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번째 기록
2024년 6월 12일 수요일
아빠의 병원을 옮기기로 한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사흘 뒤인 토요일 재활병원 입원에 발맞추어 지금껏 입원했던 병원의 주치의 진단서 등의 서류 및 그동안의 MRI, CT 영상이 필요하다. 세 달 전까지는 별다른 조건 없이 보호자가 병원에 서류를 신청할 수 있었는데 그새 의료법이 바뀌어 환자 본인의 신분증이 필요하단다.
아빠가 입원한 후로 아빠의 신분증은 엄마가 가지고 다닌다. 아빠와 엄마가 함께 살던, 그러니까 지금은 넉 달째 엄마 혼자 지내는 집은 청주에서도 시내와는 동떨어진 미원이라는 시골에 있다. 멀긴 해도 어쨌거나 같은 청주이니 서울에 사는 나보다는 그나마 병원과 거리가 가까운 엄마에게 서류 신청을 맡기고 싶었지만, 요새 엄마는 요양 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교육원에서 수업을 듣느라 평일 내내 발이 묶여있었다. 해당 수업은 일정 출석률을 달성하지 못하면 수료할 수 없어 결석할 수 있는 날짜가 며칠 안된다고 한다. 내일 엄마의 점심시간에 맞춰 교육원에 들러 아빠 신분증만 챙겨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조금 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요새 몸이 힘들어서 내일 하루 수업을 빠지고 병원에 함께 가겠단다.
가족에 대한 감정을 <애증>으로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흔한 경우일 수 있겠지만 엄마에 대한 나의 감정을 담아 <애증>을 발음한다면 그 셈여림은 “애...!(mp : 메조피아노, 조금 여리게) 증!!!(fff : 포르티시모, 매우 강하게)”쯤 될 것이다. 엄마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의 병을 앓았다. 그 병은 아동기 시절까지의 나에게 집은 안전하지 않고 엄마는 나를 미워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고, 청소년기 이후에는 방임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 시간을 지나 보낸 나는, 인정하기 싫지만, 병을 일부 물려받았다. 타인과 있을 때는 멀쩡한 척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기에 겉으로 잘 티 나지 않는 것 같다. 나조차도 내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오랜 시간 동안 믿어왔다. 그러나 내게 정신적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여실히 느끼고 마는 순간이 있다.
내가 열세 살 무렵 엄마는 청량리의 어느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나와 언니를 따로 불러 엄마가 약 때문에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으니 함부로 이야기 꺼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치료 초기에는 증상 억제를 위해 약을 강하게 쓴 탓에, 어딜 나가기만 하면 바락바락 싸우던 엄마가 하루아침에 조용해졌다. 말투는 어눌하고 몸짓은 어색했다. 매일 사납게 짖어대던 개가 성대 제거 수술을 받아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병 때문이라고는 하나 오랜 시간 동안 정서적 가해자였던 엄마는 순식간에 <약자>의 자리를 꿰찼다. 그런 식으로 고통스러웠던 가족 역사의 한 챕터는 어물쩍 무마되었다. 가족 중 누구도 대놓고 탓하지 못했지만, 엄마의 병은 온 가족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덮어 두고 못 본체 한 상처는 안에서부터 곪아, 가족은 너 나 할 것 없이 병을 앓기 시작했다. 나의 경우는 열여덟 살 즈음부터 증상이 나타났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몸과 마음을 지독하게 앓곤 한다.
아빠가 쓰러진 뒤, 서류 처리부터 의사 면담과 병원 모색 등 온갖 일거리가 (겉보기에) 비장애인 프리랜서인 나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병원에서는 기죽지 않으려, 가족 앞에서 다정함을 잃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엄마는 픽 하면 언성을 높이고 짜증을 부렸다. 그날, 그러니까 내가 엄마에게 마음의 벽을 쌓은 날에도, 나는 캐리어를 끌고 일박 이일을 청주에 머무르며, 아침저녁으로 중환자실에 들러 아빠의 상태를 확인하고, 전원(轉院:병원을 옮기는 일) 상담을 위해 수십 장의 서류를 세 군데의 병원에 팩스로 보내던 참이었다. 그 일을 마치면 엄마 집에 들러 밥을 먹기로 했었다. 서류가 많아 예상보다 시간이 지체되는 바람에 조금 늦을 것 같다고 말하기 위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엄마는 너 때문에 밥 다 해놓고 기다리는데 왜 늦냐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 길 한복판에 굳어버렸다. 차마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어 전화를 끊은 나는 잠시 숨을 고르다 터져 나오는 울음과 함께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나한테 화를 내냐고, 내가 뭐하다 늦은 줄 알기나 하냐고, 엄마랑 밥 같이 안 먹겠다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내가 언제 화를 냈다고 그러니, 그냥 흥분해서 언성이 좀 높아진 거지, 그걸 가지고 넌 또 어린애처럼 왜 울고 그러니, 했다. 엄마는 중환자실에서 우리한테 소리 지르는 의사한테는 아무 말 못 하고 나한테 면담을 미루기나 하면서, 왜 나한테는 소리를 질러? 가족이라서 편해서 그렇지, 가족한테 아니면 어디 가서 이렇게 편하게 하겠니.
유미 너는 너무 예민해.
툭. 가족이라는 이유로 간신히 붙들고 있던 얄팍한 울타리의 한 쪽이 터졌다. 그 안에 되는대로 밀어 넣고 못 본 체했던 증증증증증이 기다렸다는 듯 와르르르 쏟아졌다. 엄마만 아니었으면 아빠가 병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뇌출혈로 쓰러지지도 않았을 텐데. 엄마가 엄마 노릇을 해줬더라면 나도 언니도 다른 가족을 찾으러 밖을 헤매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그런, 이런, 저런 험한 꼴이나 우스운 꼴은 당하지 않았을 텐데. 그랬다면 나는, 언니는, 아빠는…
엄마만 아니었으면 우리 가족이 조금 더 행복했을 텐데.
라는 말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올 것만 같다. 차마 삼켜지지도 않는 그 말을 간신히 입안에 가둬둔 채 전화를 끊었다.
그 뒤로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최대한 엄마를 대면하거나 연락하기를 피했다. 내 태도가 바뀐 것에 눈치챘는지 엄마는 한동안 나를 조심스럽게 대하는가 싶다가도 금세 별것 아닌 일로 버럭 했다. 그러면 나는 아무런 대꾸 없이 몇 초간 잠자코 있었다.
얘, 왜 말이 없어? 너 또 화났니?
…화는 방금 엄마가 냈잖아.
아아- 나는 좋은 사람이고 싶은데. 자꾸만 인내심의 한계를 체험하게 하는 이 관계가 지긋지긋하다. 기대를 내려놓으면 조금 편해질까. 그런데 인간이 인간에게 기대하지 않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시도는 수없이 해왔다. 한때는 명상에 심취해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지금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는 건 후회하지 않기 위함이자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이것은 희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이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자고.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그만 닥쳐. 나는 예수나 석가모니가 아닌 한낱 어리석은 중생일 뿐이다. 좋은 사람인 척 다 이해하는 척 연기 좀 그만해. 그것조차 사실은 사랑받기를 포기하지 못해서 붙들고 있는 거 아냐?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거 아니냐고.
미숙한 내가 사랑을 기대하지 않기 위해서는 주는 사랑을 줄인다는 비교적 단순한 선택지를 택할 수밖에 없다. 엄마와 거리를 둬야 한다. 물리적 거리도, 마음의 거리도. 기대가 어긋날 때마다 혼자서 조용히 마음의 벽을 쌓았다. 그 벽은 내 삶이 조금 더 살만해진 뒤에 천천히 허물고 싶었다. 그랬는데…
엄마가 요새 무리를 했는지 피부에 뭐가 올라온다고 했다. 그래서 수업을 하루 빠지겠다고. 병원에다 무슨 서류를 신청해야 하는지 엄마는 잘 모르니까 네가 좀 와서 도와달라고. 당신은 겸사겸사 아빠를 보러 가겠다고. 그렇게 다음날 두시에 병원에서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가슴이 답답했다. 보나 마나 그간 영양 섭취가 부족했을 테지. 엄마는 가족에게만큼이나 당신에게도 지독하게 관심 없고 무뎠다. 그나마 아빠가 있을 때는 이것저것 반찬을 해 먹었겠지만, 혼자 남겨진 데다 평일 내내 시내에 수업을 들으러 왔다 갔다 해야 하는 마당에 영양 균형을 갖춘 식사를 했을 리 없다. 밖에서는 돈을 아끼려고 내내 김밥이나 사 먹었을 게 분명하다. 엄마는 내가 독서실에서 하루 종일 공부를 하던 고등학교 3학년 때 밥값으로 삼천 원을 주는 사람이었다(참고로 2017년도의 일이다).
팩으로 된 유기농 곰탕 국물 몇 개를 엄마 집으로 주문했다. 냉동 제품이 더 괜찮아 보였는데 시골에 있는 엄마 집까지는 배달이 안 되는 모양이다. 급한 대로 배달 가능한 제품을 몇 개 보내고, 냉동 제품은 서울에 있는 우리 집으로 배송받아 직접 갖다 줘야지 싶었다. 하필이면 이번 달에 촬영이 많이 잡혀 수입이 평소보다 넉넉했다. 허허 이것 참, 돈 없다는 핑계를 댈 수도 없네, 하는 씁쓸함 뒤에 엄마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사실에 미묘하게 기뻐하고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다음 날 병원에 가서 이번 주 토요일 오전 열시 반경 퇴원하겠다고 알렸다. 요청한 서류는 그날 오전에 받기로 하고 아빠 얼굴도 잠깐 봤다. 병실은 그새 사람들이 빠지고 바뀌어서 어수선했다. 허공에 손을 허우적대던 아빠 옆자리의 할아버지도 없었다. 간병인에게 여기 할아버지는 퇴원하셨냐고 묻자 돌아가셨다고 했다. 움찔. 그때 손이라도 한 번 잡아줄 걸 그랬나. 아빠가 머무르는 이곳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드는 곳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실감했다.
병원을 나와 얼마 전 팀원들과 식사했던 한식집으로 향했다. 엄마와 같이 보리밥에 두부 부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엄마는 이미 점심을 먹어서 배부르다고 했다. 몸보신하려고 구천 원짜리 뷔페를 든든하게 먹었다는 말을 무슨 대단한 사치를 한 양 자랑스럽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별다른 대꾸 없이 미소만 지었다. 엄마 앞에 수저를 놓자 자긴 안 먹을 거라 필요 없다며 손사래 쳤다.
그래도 두부 부침 맛있으니까 조금만 먹어봐. 단백질 보충해야지. 여기 나물도 맛있어.
…그럴까? 그럼 젓가락만 놔줘 봐.
엄마는 세팅된 밑반찬 중에서 마늘종 무침을 맛보더니 다른 반찬도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어때? 괜찮지? 응. 마늘종 무침이 맛있네. 곧이어 두부 부침이 나왔다. 양이 너무 많아 어차피 혼자 다 못 먹는다며 권하자 엄마는 커다란 두부 부침 다섯 조각 중 두 조각을 먹었다.
배부른데도 맛있게 잘 먹었네. 엄마가 사줄게.
됐어. 이번 달에 나 돈 많이 벌었어.
나오는 길에 사장님에게 얼마 전에 서울에서 왔던 사람이라고 아는 체하자 쌀 과자를 두 개 주셨다. 꾸벅 인사하며 감사히 받아 엄마와 하나씩 나눠 가졌다. 식당을 나와 차를 세워 놓은 병원 야외 주차장으로 향했다. 기왕 운전하는 김에 엄마를 데려다주기로 했다. 혼자서 버젓하게 운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주차장에 도착해 핸드폰 스마트 키로 차량 문 열림 버튼을 눌렀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앱을 껐다가 켜보기도 하고, 핸드폰을 껐다가 켜보기도 하면서 몇 번을 다시 시도해도 똑같았다. 고객센터에 전화하자 긴급 출동 접수를 해주었다. 곧 기사에게서 도착까지 이십 분이 걸린다는 연락이 왔다. 한낮의 햇볕이 머리 위로 뜨겁게 내리쬐었다. 뙤약볕 아래 엄마를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카페에 앉아 같이 수다를 떨고 싶지도 않았다.
미안한데 오늘은 못 태워 줄 것 같아. 버스 타고 가요.
그래 알았어. 조심히 가고.
응. 엄마도.
이십 분이 걸린다던 출동 기사는 사십 분이나 지나서 도착했다. 기사는 도구를 이용해 억지로 문을 열었을 뿐 원인은 찾지 못했고 여전히 스마트키는 작동하지 않았다. 서울로 돌아가며 다시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저 출동 기사님 오시는 거 사십 분 동안 기다렸고요. 이십 분 뒤에 오신다고 했는데 더 늦으셔서 뙤약볕에서 이십 분을 기다렸어요. 오셔서 억지로 문을 열긴 했는데 아직도 스마트키가 작동을 안 해서 어디 잠깐 주차하고 내리려면 짐 다 빼고 창문을 열어 놔야 하고요. 엄마 데려다 드리려고 했는데 문 열릴 때까지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 먼 길 대중교통으로 가시라고 보냈어요. 어떻게 보상해 주실 건가요?
고객님, 불편을 드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가 고객님께 오천 포인트 지급 혹은 한 시간 무상 연장 중 한가지로 보상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시간 연장은 무상으로 가능하나 이때 발생하는 보험료는 직접 부담해 주셔야…
오천 원이요?
네 고객님. 저희가 지급해 드릴 수 있는 최대 금액이 오천 원입니다…
상담사는 타성에 젖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 사람한테 화를 내서 무엇 하리. 대충 오천 포인트를 받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니 저 새끼는 왜 깜빡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거야. 덥고 짜증 난다. 에어컨을 최대로 틀었으나 지독하게 뜨거운 한낮의 열기를 잔뜩 머금은 차는 식을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