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잃고 뇌 약간 고쳤어요...
<원더키즈 2020>이라는 구시대 애니메이션 짤방이 돌아다니면서 어떤 해가 될까 우왕 우리가 2020년에 산다니! 하던 기대감은, 전 지구적 감염병이 돌면서 방구석에 조용히 처박혔다. 3년 동안 잘 다니다가 하루아침에 잘린 회사. '랙앤본'이라는 그럭저럭 잘 나가는 뉴욕의 패션 브랜드였다. 사실 처음 취직했을 때, 3년 다니고 연봉 더 높게 불러주는 새로운 회사가 있으면 옮겨가자! 는 게 나와 윤이콘씨(남푠)의 계획이었다. 딱 3년 만에 관두게 되었으니 나름 계획대로(?) 흘러간 것이다. 다만 갈아타는 다음 전철이 없고 그냥 정류장에 덩그러니 나앉게 되었을 뿐. 미국 내 백화점 납품에 회사 수익의 75%를 기대고 있던 랙앤본은, 코로나 셧다운으로 백화점들이 문을 닫자, 곧바로 휘청 거리며 전 직원의 50%를 잘랐다. 그렇게 큰 회사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고 있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스웨터 실무 디자이너가 나 밖에는 6개월 된 신입밖에 없어서, '설마 나를 자르겠어?' 했는데, 잘랐다. 아하하하하. 앞으로 스웨터 디자인은 어떻게 하려고? 뭐, 알게 뭐야 이제. 내가 해놓은 디자인은 2021년 봄 까지니까 회사가 살아남는다면 그때까지는 가게에서 내가 디자인한 스웨터를 보겠지.
오래 일했으니 좀 쉴 때도 되었어! 하고 느긋해질 여유는 없었다. 캐나다인인 나는 미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였기 때문에, 해고와 함께 노동자 체류신분도 사라진다는, 피도 눈물도 없는 미국 관료주의의 희생자가 될 처지에 놓여있었다. 아니 놓여있는 줄 알았다. 해고 통보 인터뷰에서 인사팀 직원이 내게 웃는 얼굴로 그랬단 말이다. 3개월간 발발 떨다가 나중에서야 알고 보니 내 캐나다인 전용 워킹 비자는 해고된다고 해서 남은 기간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이 경험을 미국 인터넷 게시판 레딧에 공유했더니, 변호사라는 작자가 납셔서 그건 세관직원이 실수한 거라고, 너는 결국 불법 에일리언*이라고 꼬장을 놔서, 그냥 글을 지웠다. 네가 뭔데 미국 세관의 결정을 우습게 보냐? 변호사기는 한 거냐? 사실 미국 변호사들한테 좋은 경험이 불행하게도 한 개도 없다. 랙앤본이 아마 한 시간당 500불쯤 주고 고용한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했다가,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서 비자를 아예 못 받을뻔한 적도 있었고, 괌 공항에서 새벽 4시에 뒷방으로 끌려가 한 시간 동안 조사받고 나온 적도 있었다. 둘 다 ‘너네 변호사는 아무것도 몰라’라는 말을 들었다. 젠장 내가 고용한 변호사도 아닌데. 아무튼.
(*미국에서는 외국인을 관료 용어로 에일리언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일리노이주에 체류 중인 한국인들은 ‘에일리언즈 in 일리노이’가 되는 것이다.)
미국이 코로나 감염자 수 전 세계 1등을 달리며 사망자수가 미국이 지금껏 벌인 모든 전쟁에서 죽은 시민들 숫자를 뛰어넘고, 실업자수가 30년대 대공황 시절을 뛰어넘으면서, 이건 수치상으로만 보면 미국이 3차 세계대전을 겪는 중이라고 했다. 나도 그 전쟁에 휩쓸렸다.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생각하는 방식이 달라진다고 했나. 죽을 때가 돼서야 진심을 고백한다던가, 정말 가고 싶었던 곳에 간다던가 하는 것처럼.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려서 죽을 뻔 한건 아니었지만 해고당하고 3개월간 신분과 상황이 인생이 공중에 붕 뜨면서 난 정신적으로 죽음의 새끼발가락쯤 되는 위기를 겪었다. 내 안에서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1) 어릴 적 : 내 패션 브랜드를 만든다!
2) 취직 전 : 취직한다! 비자를 받는다! 윤이콘씨와 같이 산다!
3) 취직 후 : 돈을 슬슬 모아서... 대출(모기지) 받아서 룸메 없이 우리만 살 집으로 이사한다!
4) 해고 후 : 그동안 풀타임 하느라 영혼이 너무 털렸다. 잘린 김에 널럴하게 프리랜서를 하자!
5) 코로나 격리 4개월 후: 악!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 가고 싶다! -> 프리랜서 수입으로는 집 사려면 20년 걸린다! -> 다시 풀타임 해서 돈 모은다!
다시 풀타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결정했을 때, 나는 목수가 도끼질한 나무가 쓰러지듯 정면으로 침대에 쓰러지며 베개에 얼굴을 처박은 채 윤이콘씨에게 말했다.
“으어어 나는 소 잃고 뇌 약간 고쳤어요...”
처음엔 그냥 웃기는 틀린 문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것만큼 찰떡인 비유가 없다. 윤이콘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하. 난 예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이사해서 우리끼리 사는 게 우선이었어요."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나 보다. 아니, 절박하긴 한데, 이사 갈만한 집이 없었다. 30년 (노예계약) 대출 모기지를 받으면 이사 갈 수 있는 집들이 나오긴 하는데, 3년 동안 보면서 맘에 든 집은 하나도 없었다. 뉴욕의 집들은 죽을 만큼 후지거나 천문학적으로 비싸거나 둘 중 하나였다. 중간이 없었다. 다만 그때-코로나 전에-는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은 못했다. 주말마다 어딘가 갈 수 있는 생활을 할 당시의 우리 아파트는 룸메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빼면 괜찮은 집이었다.
그러고 보면 내 뇌는 그동안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면서 서서히 고쳐졌다. 클리셰스러운 대사지만, 다들 그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가? 고작 사회생활 5-6년 했다고 정신력이 다 털려서 난 이미 시골집 할머니가 되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일렀다. '시골집'이 없었다. 집 값 마련을 위해 안정적인 정규직으로 되돌아가야 했다. 해탈한 얼굴로 다시 구인구직사이트 링크드인에 들어가서 가문에 콩 나듯 올라오는 구인 포스팅에 이력서와 포폴을 보내기 시작했다.
원래 패션 디자이너를 하겠다고 나서는 꼬맹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는걸 꿈꾼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지 않은 애들이 이상한 거다. 인생을 2번 살아서 안에 노인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그리고 그 꿈과 희망에 가득 찬 꼬맹이들은 대부분 졸업하면서 슬슬 현실과 마주한다. 패션은 사업이고 사업은 웬만하면 망한다. 패션만큼 망하기 좋은 사업이 없다. 사람들이 옷을 사는 이유는 필요하거나 (예: 마트에서 장 보다가 같이 사는 양말), 원해서 (예: 예쁘거나 유행하고 가격도 적당한 옷)인데, 어디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꼬맹이가 피땀 눈물 섞어 지어낸 비싸고 희한한 옷은 필요하지도 않고 원하지도 않고 슬프게도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밑 빠진 독처럼 계에에에에에속 쌩 돈을 부어가며 대기업 초봉을 15분 만에 다 써버리는 패션쇼를 1년에 두 번씩 계속해서 기약 없이 하다 보면 언젠가 인지도가 좀 올라갈 수도 있다. 보통 미국 백화점 바이어님들은 신생 브랜드가 그렇게 적어도 3년은 버티는 걸 보고 나서야 입점 해줄랑 말랑 한다. 지금은 코로나로 그 백화점들도 망했지만.
중국에 의류공장을 13개 갖고 있는 부모가 없는 보통 가정의 꼬맹이들은 그렇게 차선책으로 목표 수정을 한다. 내 브랜드는 나중에 언젠가 죽기 전에 차리고, 일단은 유명하고 잘 나가는 브랜드에서 취직해서 일하는 것. 그건 결국 대기업에 취직하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어쩌면 더 힘들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라떼(2012~2014년쯤)만해도 유럽의 유우우명한 브랜드들은 심지어 거기서 무급 인턴을 하는 것이, 1000대 1로 피 터지게 싸워 이긴 패션 디자인 콘테스트의 ‘상’이었다. 게다가 <미생> 같은 드라마를 보면, 큰 회사에 취직하는 건 인사팀이든 영업팀이든 부서가 크게 상관이 없어서 들어갈 데가 많은데, 패션디자인 꼬맹이들은 대부분 당연히 디자인팀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건 패션 브랜드 회사 전체의 포지션들 속에서 정말 빙산의 일각만큼 쪼그맣다. 인지도 있는 패션 브랜드 회사들이 올리는 구인 중에 디자이너 포지션은 희귀종이다. 브랜드들 중에는 아예 디자이너를 안 쓰는 곳도 많다! (외주를 준다...)
그렇게 내 주변의 많은 문화복장학원 어패럴 디자인과 출신 친구들은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뇌를 약간 고쳐서 현실과 타협했다. 방금 졸업한 모교의 보조 교사, 머천다이저, 생산관리, 스토어 판매직 등등으로 취직했다. 패턴 메이커가 되면 양반이다. 인 하우스 패턴 메이커도 사라지고 있는 직종이다. 요즘은 패턴도 브랜드에서 직접 안하고 그냥 공장에 맡긴다. 물론 업계를 아예 떠난 친구들도 많다. 졸업하자마자 일본의 컬렉션 브랜드에서 잘 일하다가 싹 다 접고 산속으로 들어가 부동산 중개사 시험공부를 하는 친구도 있다. 아마 가장 흔한케이스는 결혼하고 애기를 낳고 전업주부가 된 여성 친구들이다. 패션디자인 관련 사진들이 주를 이루던 내 인스타그램 피드에 언젠가 부터 애기 사진들이 가득하다. 그게 별로다, 나쁘다 하는건 아니고, 그냥 현실이다.
나처럼 은행돈을 끌어와서 학업에 더 많이 돈을 처발라 부어서 좀 잘 나가는 대도시 컬렉션 브랜드의 디자인팀에 운 좋게 어찌어찌 취직이 되면- 결국 회사원이 된다. 승숙(엄마)은 내 학비를 대기 위해 부동산을 팔고, 신용대출을 받았다. 그래도 모자라서 마지막 학비를 못 냈다. 학비는 못 냈어도 졸업 작품으로 뉴욕패션위크는 할 수 있었고* 나의 졸업과 함께 우리는 빚쟁이가 되었다. 첫 월급으로 부모님 선물을 사드리기는 커녕 (다행히 회사에서 자기네 옷 사라고 쿠폰을 줘서 부모님께 내가 디자인한 캐시미어 스웨터를 선물 할 수 있었다) 못 낸 학비를 할부로 갚기에 허덕였다. 파슨스 학비는 정말 더럽게 비싸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제발 미국 대학은 100% 장학금이 아니면, 부자가 아니면 가지 말라고 한다. 난 50% 장학금을 받았는데도 이 모양이다. 그리고 그냥 뉴욕이라는 도시 자체가 사는 게 더럽게 비싸다.
(*패션쇼는 교수님 관할이고, 학비는 서무실? 관할이고, 둘은 커뮤니케이션을 안 한다. 당시 못낸 학비를 지금 72개월 할부로 학교에 갚는 중이다. 내 손에 졸업장은 없지만 비자 신청 등 졸업장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학교가 변호사한테 내 졸업증명서를 쏴준다. 할부금을 꼬박꼬박 내고 있어서 받을수 있는 서비스... 근데 72개월 할부는 사실 양반이란다. 학자금대출을 받은 미국애들은 거의 평생에 걸쳐서 갚는다.)
그래서, 그 돈 낸 게 아까워서, 아니 아직 지금 다 갚지도 못해서, 죽어도 난 계속 패션디자인 쪽으로 가야 한다고 그게 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비싼 학교 다니며 공들여 세워놓은 레퓨테이션을 지키느라, 잘 나가는 브랜드가 아니면 일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간의 노력이 허송세월이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코로나 사태 이전의 내 뇌다.
지금 내 뇌는 조금 다르다. 브랜드고 나발이고 바짝 돈 모아서 현금으로 숲 속에 땅을 사고 작은 집을 짓고 동화작가가 되고 싶다. 솔직히 동화작가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무데서나 살아도 되는, 지구에 쓰레기를 덜 만들어내는 직업으로 갈아타고 싶다. 패션업계는 쓰레기를 너무 많이 만들어낸다. 석유산업 다음으로 지구를 오염시키고 있단다. 하긴 폴리에스테르 같은거 다 석유에서 뽑아내는 거다. 그래서 마아아아안약에 책을 낸다면 전자책으로만 내고 종이책은 내고 싶지 않다. 마아아아아아안약에 내가 퓌지컬한 종이책을 내는게 세상에 도움이 된다면, 집 짓는 돈 모으는데 도움이 된다면, 똥 색깔의 재생지를 쓰겠다. 그러면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말한 것처럼 기후위기로 현대 문명이 멸망하고 원시시대로 돌아가면 내 책은 좋은 땔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