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3

고구려 전성기 3 (광개토대왕 1)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33

ㅡ 고구려 전성기 3 ㅡ

(광개토대왕 1)


우리나라가 외침 당한 횟수는 약 3,000번 정도라고 흔히 말한다. 그러나 이는 1년에 한 번꼴로 침략을 받은 셈이 되어 지나치게 과장된 수치라 할 수 있다. 중국, 거란, 여진, 몽골, 왜 등의 소규모 약탈까지 모두 포함한다 하더라도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우리나라가 외세로부터 크게 침략당한 주요 횟수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한나라 시대 : 고조선 침략, 한사군설치


수·당의 침략: 3회 (수나라 2회, 당나라 1회)


거란의 침략: 3회


여진의 침략: 1회


몽골의 침략: 6회 (1231년부터 1259년까지 6차례, 9회라고도 하지만 대대적 침략으로만 봤을 때)


임진왜란: 1회


병자호란: 1회


일제강점기: 1회


6.25 때: 중공군 침략 1회


이를 모두 합하면, 주요 외세의 침략 횟수는 약 18회 정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외국을 침략한 경우는 어떠할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외국을 침략해 영토를 획득한 경우는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전쟁은 외세의 침략을 방어하거나 우리나라의 주권을 지키기 위한 방어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 속 에는 외국을 공격한 국지적인 군사행동이 있었으며 일부 시기 에는 대대적인 정벌활동도 있었다.


고구려 시기에는 '한사군'을 정벌하는 등 영토를 확장하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윤관'이 여진정벌하여 국경을 안정시켰다. 조선시대에 들어서 '세종대왕'은 대마도(쓰시마) 정벌을 단행하였으며, '광해군' 때에는 명나라의 요청으로 원정군을 파견해 후금과 싸우기도 했다. '효종'시기에는 청나라의 원병 요청에 따라 출병한 사례가 있으며 동시에 북벌정책을 추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대외 정벌’이라 하기에는 다소 제한적 이거나 소규모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우리 역사 속에서 '광개토대왕' 만이 진정한 대외정벌에 나섰다 할 수 있다.


광개토대왕의 공식적인 호칭은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삼국사기'에서는 이를 줄여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 기록하였으며 이것이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명칭이 되었다.


현대에 들어 ‘대왕’이라는 존칭이 붙어 "광개토대왕'이라 부르게 되었고 이는 일반적으로 가장 널리 쓰이는 명칭이다.


한편 당대에 사용된 ‘태왕’ 칭호를 존중하여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을 줄인 <광개토호태왕>이라는 표기도 사용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 역사 속 수많은 왕들 가운데, ‘세종대왕’과 더불어 ‘광개토대왕’만이 ‘대왕’이라는 호칭이 보통명사화되어 있다.


그 이름 ‘광개토(廣開土)’는 말 그대로 “땅을 넓게 열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廣開土王, 諱談德, 故國壤王之子. 生而雄偉, 有倜儻之志.]


광개토왕의 이름은 '담덕'(談德)이며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 그는 나면서부터 체격이 크고 생각이 대범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왕조 ㅡ


광개토대왕은 18세 나이로 보위에 올라 39세 젊은 나이로 서거하기까지 수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정복사업과 전쟁 승리를 통해 한국사에서 유례없는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광개토대왕 즉위 시, 고구려 대외정세는 썩 좋지 않았다.

‘고국원왕’ 시기에 소모된 국력을 ‘소수림왕’이 재건했기에 광개토대왕은 국력 회복에 힘쓸 필요는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외교적 입지는 불안정했다.


소수림왕 시기, 고구려 북방 유목 민족에 대한 영향력은 약해져 있었고, 남쪽 백제는 비록 백제 최고전성기 구가한 '근초고왕'이 사망했지만 여전히 강력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서쪽으로는 모용선비와 한족이 연합한 강국 '후연'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나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불리한 정세 속에서도 주요 적국 백제를 공격하여 항복시키고, 서쪽 후연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요동지역을 차지했다.


또한 북쪽 유목민족들을 정벌하여 만주일대를 영토로 편입하였고,

말갈 등 여러 북방세력을 휘하에 두어 북쪽영토를 대폭 확장시켰다.


그 결과 고구려는 역사상 최대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당대 동아시아 주요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중국 남북조시대에는

“만리장성 동쪽지역은 고구려 관할”이라는 발언이 나올 정도로 고구려 세력이 인정받았다.


이는 중원 패권이 분열되어 있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더라도 매우 이례적인 일로, 광개토대왕이 주변 거의 모든 지역 강국들을 제압하거나 복속시킨 결과였다.

실제로 그는 후연, 백제, 동부여, 패려 등 당시 만주와 한반도 권역 거의 모든 주요 국가들을 굴복시켰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정복전쟁에서 탁월한 업적을 세워 웅대한 민족적 기상을 남겼으며,

한국사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왕 중 한 명으로 손꼽히게 된 것이다.


흥미롭게도 광개토대왕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오늘날처럼 ‘대왕’이라 불리지 않았다. 이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광개토대왕 업적을 간략히 기록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이 오늘날과 같이 위대한 정복 군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세기말,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에 있는 '광개토대왕비' (廣開土大王碑)가 재발견되면서부터이다.


이 비석을 일본 참모부 정보장교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가 탁본해서 일본에 보내 연구하면서 비로소 그것이 광개토대왕 업적을 기록한 비석임이 밝혀졌다.


그전까지 우리 선조들도 이 비가 존재했던 것은 알고 있었으나 금나라 황제 공덕비 정도로만 여기고 별 신경 쓰지 않았다.


'광개토대왕비'는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큰 비석으로, 광개토대왕 정복사업과 군사업적 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한·중·일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료로 평가받는다.

다만 비문의 일부글자가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기 때문에 그 해석에 따라 동북아 전체 고대사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도 해석과 관련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임나일본부' 존재와 맞물려 아직까지도 한일 간 역사전쟁이 진행되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이유로 광개토대왕은 수많은 창작물과 대중문화에서 다뤄지고 있다.


그는 정복 군주이면서 젊은 나이에 사망한 인물로 흔히 <한국판 알렉산더 대왕>이라 불리기도 한다.


한국사에서 세종대왕 다음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군주이지만,

일부에서는 그의 정복 규모가 실제보다 과장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들은 광개토대왕이 확장한 영토가 전해지는 것보다 좁고, 당시 상대국들도 상대적으로 약세였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평가는 세계사적 관점에서 '알렉산더'대왕이나 '칭기즈 칸'처럼 광대한 대륙규모 정복을 이룬 인물들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대한국에서 민족주의적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광개토대왕 업적이 실체보다 다소 과장·미화된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세부적 진실과 역사적 평가의 문제는 다음 편에서 광개토대왕 구체적 업적과 함께 자세히 다루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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