는 땀을 뻘뻘 흘렸지만 온 몸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경기는 순식간에 끝났고 석기는 몇 분만에 한 달 용돈을 잃었다. 파란 조끼는 시작할 때처럼 가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석기는 뭐라 할 말도 찾지 못하고 황망히 일어나 공터 구석으로 갔다. 석기는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되짚어봤다. 무슨 생각으로 그 큰 돈을 장기 한 판에 걸었을까. 하지만 분명 파란 조끼 실력은 형편 없었는데. 왜 갑자기 그렇게 잘 두게 되었을까. 옆에서 보는 것과 실제 두는 것이 그렇게 차이가 컸던 걸까. 석기는 너무 망연자실해서 슬픈 기분도 안 들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도 친구가 오려면 좀 더 있어야 했다. 석기는 더운 줄도 모르고 이걸 어째야 할까.. 어째야 그 돈을 메꿀까 그 생각만 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파란 조끼가 석기 앞을 지나갔다. 석기는 파란 조끼를 눈으로 좇았다. 파란 조끼는 자판기 옆에 있는 남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석기보다 먼저 장기를 둔, 파란 조끼에게 돈을 타간 남자였다. 곧이어 석기 옆에서 '댁이 한 번 둬봐라'고 부추겼던 남자도 나타났다. 그러니까 연기자 둘과 바람잡이 하나가 짜고 석기를 판에 끌어들인 것이었다. '속았구나.' 석기는 기가 막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누가 강제로 장기를 두라고 한 것도 아니고, 오천 원을 강제로 뺏어간 것도 아니었다. 석기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건덕지가 없었다. 석기는 그들이 자기 돈으로 자판기에서 시원한 음료수를 뽑아 마시는 걸 멀거니 지켜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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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우리 아빠의 서울 상경 스토리다. 나는 아빠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때 그 청년이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 이렇게 지난 얘기를 재미있게 들려주는 아버지가 된 게 자랑스러웠다. 나는 이런 얘기를 좋아한다. 부모의 젊은 시절 이야기. 그 시절에만 겪을 수 있는 이야기. 다 지났기 때문에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이야기. 생각해 보면 모든 일이 다 그렇다. 지금밖에는, 우리밖에는 겪을 수 없는 일들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나의 모든 일들에 조금 더 마음이 가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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