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중생활] 우리 '함께' 행복할 순 없을까?
“엄마.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아이의 말에 내 귀가 솔깃해진다. 엄마? 아빠? 누굴까?) “바로 바로. 뚜뚜야.” (뭐라? 엄마가 아니였어?)
세상에서 동생을 가장 사랑한다는 큰 아이에게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한 마디 “뚜뚜랑 매일 싸우잖아.” 그러자 여섯 살 큰 아이가 한껏 치켜 뜬 토끼 눈으로 내게 어퍼컷을 날린다.
“엄마도 아빠랑 자주 싸우지? 그래도 둘이 사랑하잖아. 나도 그래.” 그야말로 우문현답에 무릎을 탁 치고 말았다.
'정치하는 엄마가 되고 나서 가장 힘들었던 점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글쎄요. 아마도 부부싸움을 더 자주 하게 된 것 아닐까요?” 물어본 이도 답하는 이도 멋쩍게 웃을 수밖에 없는 대답.
남편과 나는 결혼 8년차, 연애 10년차, 서로 알고 지낸지는 20년차에 접어드는 오래된 인연이다. (풋풋했던 감정의 결이 다소 다채로워지긴 했지만) 나는 여전히 견실하게, 그를 사랑한다. 또 신뢰한다. 같은 아이의 엄마 아빠로 살아온 지난 6년의 세월동안, 나뿐 아니라 그 역시 자신의 한계를 넘어 최선을 다해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남편 생각에 코끝이 찡해진다. 육아 동지로서, 인생의 길벗으로서, 여전한 연인의 감정으로 안쓰럽고 대견하고 고마워서. 나뿐 아니라 그 역시 아빠가 되기 위해(이름뿐인 아빠로 남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을 감수했다. 얼마 전엔 남편이 씁쓸한 듯 읊조렸다.
“여보, 그거 알아? 나는 생계형 연구자야.”
자신을 생계형 연구자로 지칭하는 남편의 눈빛 너머에 또 다른 내가 서 있었다. 아빠라고 다를까. 부모의 시간을 살기로 결심한 이들이라면 그 누구든 저마다의 댓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은 그런 곳이다. 다시 없을 이 시절, 잭의 콩나무처럼 쑥쑥 자라가는 내 아이를 지켜보기 위해선, ‘무능력’이란 꼬리표도 달게 감수해야 하는 사회. 말 없이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수고했어, 오늘도. 당신도 나도 아이들도 우리 모두.
그런 애정과 신뢰에도 불구하고, 정치하는 엄마가 된 이후로 남편과 자주 싸우고 있다. 모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정말 그렇다. 자연스러운 결과다. 부부에게 주어진 시간은 변함없이 하루 48시간뿐인데, 우리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졌으니까. 뭐니뭐니해도 가장 큰 변화는 나에게 있었다. 글을 쓰고, 토론회에 참석하고, 회의를 가고... 이 모든 스케줄이 우리 가정의 일상에 새롭게 끼어 들어온 격이 됐다. 남편의 일터 환경 역시 여러모로 새로워져서 나뿐 아니라 그에게도 이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때마침 둘째조차 한시도 눈을 떼기 힘든 19개월, 눈 깜짝하는 새에 사고가 나기 쉬운 시기. 여섯 살 큰 아이라고 다를까. 바빠진 엄마 아빠, 주가가 치솟는(?) 동생 질투에 부쩍 관심을 요하는 요즈음의 큰 아이. 그 어떤 집인들 싸우지 않을쏘냐.
시간 아닌 다른 것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과 응원을 증명할 수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현재의 상황에선 결국 '남편이 자신의 시간을 나눠줄 때'에만 남편의 응원(“정치하는 엄마인 당신이 자랑스러워.”, “당신은 엄마이기 이전에 조성실이야. 엄마란 정체성에만 매몰되지 마.”)이 말이 아닌 현실이 된다. 때때로, 공동육아를 함께 하는 이웃들과 양가 어른들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결국 남편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수밖엔 없다. 나만큼이나 가정에 충실했던 남편을 생각하면서, 그 남편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알기에, 가끔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자괴감에 휩싸인다.
정녕 우리 '함께' 행복해질 순 없는걸까 하면서.
그런 자기모순의 소용돌이를 헤매다 보면 끝내 이런 한탄이 튀어나온다. “여보. 당신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 그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 그래서 나도 괴로워. 그치만 나는. 당신이 '생계형 연구자'로 버텨온 지난 6년간 나는 '그저 전업주부 아무개'일 뿐이었어. 내가 아무리 ‘엄마’란 이름에 자부심을 가진대도 결국 아이들은 내 품이 아닌 자신의 삶을 찾아 떠날거고, 난 그 걸음을 응원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 그런데 나도 모르게 아이들을 붙잡고 싶어지는 순간마다 두려워. '아이들로만 꽉 차 있는 나에게, 아이들이 떠난 자리가 얼마나 클지' 벌써부터 알 것 같거든. 아이들이 떠나고 텅 빈 내 자리, 사회로 돌아가기엔 이미 너무 도태된 내 자신을 견딜 수 있을까.”
부족한 시간뿐 아니라 이전과 달라진 나의 마음가짐도 싸움의 원인이 된다. 엄마정치는, 당사자인 엄마 자신조차 ‘어쩔 수 없다’고, ‘싸우는 부모보단 참는 엄마가 낫다’고 생각해 체념해버리거나 일면 순응해왔던 기존의 질서에 도전하고 질문한다. 짐작건대 그 과정에서 괴로워진 언니(정치하는 엄마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서로를 ‘언니’라고 호칭한다. 자세한 경위는 https://storyfunding.kakao.com/episode/29014 참조)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활동은 응원하지만 그래도 당신의 할 일(해오던 일)은 차질 없이 해달라’는 배우자의 요청에, “일도 육아도 엉망이 되는 것보단 아이들에게라도 집중할 수 있는게 차라리 낫다” 싶었었는데, 이젠 생업도 아닌 일 때문에 아이들에게 소홀해지는구나 싶어 혼란스러울 때마다, 직장일만으로도 아이들에게 늘 미안한 엄마가 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젠 더 바쁜 엄마가 된 것 같아 마음이 무거울 때, 저마다 비슷한 마음으로 괴롭고, 그래서 더 자주 싸우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부부싸움에서 남편이 내게 말했다. “지금 당신이 힘든 게 내 잘못이야? 그러면 아이들 잘못이야? 당신 잘못이야? 아니지.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하고 있어. 이게 최선이야.” 맞다. 이게 최선이다, 현재의 상황에서는.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사회는 “반드시 달라져야 한다”고 믿는다. 현격한 성별 임금격차, 유례없는 장시간 노동이 만연화된 노동환경, 부실한 보육체계, 분명한 한계 속에 찾아낸 함수의 최대값 앞에서 “어쩔 수 없잖아. 이게 우리의 최선이잖아”라고 모두가 말한다. 그렇게 아이들은 부모와의 시간을 잃어버리고, 아빠들은 아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조부모는 노년의 자유를 잃어버리고, 엄마는 자신의 이름을 잃거나 나쁜 엄마가 돼야만 하는 사회. 내 아이만큼은 나와는 다른 사회를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들 원하지만 누구도 노력하지 않는다면, 결국 아무 것도 변하지 않을 것도 안다. 그래서 시작된 어쩔 수 없는 싸움. 피하고 싶었지만,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 싸움이 가장 빈번히 일어나는 장소가 바로 가정이었다. 아이들을 위해 싸움을 시작한 엄마가, 아이들 앞에서 싸우는 엄마가 되고 마는 아이러니.
남편이 자신을 ‘생계형 연구자’로 언급한 그 날 나는 남편과 만나기 직전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졌었고, ‘단체를 통해 이루고 싶은 내 개인적인 바람'("엄마정치’를 통해 이루고 싶은 대표님의 꿈은 무엇인가요?”)을 묻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저는 아들만 둘이거든요. 누군가는 제게 말해요. 딸 가진 자신도 못하는 활동을 아들 둘인 엄마가 해줘서 고맙다고요. 저는 제가 하는 활동이 ‘딸’인 제 자신을 위한 운동이고, 나아가 모든 ‘딸’들을 위한 운동이라고 생각해요. 그에 못지않게 제 ‘아들’들을 위해서라도 꼭 해야만 하는 운동이고요. 저희 남편은 저보다도 더 가정적인 사람이거든요.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 아이 둘이 태어났는데 아빠가 되기 위해 무능력하단 평가를 감수했죠. 남들은 다들 온종일 그 일에만 매달리잖아요. 아이들과 아침 저녁을 보낸다는건 상대적으로 불성실하단 시선을 감수해야만 가능한거고요. 그래도 저희는 아이들이 부모의 시간을 먹고 자란다고 생각했어요. 품 안에 자식일 때 아이들을 충분히 안아주지 못하면 아이들보다도 저희가 더 크게 후회할 것 같았고요. 엄마인 저도 결국 일-육아 양립이 어려워 전업모가 됐고, 아빠 역시 일을 하지만 자기 성취 같은 건 기대하기 어려워요. 절대적인 시간이 부족하니까요. 과로 자살이란 단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회, 그 속에서 위태롭게 매일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이들의 행복’과 ‘엄마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제 외침은 허무맹랑한 꿈일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저는 반드시 바꾸고 싶어요. 제 아이에게 아빠가 되라고 강요하진 않겠지만, 아들이 아빠가 되겠다고 하면 뛸 듯이 기쁠 것 같아요. 엄마가 되고서 알았거든요.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는게 얼마나 벅차고 경이로운 일인지. 엄마의 다른 이름이 ‘희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기회’일 수 있단 걸 증명하고 싶어요. 부모가 되는 일이 축복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아이들이 시간을 지배한다는 사실. 고로 아이들이 먹고 자라는 건 돈이 아니라 '양육자의 시간'이란 진실이야말로, 우리 사회가 끝까지 감추고 싶어하는 명제일지도 모르겠다. 그 불편한 진실에서 시작된 엄마의 싸움은, 아마도 우리 ‘함께' 행복해질 때까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래고도 진부할 싸움. 갈 길이 까마득해 보일 때마다 봄빛처럼 화사하고 가을 바람처럼 청명한 아이들의 미소를 떠올린다.
'모든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싸움, 언젠가는 내 아이도 이 싸움의 의미를 알게 되겠지. 엄마가 싸우고 있는 진짜 상대가 누구인지도 알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아 올 것이란 생각에, 두 주먹 불끈 쥐고 다시 또 용기를 낸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칼럼니스트 조성실은, ‘육아(育兒)가 육아(育我)’인 사회를 꿈꾸는 전업활동가다. 인생에서 가장 잘 한 일이 엄마가 된 일이라고 믿는 필자는, 아이 키우는 일의 중요성과 기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한다. 그렇기에 엄마 개인을 소진해야만 아이를 길러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실상을 바꿔야 한다고 믿는다. 때론 엄마라서 벅차고, 때론 엄마라서 보람찬 양가 감정들. 이 모든 경험과 문제의식을 나누고 싶어 글을 쓴다. 비영리단체 정치하는엄마들 공동대표, 하나마을 공동육아 교사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며, 여섯 살 세 살 두 아이를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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