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디르프의 편지#10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해 단 하나의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면 우리의 목표는 확고하다.
그건 바로 정원의 주인이 첫 인간들에게 준 ‘무기’를 파괴하는 거지.
인간에게 주어진 첫 ‘무기’.
그건 바로 결혼이다.
결혼이 어떻게 인류에게 무기가 될 수 있냐고?
‘결혼’이라는 것은 한낱 인간이 만들어낼 수 있는 제도가 아니라
정원의 주인이 인간 사회를 위해 준 것이다.
만약 우리들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거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인류를 가장 효율적으로 역사에서 지우기 위해 우린 딱 시점을 선택할 거다.
그러면 아주 간단하게 지구상의 인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도록 할 수 있어.
우선 이런 시나리오가 있지.
정원 주인이 시작한 인간 프로젝트의 첫 챕터의 세번째 페이지에서 말이야.
‘인류humankind’라는 뜻과 ‘흙(earth)’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그 ‘남자(אדם)’가 만약에 말이지.
그 ‘생명’( חַוָּה )이라고 불리는 여자가 맘에 안 들어서 ‘하나’가 되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고.
그럼 인류의 역사는 거기서 끝이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
한 문명, 사회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결혼’을 공격하면 인류를 멸절 시킬 수 있다.
물론 그런 확신을 가지고 수백년에 걸쳐 여러 문명 속에서 그 활동을 해왔지.
옛날에 말이다.
이런 전략이 먹혔지.
남자가 여자보다 우월하다거나, 여자를 ‘소유물’로 삼아도 된다는 그런 사상을 퍼뜨린다거나 말이야.
그렇게 우리는 인간들에게 힘의 논리를 가르치고 힘이 약한 존재는 열등하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고대문명에서 여성은 약자가 되었지.
물론 대를 잇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보게 하는 시선을 심기도 했고, 매력적인 여성에게만 더 높은 가치가 있다고 믿게 한다거나, 또 우습게도 그런 매력에게는 굴복해서 자청해서 노예가 되게 만들기도 하면서 말이지.
어떤 국가에서는 ‘유교’라는 꽤 괜찮은 가르침 속에 ‘남존여비’라는 이름으로 한 구석에 심어놓고,
어떤 국가에서는 ‘카스트 제도’라는 사회 시스템의 일환인 것처럼 하등계급인 것처럼 만들어두었지.
어떤 국가에서는 ‘여성의 몸을 보이지 않게 다 가려야 한다’는 규율을 만들어 그걸 ‘문화’라고 부르는 틀로 가두고 말야.
물론 정원의 주인과 그의 아들, 또 그의 제자들을 통해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라는 개념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후에는 우리의 거짓에 속지 않는 문화가 퍼져 나갔지. 지금도 여성 인권이라는 곳이 어디가 높은지를 살펴보면 그 문명의 역사 속엔 정원의 주인의 흔적이 남아있지.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전략을 바꿨지. 지금은 그게 오로지 계몽주의의 산물이라고 믿게 만드는 것에 성공했으니 이 부분은 더 이상 우리가 힘쓸 필요가 없게 되었지. 잘한 건 다 자기들 덕분이고 안된 건 다 조물주 탓으로 돌리는 너희 인간들의 특성상.
그래서 요즘 하는 게 뭐냐고?
결혼을 막연히 두렵게 생각하게 하거나
결혼에 엄청난 낭만을 씌워 환상만 보게 한다거나
결혼이 뭔지 생각해보기도 전에
결혼식, 신혼집, 혼수 같은 것의 준비에만 촛점을 맞추게 한다거나
결혼을 하기 전엔 소꿉놀이하듯
동거가 마치 결혼생활의 준비단계인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거나
영화나 드라마 속의 ‘결혼’이
결혼의 ‘현실’이 아닌
극단을 그리게 하거나
이런 저런 것들을 하고 있지.
성과는 대만족이다.
인간이라면 당연히 가질 수 밖에 없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미지에 대한 두려움이
마치 ‘결혼’을 향한 두려움인 것처럼 믿게 되면
결혼 자체를 하지 않으려 들지.
자기 부모의 결혼, 혹은 친척의 결혼에서 본 것들을 가지고
그게 마치 ‘모든 결혼은 그렇다’고 믿거나.
자신의 결혼 역시 부모의 결혼과 다름없을 거라는 착각.
인간이 감히 알 수 없는 미래를 스스로 알고 있다는 오만한 예측.
혹은 낭만의 색안경을 쓰고 마치 ‘운명의 그 사람’을 찾으면
모든 게 다 행복할 거라는 그릇된 믿음 역시 치명적이지.
누굴 만나도 결국 마주하게 될 ‘인간이 채워주지 못할 이상’,
두 인간이 평생 서로 다른 삶을 살아왔는데 ‘결혼식’이라는 이벤트를 같이 했다고
갑자기 서로에게 모든 걸 맞춰주며 서로에게 완벽한 존재가 될 거라는 기대를 갖게 만든 다음..
나를 거슬리게 하는 그 부족함을 상대의 문제로 인지시키고 두 사람의 관계를 포기하게 만들지.
결혼 역시 그저 성대한 파티를 한 번 했을 뿐인 연애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결혼의 본질은 ‘약속’이다.
날씨, 건강, 재력, 배고픔의 정도 등 수많은 요소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기분’,
두 사람의 변덕으로 부숴버릴 수 없는 ‘견고한 관계’를 만드는 것이지.
세월이 흘러도 기분이 변해도 파괴할 수 없는 ‘가족’을 만드는 것이 결혼이다.
그래서 많은 증인 앞에서 서약을 하고
자신들의 약속 위에 더 큰 무게를 싣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하다.
그게 결혼의 원형이 일부일처제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이 ‘두 여자’를 ‘아내’와 ‘어머니’로 놓아도 마찬가지.
남편이 어머니에게 100% 순종하면서 아내도 행복하길 바란다면
그건 아내가 자신과 동등한 가치와 권위를 가진 존재라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지.
물론 성품이 훌륭한 시어머니가 존재할 수도 있으니,
그런 희소한 가능성을 제외하고는 말이야.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배려하고 고개를 숙이고 사과하고 두 사람 간의 갈등을 조율하는 것도 어려운데
한 사람이 두 사람, 세 사람에게 동시에 고개를 숙이고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믿게 하면
그 결혼은 당연히 어려워지겠지.
남편이라는 존재가
결혼 후에도 자신의 부모에게 종속적이라면
아내가 감당해야 하는 짐은 더 무거워지겠지.
그래서 정원의 주인이 처음 준 결혼에 대한 매뉴얼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와있지.
남자가 부모를 떠나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게 결혼이라고.
결혼은 둘을 하나의 새로운 단위로 만든다.
부부라는 존재, 부모라는 존재가 되면
개인의 속성을 보유하지만 두 사람으로 구성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지.
그 부부를 떼어내서 잘라내면 그 부작용이 엄청난 ‘하나의 존재’가 된다.
요즘은 결혼식을 먼저 올리고
여러가지 합리적인 이유를 갖다붙이면서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식으로 불확실성을 다루는 신혼부부들도 늘었다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지금 헤어지면 법적으로 이혼경력이 남지 않는다는 게
두 사람의 관계를 견고히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모른채 말이야.
그래,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결혼한게 아니라면
그 부부가 되는 ‘결혼식’은 결혼식이 아니라 그냥 비싼 파티에 불과한건가?
너희들이 그렇게 ‘본질’이나 ‘의미’에 대한 고민이 없이 살아갈수록
우리들의 세상은 넓어져가니 큰 불만은 없지만 말이야.
너희들을 유혹하는 나에게도 일관성이란 개념은 꽤 매력적인 거란 말이지.
또 다른 전략으로는 이런 게 있지.
아이가 없으면 결혼이 아니라고 믿게 하거나
결혼은 같은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사물과 할 수 있다는 망상을 심는다거나.
애당초 결혼을 하기 전에 같이 살아보는 것과
결혼을 하고 같이 사는 것은 전혀 다르다.
중고차를 고르듯이 차를 타보고 구매를 결정하는 계산적인 관계가 결혼이 될 수 없지.
그건 그저 서로의 불안함을 숨긴채 현명한 척하며 신중함의 탈을 쓴 채
탈출구와 새로운 인연을 찾을 ‘퇴로’를 보유하고 싶은 거지.
무엇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 가는 신체적, 정신적 성장 다음에
한 성인이 또 다른 수준의 성숙함에 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
그게 결혼이다.
다른 관계 였다면 단절을 택하고 거리를 두고 무시하면 될 것들을
부부 사이에서는 서로 해결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하니.
서로 참고 용서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알고 상대를 더 알아가는 삶 속에서
‘미성숙한 어른’에서 ‘성숙한 어른’이 되지.
부모가 되면 더 그렇고 말이야.
아이를 기르는 그 결혼이라는 약속을 통해 유지되는 안정적인 가정이란 틀을 걷어내면
결국 남는 게 뭘까?미련함이 가득한 아이들끼리 서로를 가르치며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나이만 먹은 가짜 어른들이 가득한 세상'이 되지.
그 역시 우리들이 즐거워 하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