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5

신라최고전성기 3 ㅡ(진흥왕 1- ‘지소태후’와 '화랑세기' 편)

by 초롱초롱 박철홍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45

ㅡ 신라최고전성기 3 ㅡ

(진흥왕 1- ‘지소태후’와 '화랑세기' 편)


‘진흥왕!’


신라 왕들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름이다. 국사시험 단골 소재인 ‘진흥왕 순수비’를 떠올리는 사람 많지만 정작 그의 통치 내용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 576)은 신라 제24대 왕으로 신라 최고전성기를 열었다.


'진흥왕'(眞興王, 540~576년)은 신라 24대 왕이다.


우리는 꽤 오래전 선풍적 인기를 끈 '선덕여왕'이라는 역사드라마 초기에 진흥왕이 잠시 나오는 장면을 봤다. 나이 많은 '이순재' 배우가 진흥왕으로 나오는데 허연 머리 허연 수염에 너무 나이 먹어 보였다. 그 드라마를 볼 당시에는 당연한 장면으로 보았다.


그러나 역사 속 실재 진흥왕은 우리 상상 속 이미지와 많이 다르다. 진흥왕은 6세라는 너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젊다면 젋다고 할 수 있는 43세 나이에 죽었다.


진흥왕은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함께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청년정복군주로 평가된다. 또한 진흥왕은 ‘지증왕’과 ‘법흥왕’의 뒤를 이어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현명한 군주이기도 하다.


진흥왕 시기를 전후로 신라는 실질적인 국력 면에서 백제를 추월하고, 고구려와도 대등하게 경쟁할 만큼 강성해졌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진흥왕의 적극적인 정복전쟁 으로 인해 이후 약 100년간 백제 고구려 양면전선에 시달리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진흥왕은 불과 여섯 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따라서 초기는 어머니 '지소태후'가 10년 넘게 섭정을 맡아 주도했다. 일설에는 '법흥왕' 정비이자 진흥왕 외할머니인 ‘보도부인’이 잠시 섭정하다가 지소태후에게 정권을 넘겼다고도 한다.


어쨌든 진흥왕 초기업적은 거의 모두 지소태후 손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소태후를 이야기하려면 신라 혼인관습과 성풍속을 다룬 사서 '화랑세기'를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 이유는 그녀의 일생과 신라 왕실의 복잡한 혼인관계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거의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신라 자유로운 성문화와 근친혼, 그리고 화랑들 풍속이 유교적 가치관에 익숙한 조선시대 사대부들에게는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화랑세기'는 신라 화랑제도를 다룬 사서로, 신라중기 진골출신 학자이자 불국사를 창건한 '김대문'이 저술했다고 알려져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화랑세기'를 인용한 구절들 있어 고려 후기까지는 원본이 존재했음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흔적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분명하다. '화랑세기'에는 근친혼, 동성애, 자유로운 성생활 등 당시 신라의 풍속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리학적 가치관을 중시하던 조선사대부들 이 '금서'(禁書)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화랑세기' 필사본이 1989년에 공개되면서 학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


이 필사본이 진본이라면, 이는 '삼국사기' 보다 약 460년이나 앞선 기록이 된다.


하지만 임창순, 이기백, 이기동 등 당시 고대사 권위자들은 “내용이 지나치게 자극적이고 일본 풍속과 유사하다”며 위작 가능성을 제기했다. 현재까지도 '화랑세기' 진위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일부 재야사학자들은 “성문화가 자유롭다고 해서 위서로 보는 것은 옳지 않다”며 반박한다.


실제로 최근 신라시대 토우(土偶)에서 '화랑세기' 묘사와 유사한 장면이 발견되기도 했다. (아래 사진 참고)


공개된 필사본은 일제강점기 때 고서 담당 관청인 ‘서릉부’에서 일하던 '박창화'가 쓴 것이다.


그는 12년간 근무하며 신라 관련 고문서를 접할 기회를 가졌고, '화랑세기'를 필사하여 평생 비공개로 보관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제자 부인인 '김경자' 씨가 1989년 서울신문을 통해 이를 공개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1995년에는 일본 궁내성에 보관된 좀 더 완전한 필사본 (모본)도 공개되었다.


그러나 필사 경위가 불분명하고, 내용 중 기존 사료와 상충되는 부분이 많아 주류 사학계는 대체로 위작으로 본다. 다만 '화랑세기'라는 책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필사본이 위작일 수는 있어도 신라시대 '화랑세기'라는 사서가 실제로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화랑세기' 기록에 따르면 오늘 글의 주인공 '지소태후' 생애는 매우 파란만장하다. 지금 우리 상식으로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다.


지소태후는 '법흥왕' 딸로 태어나, 숙부인 '입종갈문왕'에 시집가서 훗날 '진흥왕', 장남 '삼맥종'을 낳았다. 차남 '숙흘종' 딸은 바로 김유신 어머니 '만명부인'이다.


이후 남편이 사망하자, 지소태후는 자신 뜻에 따라 여러 남성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요즘 할리우드 배우를 훨씬 뛰어넘는 남성 편력이었다.


지소태후 남편들을 차례대로 살펴본다.


둘째 남편 '이화랑', 둘 사이 딸은 '만호태후'(진평왕 어머니)를 낳았다.


셋째 남편 '이사부' 독도는 우리 땅 노래에도 나오는 장군, 둘 사이에 아들 '세종전군'(6대 풍월주)과 딸 '숙명공주'를 낳았다. 숙명공주는 진흥왕 후궁이 되었고, 또한 어머니 둘째남편였던 이화랑과 관계에서 '원광법사'를 낳았다고 한다.


넷째 남편 '박영실', 둘 사이에는 딸 '황화공주'(자장율사 어머니)와 송화공주(마야왕후 어머니)를 낳았다. 마야왕후는 '선덕여왕' 어머니가 된다.


다섯째 남편 구진, 둘 사이에 딸 '보명궁주'를 낳았는데 그녀는 진흥왕·진지왕·진평왕의 후궁이 되었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이외에도 지소태후에게는 몇 명의 남편이 더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대적 시각으로 보면 놀라울 만큼 자유분방한 연애행적이고 어지럽기까지 하지만, 신라사회에서는 왕실혈통과 정치적 동맹을 유지하기 위한 혼인네트워크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지소태후는 단순히 연애 화젯거리로만 남은 인물이 아니다. 앞서 나온 그녀 후손들 면면을 봐도 거의 대부분 우리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유명인물들이다.


지소태후는 어린 진흥왕을 대신해 신라 정치와 군사체제를 안정시키고 신라 확장정책 기반을 닦은 뛰어난 정치가였다.


진흥왕 시기 초반업적들인 <국토 확장, 화랑 제도의 정비, 중앙집권 강화> 등은 대부분 지소태후 섭정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요약하자면, 진흥왕 어린 즉위와 지소태후 섭정은 신라 전성기를 여는 핵심적인 사건 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신라 독특한 혼인풍속과 화랑문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화랑세기' 진위논란과는 별개로 그 속에 담긴 기록들은 신라사회 자유롭고 활달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창이다.


다음 글에서는 진흥왕의 주요 업적을 중심으로 그가 어떻게 신라세력을 한반도 전역으로 확장했는지 살펴보겠다.


― 초롱박철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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