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번째 기록
2024년 6월 15일 토요일
오전 다섯 시. 삼 회분이라고 쓰여있는 냉동 한우 곰탕을 하나 뜯는다. 어젯밤부터 냉장실에 두어 꼭 칼이 들어갈 만큼 알맞게 녹은 얼음덩이를 삼분의 일로 신중하게 잘라낸다. 잘라낸 조각을 냄비에 넣고 약간의 소금과 함께 팔팔 끓인다. 뜨거운 곰탕을 보온병에 담는다. 남은 삼분의 이 곰탕과 뜯지 않은 세 개의 곰탕을 은박 보냉 백에 넣고, 이를 다시 스티로폼 박스에 넣는다. 삼 회분이 세 개면 아홉이고 남은 이 회분까지 더하면 총 십일 회분이니까… 며칠 전에 엄마 집으로 주문한 팩으로 된 제품까지 합치면 대략 이십 회분 정도 되겠다.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평일 내내 시내를 왔다 갔다 하는 엄마의 몸보신을 위해 유기농 한우 곰탕을 주문했다. 엄마 집은 냉동 제품이 배달되지 않는 시골이라, 팩으로 된 제품 몇 개를 먼저 보내고 냉동 제품은 서울에 있는 내 집으로 받았다. 그것들을 엄마 집에 직접 갖다 줄 참이다.
곰탕은 이삼일에 한 번 드시라고 하고, 보온병을 줄 테니 가끔 병문안 갈 때 아빠 몫도 챙겨달라고 해야겠다. 그러면 대략 한 달 정도 버틸 테니 재주문은 다음 달 이맘때 해야지. 이왕이면 매달 엄마 집에 주문하는 국산콩 두유와 발주 날짜를 맞춰 보는 것도 좋겠어-
따위의 생각을 하며 서랍에서 투명 테이프를 꺼내 스티로폼 박스를 가볍게 봉한다. 박스에 얼린 생수를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새벽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하필이면 오늘의 렌트 차량은 도보 이십 분 거리인 용산역 주차장에 있다. 보온병을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커다란 스티로폼 박스를 양손으로 안고, 어깨와 목 사이에 우산을 끼운 채 택시를 잡으려는데 지나는 차가 없다. 콜택시 앱도 감감무소식이다. 하는 수없이 낑낑대며 버스를 탔다. 스티로폼 박스를 잡느라 우산이 자꾸만 흘러내리는 게 거추장스러워서, 하차한 뒤에는 우산을 가방에 넣고 비를 맞으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같은 버스를 탔던 아주머니가 자신도 용산역 쪽으로 간다며 우산을 씌워 주셨다.
늦으면 안 되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되고 말았다. 분명 어제 렌트 앱에서 주차장 가는 법이 적혀있는 걸 봤는데 마음이 급하니 찾아지지 않는다. 한참을 헤매다 주차장을 발견했으나 이번엔 사람 출입구를 못 찾겠다. 하는 수없이 차량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새벽이라 차가 많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오늘은 아빠의 병원을 옮기는 날이다. 첫 우중 운전이 될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출발할 즈음엔 비가 거의 그쳤다. 와이퍼를 느린 속도로 켜놓고 먼저 엄마 집으로 향했다. 보냉을 꼼꼼하게 했지만, 그럼에도 냉동 제품을 최대한 빨리 엄마 집 냉동고에 넣기 위해서다. 조금 더 일찍 출발했으면 엄마를 태워 병원에 같이 가려고 했는데, 퇴원 시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할 것 같아 먼저 출발하라고 했다. 고속도로에 진입할 즈음 목이 타기 시작해 물을 찾으려고 조수석에 놓은 가방을 뒤적였다. 그러다가 오늘 가져온 물이 스티로폼 박스에 넣은 얼린 생수 두 병뿐이라는 사실에 뒤늦게 눈치챘다. 시간이 빠듯해서 어디다 차를 세우고 물을 꺼낼 여유도 없었다. 두 시간 반 동안 마른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간 적은 있었지만 시골집까지 직접 운전해서 가는 건 처음이었다. 별다른 문제 없이 거의 다다를 때 즈음, 가파르고 구불구불한 산길이 시작되었다. 전방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울 만큼 커브가 심한 길이 약 십 분간 이어지는 구간이었는데, 길도 좁은 데다 맞은편 차량은 마주치기 직전까지 보이지 않으니 까딱 잘못하면 큰 사고 나겠다 싶었다. 커브길을 빠져나와 한숨 돌릴 즈음 펼쳐지는 용곡 저수지의 경관에 감탄하다, 몇 개의 과속방지턱을 신중하게 넘기다 보니 어느새 시골집에 도착했다.
그러나 감상에 젖을 틈은 없다. 냉동 제품을 후다닥 정리하고 얼린 생수만 얼른 챙겨 나왔다. 드디어 물을 마실 수 있다! 꽝꽝 얼지 않아서인지 다행히 물이 조금 녹아있었다. 시원한 얼음물로 목을 축이자 구수한 감탄사가 절로 새어 나왔다. 어흐. 좋다. 다시 출발!
병원에는 생각보다 여유롭게 도착했다. 퇴원 서류를 체크하고 엄마와 함께 아빠 병실에서 짐을 챙기며 이송 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간병인들은 아빠가 참 점잖게 잘 따라 줬다며 아빠의 퇴원을 못내 아쉬워했다. 유독 아빠를 예뻐하던(정말 아이 다루듯이 예뻐했다) 간병인 여성이 아빠 손을 붙들고 말했다.
“다음에 길에서 만나면 짜장면 사줄게!”
나이가 아빠보다 많을 것 같진 않은데. 완전히 어린애 취급을 받는 아빠의 모습에 기분이 묘했다. 가슴안에서 무언가 부러지는 가벼운 소리가 났다.
열 시 삼십 분쯤 이송 기사가 도착했다. 기사는 아빠를 들것에 눕혀 구급 차량에 실었고 엄마가 같이 타고 갔다. 구급차에는 보호자가 한 명만 탈 수 있고 나는 차를 빌려 왔으므로 곧 운전해서 뒤따라가기로 했다. 병원을 떠나기 전, 나는 적당히 체면이 설 만한 간식거리를 찾으러 편의점에 들렀다. 아무래도 페레로로쉐가 괜찮을 것 같았는데, 큰 포장이 없고 세 개들이와 다섯 개들이만 있었다. 낱개로 금박 포장된 페레로로쉐 초콜릿 다섯 알이 나란히 줄지어 있는 작고 기다란 박스를 세 개 집었다. 계산할 때 50원짜리 비닐봉지가 아닌 100원짜리 크라프트 쇼핑백을 구매해 초콜릿을 넣었다. 방금 아빠가 퇴원한 병실에 다시 들어서자 간병인 여성이 눈을 말똥말똥 뜨고 나를 쳐다봤다. “별거 아니지만….” 하는 틀에 박힌 멘트와 함께 쇼핑백을 건넸다.
“이런 거 안 줘도 되는데….”
예상치 못한 선물에 놀란 기색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다음 스킬을 연쇄적으로 날렸다.
“그동안 아빠에게 잘해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간호사분들이랑 나눠 드세요.”
하며, 눈꼬리와 입꼬리를 한껏 구부러뜨린 채 고개를 깊이 숙였다가 들어 올렸다. 다년간의 모델 촬영으로 다져진 얼굴 근육은 필요한 순간 언제든 자연스러운 미소를 출력할 수 있었다. 마지막까지 싱그러운 웃음을 머금은 채 인사를 마치고 뒤돌아 병실을 나섰다. 걸음걸이가 한결 가뿐해졌다.
그간 이 병원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 얼마나 부단히도 애썼던가. 하얀 바탕에 비슷비슷한 무늬가 그려진 병원복을 입고 “환자”로 불리며, 얼핏 불가침 영역으로 보이는 병원의 치료 방침에 몸을 내맡기다 보면, 아무리 자존심 세고 자아가 강한 사람도 주체성을 잃고 수동적인 입장에 머무르기 십상이다. 보호자도 같은 처지다. 의식하지 않으면 병원 관계자 앞에서 순식간에 저자세가 되고 만다.
아빠는 일본에서 학생을 가르쳤던 지식과 경험만으로, 아무런 연고 없는 타국에서 스스로 일자리를 개척해 20년간 가족을 먹여 살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한순간에 장애인이 되었다. 뇌출혈로 쓰러져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으나, 후유증으로 인지 기능이 저하되고 몸을 잘 가누지 못하게 되었다.
병원에 들어선 순간 아빠의 서사는 지워진다. 다른 환자와 똑같은 병원복을 입고 병상에 누운 아빠는 고령의 외국인 환자라는 차별점을 가질 뿐이다. 뇌출혈 후유증을 앓는 마당에 언어 장벽까지 더해져 의사소통이 더 어렵다. 나는 병실에 머무는 동안 아빠가 온전히 감내해야 했을 무력과 좌절, 위축감 등을 상상했다. 그런 상상은 재빨리 마쳐야 한다. 감정 이입이 십 초만 넘어가도 심장이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잡아뜯기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병문안을 갈 때면 부러 한껏 치장하고 갔다. 화려한 색상과 형형한 패턴의 옷, 공들인 머리 스타일을 갑옷처럼 둘렀다. 돈도 없고 몸집도 왜소한 내가 미미하게나마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는 꾸밈이었다. 나를 볼 때마다 눈물짓는 아빠가 부담스러웠지만, 내세울 수 있는 딸이 되고 싶었던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외관이 아빠와 같은 병실의 다른 환자에게 박탈감을 주지는 않을까 염려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나약한 인간이 무언가 얻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 나는 아빠 편을 들기로 했다. 그렇게라도 아빠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지켜온 실낱같은 자존심이, 길에서 아빠를 만나면 짜장면을 사주겠다는 간병인의 말 한마디에 꺾였다. 우리 아빠가 얼마나 자존심이 세고 지조 높은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병실에서 본 아빠의 단편적인 모습으로 그가 함부로 아빠를 내려다보도록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내가 페레로로쉐 초콜릿과 함께 건넨 흠잡을 데 없는 미소와 격식 차린 인사는, <짜장면 발언>에 대한 옹졸한 복수였다.
나는 최선의 고고함을 유지한 채 병원을 나섰다. 출입문 밖에서 길게 숨을 내뱉고 새로이 들이마신다. 아까보다 공기가 조금 더 맛있다.
새로 입원하는 재활병원은 청주의 시내 쪽에 위치한 칠 층짜리 건물이다. 아빠는 4층의 4인 병실을 배정받았다. 앞으로 아빠를 담당하게 될 의사가 병실로 와서 아빠의 상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아는 내용에 대해 성실하게 답변하며 새삼스럽게 의사와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빠가 물을 마실 때 종종 기침했었다는 말에 의사는 약간 심각해지더니 조만간 연하 검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했다. 흡인성 폐렴을 일으키면 매우 위험하므로 물도 그냥 마시면 안 되고 점도증진제를 타서 섭취해야 한단다. 이전 병원에서는 물도 그냥 드리고, 약도 물에다 타서 드리고, 기침이 나면 가슴을 두드려주라고만 했는데. 아빠의 상태를 더 세세하게 신경 쓰는 듯한 느낌이 달가우면서도 지금까지보다 더 엄격해질 식사 관리에 아빠가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걱정됐다.
“혹시 곰탕 국물을 좀 가져왔는데, 드리면 안 될까요?”
의사는 연하 검사를 받고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사식을 드리는 건 안 된다고 했다. 콧줄을 뺀 뒤로 미음이나 죽 종류, 갈아져 나온 반찬 따위만 먹어온 아빠한테 한우 곰탕을 먹이고 싶었는데. 반으로 접혀 세워진 침대에 기대어 앉아 있던 아빠도 의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내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병동 이용 안내를 받고, 서류 여러 장에 사인을 하고, 휠체어와 기저귀 등 필요한 물품을 구입 및 대여하고 아빠가 밥 먹는 것까지 보고 나니 오후 한 시가 되어갔다. 아빠에게 인사를 하고 엄마와 밥을 먹으러 나왔다. 이번 달에 돈 많이 벌었으니 오늘은 엄마에게 밥을 사주겠다 큰소리쳤으나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면 채식하는 내가 먹을 수 있는 메뉴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미리 검색했다. 채식하면서 지방에서 식당을 찾을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검색어는 “비빔밥”이다. 지도에 표시된 식당 중 가장 무난하게 실패가 없을 것 같은 <24시 전주 명가 콩나물국밥>으로 갔다. 앱에서는 분명 비빔밥을 판다고 했는데 벽에 붙은 메뉴판에 비빔밥이 없기에 물어보니 지금은 안 한단다. 비건이 먹을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사 메뉴는 여름 한정 판매하는 콩국수뿐이었다. 나는 콩국수와 부추 야채전을 주문했고 엄마도 나를 따라 콩국수를 주문했다.
“왜, 다른 메뉴 많은데. 더 맛있는 거 먹지.”
“아니야. 나도 콩국수가 좋아.”
콩나물국밥 전문점이라 그런지 몰라도 콩나물국밥은 주방에서 찍어 내듯이 나오는데 콩국수는 한참이 걸렸다. 국수보다 전이 먼저 나왔다. 오징어가 들어가 있었다. 부추 야채전에 오징어가 왜 들어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너무 잘게 잘라져 있어 일일이 골라낼 수도 없고, 엄마 앞에서 괜히 까다롭게 구는 것처럼 보이기 싫었기에 그냥 먹기로 했다. 4년 만에 먹은 오징어는 별다른 향취가 없어 비리지는 않았지만, 질겅거리는 생물 특유의 질감이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었다. 혼자서 식사했더라면 돈을 아끼느라 사이드 메뉴 따위는 절대 시키지 않았을 엄마는 맛있다며 곧잘 먹었다.
곧이어 콩국수가 나왔고 토핑으로 올려진 계란 반쪽 역시 두 개 다 엄마 몫이었다. 소금을 솔솔 뿌려 간을 맞춘 콩국수는 특별하진 않았지만 고소하니 맛있었다.
다 먹은 뒤 계산하는데 카운터에 놓인 전주 초코파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 맛있을까? 하며 하나를 집어 같이 계산한 뒤 엄마 가방에 슬쩍 넣어 놓았다.
저번에 못 데려다줬으니 오늘은 차로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는데 엄마가 호들갑을 떨며 한사코 거절한다. 엄마. 사람이 잘 받을 줄도 알아야 해. 그래야 주는 사람도 기분이 좋고 그렇다? 엄마는 엄마 스스로 조금 더 누리는 삶을 살도록 허락할 필요가 있어. 그래서 내가 돈도 열심히 벌고 한우 곰탕도 사주고 사 주고 그러는 거잖아. 나도 힘들면 안 할게. 근데 내가 줄 수 있을 땐 받아도 돼.
그렇게 엄마를 설득해 조수석에 태우고 시골집으로 출발했다. 핸드폰을 연결하자 혼자 운전하면서 들었던 정우의 노래가 이어져서 흘러나왔다. 엄마는 노래가 우울하다며 네가 불렀냐고 한다. 재빨리 플레이리스트를 제이래빗으로 바꿨다. 네비를 따라가는데 엄마가 자꾸만 이상하다며 이 길이 아닌 것 같다고 구시렁댄다. 얘, 아무래도 잘못된 것 같아. 청주공항으로 가는 게 말이 되니. 아이 참, 정신 사나워! 요새 네비가 얼마나 똑똑한데! 가장 빠른 길을 알려주는 거겠지. 못 믿겠으면 그냥 드라이브한다고 생각하고 즐겨봐. 삼십삼 분 뒤에 도착한다고 하니까 그때까지만 좀 참고. 봐봐. 풍경 좋잖아.
도착까지 십오분 남았을 즈음 아는 길이 나왔는지 엄마는 안도했고 아침에 혼자 갔던 구불구불한 커브 길은 한 번 연습한 덕에 조금 더 능숙하게 운전할 수 있었다. 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엄마 집 앞 골목 앞에 차를 세웠다.
“살다 보니 네가 운전하는 차를 타는 날도 오는구나.”
그건 아마도 엄마의 무뚝뚝한 칭찬이었던 것 같다. 토요일이라 서울 가는 길도 한참인지라 화장실만 들르고 다시 시동을 켜 출발했다. 백미러 속 엄마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서 있었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는 내가 백미러에서 눈을 뗄 때까지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