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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Mar 04. 2020

전태일 열사의 희생을 헛되이 하다

노동착취를 당했던 억울한 기억의 '일', 슈퍼마켓 계산원



배고파 서러웠던 '일'의 기억을 첫번째 이야기로 썻는데 이번에는 억울한 '일'의 기억이다. 마치 내가 20여년 이상을 서롭고 억울한 '일'만 겪어온 사람처럼 비칠 수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오해는 마시라. 배움이 되었던 '일'도 있고, 즐거움이었던 '일' 또한 분명히 있었다.


여하튼 지금 쓰고자하는 억울한 '일'은 당시에는 억울하다고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억울함은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 머리가 더 굵어진 뒤에아 찾아온 감정이었다. 한번씩 울컥울컥 그 때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러나 한결같이 '바보같이 왜 돈을 더 달라고 하지 못했니?' '왜 당시에 문제 삼지 않았니?' 라며 나에 대한 자책으로 이어질 뿐이다. 왜냐면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는 아는 것이 너무 없었다. 특히 노동법과 관련해서는 말이다. 일찍이(1970년 10월이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열사가 있었지만 나는 그때 무지했다. 나는 전태일 열사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기성세대에게 노동착취를 당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근로자이자 학생이었다.


지금은 대형마트가 상권을 다 잡아먹었지만, 20년전만해도 아파트 단지마다 딸린 큰 슈퍼마켓이 주요 식재료 구입처 였던 시절이었다. 지방이어서 더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대부분의 엄마들은 식재료 구입을 위해 아파트 단지에 딸린 큰 슈퍼마켓을 방문했다.


오랫동안 아르바이트를 해오던 패스트푸드레스토랑을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고 있던 때였다. 같이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에서 일을 했었던 남자사람 친구가 슈퍼마켓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며 소개를 해주었다. 그 슈퍼마켓은 그 남자사람 친구의 고모와 고모부가 하는 곳이었다.  집에서 거리도 조금 먼 축에 속했으나, 교통편 역시 좋지 못했다. 버스를 갈아타야 했다. 그런데 그 남자사람 친구가 출근은 시간이 다르니 알아서 하고, 퇴근은 같이하면 된단다. 집까지 '차'로 태워주겠단다. (올레!) 제안을 수락했다. 그랬다 당시 그애는 차가 있는 친구였다. 지금은 어떠한지 모르겠으나 내가 대학을 다니던 그때는(그 시절이라고 하지 않겠다. 너무 옛날사람 같아서) 대학생 남자사람이 차가 있으면 그냥 무조건 인기쟁이였던 때였다. 그러한 이유를 포함해 또 여러 다른 이유들도 있었고 그 친구는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 꽤 인기가 있었다. (그 남자사람 친구는 키도 크고, 얼굴도 하얗고, 귀엽게 생긴 친구였는데 그래서 그 제안을 수락했던 것은 절대 아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래서 일하게 된 슈퍼마켓 계산원. 돌이켜 생각해보면 실수는 단 한가지 였다. 급여를 시급이 아니라 월급으로 받기로 한 것. 면접 겸 인사겸 가서 만난 사장님(친구의 고모부)이 월급으로 주겠단다. 대충 일하는 시간이랑 시급으로 계산해보니 월급이 좀더 많았다. 손해볼 것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


일도 나쁘지 않았다. 특별히 육체적으로 힘들 일은 없었다. 대부분의 업무가 캐셔업무였다. 단지 손님이 없으면 지루하긴 했다. 그러면 그냥 과자봉지 정리하고... 뭐 그랬던 것 같다. 사실 과자봉지 등 물건들은 납품업체가 납품하면서 셋팅해놓고 가기에 건들 일이 없다. 그런데 앞선 글에서 이야기한 적 있지만 나란 사람 일을 열심히, 즐겁게 하는 편이다. 없는 일도 만들어서 하는 편이다. 요령피우지 않고 성실하다는 이야기 들으면 살아왔다. 그때도 그랬다. 손님이 없어 한가한 시간이면 지겹기도 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못견뎌 스스로 정리하고 빗자루질 하고, 쓰레기라도 줍고, 휴지통 비우고 그랬다. 열심히 했다. 손님들에게도 친절하게 했다. 당시에는 계산을 마친 물건들을 직원이 직접 봉지에 넣어서 챙겨줘야 했던 때였다(시절 아니고). 차곡 차곡 예쁘게 종류별로 성심성의껏 챙겼다.


일을 시작한지 일주일쯤 되었던 어느날이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오!수정'을 봐도 사람들의 기억은 대부분 자기를 중심으로 왜곡되지 않던가! (개인적으로 이 영화도, 홍상수 감독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냥 지금 이 순간 이 영화가 떠올랐다.) 여하튼 그 어느날, 사장님 집안에 초상이 났다. 거진 일주일 가까이를 사장님과 사모님(그 친구의 고모부와 고모)이 슈퍼마켓을 비웠다. 남은 직원들이 그 시간을 모두 매꿨다. 나 그리고 함께 일하던 언니 2명, 그 남자사람 친구를 포함해 남직원 2명까지 모두 5명 이었다. 시간을 나눠서 새벽 6시 전에 문열고, 밤 11시경 마감해서 문닫는 일까지 아주 힘들게 해냈다. 원래 나의 근무 시간은 3시부터 10시까지 였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당시 더 일찍 나와 더 늦게 들어갔다. 나는 아르바이트인데 마치 그 슈퍼마켓 정직원 처럼 또는 딸 처럼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군말 없이 다 했다. 사장님 가족에게 슬픈 일이었고, 나에게 일을 소개해 준 사람은 친구였고, 그 사장님네는 그 친구의 가까운 친척이었기 때문에. 그 후로도 사장님의 요청으로 더 일찍 출근, 더 늦게 퇴근하는 날이 여러날 있었다.


더 좋은 자리가 생겼던가? 아니면 출근이 힘들어서였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슈퍼마켓에서 한달하고 보름 정도만 일하고 나왔다. 회사처럼 월급날이 정해져 있었기에 그만두고 한참 뒤에 두번째 급여를 정산 받았다. 다른 곳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사모님이 전화가 왔다. 일했던 시간 다 적어놓았으면 알려달라고 한다. 다행히 적어놓은 기록이 있어서 날짜별 근무한 시간을 다 불러드렸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지금도 뼈저리게 후회하는 부분이다. 시급이 아니라 월급으로 (구두)근로 계약을 한 것. 7시간씩 일하기로 하고 들어갔는데 12시간 이상을 일한 날이 보름정도는 되었다. 사모님이 전화해서 일한 시간을 다 알려달라 그래서 "아 더 주실려나 보다"라고 기대했다.


사모님과 통화한 그날 바로 오후였던가? 다음날 이었던가? 사장님, 그 귀엽게 생긴 차 있는 남자사람 친구(자꾸 반복해서 쓰는 이유는 그냥 웃긴 기억으로 남기고 싶어서다. 계속 나의 마음을 괴롭히는 기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서다)의 고모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는 너에게 시급이 아니라 월급을 주기로 했고, 당연히 주기로 한 금액만 주겠다"가 요지였다. '뭐지? 아니지 않나?'라는 생각만 들뿐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고 "네......" 하고 끊었다. 그리고 바로 당초 월급이라고 약속했던 딱 그 금액만큼만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합당하지 못한 처사라 생각했지만 차마 따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사장님네가 친구의 고모와 고모부가 아니라도 나는 아무말 못했을 텐가? 아마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만큼 무지하고 따질 줄 모르던 학생이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러고 지나갔다.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였겠지만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또는 그냥 "월급으로 받기로한 내 실수다"라고 마음을 정리했던 것 같다.


잠시 다른 이야기지만 내가 국민학교(지금은 초등학교지만)를 다닐 때였다. 등교할 때면 항상 가슴에 학교교표를 가슴에 패용해야했다. 문제는 그래야 정문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등교할 때마다 정문에서 선도부 오빠들이 자꾸 잡아서 세운는데 이유를 모르고 그냥 벌서듯 서 있었다.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내가 늦었나?'정도 생각해보다 말았다. 내 주머니에는 교표가 항상 있었는데도 말이다. 시간이 한참 흐른 후 같은 반 친구가 "너 교표 있는데 왜 거기서 벌서고 있냐"고 해서 알았다. "왜 내가 여기 서야하나요?"라고 물어봐야 하는데, 그리고 아니다 싶을 때는 따져야 하는데 그걸 하지 않는, 하지 못하는 아이였다. 초등학생때도 그랬지만 대학생때도 그랬고, 그 후로도 오랫동안 그러했다.


'일'하는 사람 24년차, 직장생활 18년차인 지금은 안다. 사장님네의 슬픈일을 위해 내 시간과 내 육체의 힘을 들여서 했던 그것은 '초과근로'였다는 것을. 희생정신이 아니였다는 것을. 더욱이 열정페이도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초과근무 수당'을 받았어야 했다는것을. 초과근로수당은 정규 근로시간을 초과하여 근로한 사람에게 지급하는 수당을 말한다. 초과근로시간에 대해서 고용주는 초과근로수당을 지불해야 하는데, 통상 정상근로의 1.5배 지불해야 한다. 그런데 원래 받기로 한 월급으로 퉁 치다니. 사장님은 근로기준법을 위반했고, 나는 무지했으며 당당히 요구할만한 배포가 없었다.


요즘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나처럼 착하거나, 무지하거나, 용기가 없거나, 힘이 없거나, 속거나 등의 이유로) 열정페이를 강요당하고, 일한 만큼의 보상을 못받고 있을까? 그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러 흘러 강산이 두번이나 변했지만 여전히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 할 것이라 믿는다.


나는 요즘 당당하게 내가 한 근로에 합당한 대우를 해달라고 말하는 사람편에 속한다. 후배들을 위해서 경험이 조금이라도 더 있는 선배인 내가 나서야 한다는 사명감이긴 하지만 사실은 어린 친구들의 패기에 기대어 기성세대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덩달아 나도 그 혜택을 함께 한다. 그나마 세상이 많이 변해서 더 말하기 쉬운 때이다.


나는 젊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몇 안되는 사람 중 하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10대 또는 20대를 그리워 하지만 나는 단 한번도 과거로 돌아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그냥 지금이 가장 좋다. 그러나 진짜 기회가 있다면 딱 한번은 그 슈퍼마켓으로 돌아가보고 싶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사장님 나빠요.(사실 더 격한 용어를 쓰고 싶지만 참는다)

그렇게 나쁜 짓 하시면 그 업 다 본인한테 돌아옵니다.

본인이 그 벌을 받지 않아도 사장님 자식이라도 받습니다.

설사 운이 좋아 사장님 자식이 받지 않더라도

손자, 손녀라도 받아요.

진짜 그렇게 살지 마세요.

내가 그나마 나쁜 사람 아니라서

세상사람 다아는 세상사는 진리를 사장님은 모르는 것 같아서

친히 미래에서 와서 말씀 드리는 겁니다.

본인 잘 살자고 남의 노동 착취하면 천벌 받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잠시 생각해봤다.

키크고, 얼굴 하얗고 귀엽게 생겼던 그 남자사람 친구에게 전화해서

"고모부 잘 계시니? 별일 없이 잘 살고 있어?"라고 물어볼까를...

그러나 나쁜 소식을 원하고 물어볼 만큼 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참는다.

핸드폰에 연락처도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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