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에 빠져 있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지훈이네가 살고 있는 고층 아파트 입구까지 와 있었다. 늦은 밤 시간이어서 불이 켜진 집은 그 높은 아파트 집 중에 서너 군데밖에 되지 않았고 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 모르는 머리카락이 허연 초로의 경비원 아저씨가 묵으면서 일하는 경비원실 불도 켜져 있었다. 지훈이는 집에 다 왔다는 생각에 몸에서 긴장이 저절로 풀렸지만 이내 다시 불쾌한 긴장감이 밀려왔는데 그건 그놈의 빌어먹을 학원 숙제 때문이었다. 뜨거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로 기분 좋게 샤워를 한 뒤 친한 친구들이랑 잠들 때까지 채팅을 하다가 곯아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마음이 들었지만 학원 숙제를 해 가지 않으면 학원 선생님으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으면서 아이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할 것은 물론이고 엄마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니 아비를 닮아서 그러지? 엄마 절반만 닮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벌써부터 뒤떨어지면 이다음은 보지 않아도 뻔하구나. 이다음에 뭐 되려고 벌써부터 게으름을 피워!”라는 익숙한 지청구를 들을 게 뻔하다는 생각을 하자 지훈이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고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를 높여 고래고래 쌍욕을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내가 돈만 넣으면 자동으로 음료수가 나오는 자판기도 아니고 그저 피곤하면 쉬고 싶고 지루하면 놀고 싶은 예민한 사춘기 소년일 뿐이라고”라고 누군가에게 하소연학고 싶어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훈이는 갑자기 절박한 심정이 되어서 누군지 모를 그 누구에게 “여기 사람 있어요. 저 좀 살려 주세요!”라고 소리치면서 도움을 청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지훈이는 이내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무도, 심지어 엄마조차도 지훈이의 절박한 외침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애들은 군소리 없이 잘 공부하는데 왜 너는 유별을 떠냐 “는 익숙한 잔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때문에 마음이 허탈해졌기 때문이었다.
지훈이는 창백한 형광등 불빛이 비치는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가서 10층에 고정되어 있는 엘리베이터의 단추를 누르고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길 기다렸다. 혼자, 그것도 밤늦은 시간이어서인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언젠가 본 공포영화에 나왔던 긴 머리를 풀고 하얀 소복을 입은 섬뜩한 처녀귀신이 나타날 것 같은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지만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지훈이는 10층 버튼을 눌렀고 엘리베이터는 웅- 하는 낮은 소리를 내면서 위로 올라갔다. 이내 10층에 닿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지훈이는 지훈이네가 살고 있는 집 현관에 다가가서 열쇠를 꺼내 현관문을 열었다. 곤히 자고 있을 다른 식구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용히 신발을 벗고 나서 불을 켰지만 불 꺼진 안방에서 “지훈이 왔니? 하는 엄마의 잠에 취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내 거실 불을 켠 엄마의 입에서는 “오늘도 학원 공부에 많이 힘들지? 그래도 학원 숙제는 하고서 자야지. 엄마가 간식 만들어 줄 테니까 어서 씻고 학원 숙제를 해라”는 이제는 하도 들어서 토씨 하나까지 외울 수 있는 말이 나왔다. 지훈이는 맥 빠진 소리로 “예” 하고 대답한 뒤 무거운 가방을 방구석애 던져 놓고 속옷을 챙겨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갔다. 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자 잠시 차가운 물이 나오다가 이내 뜨거운 물이 나왔고 뜨거운 물이 나오는 샤워기 아래로 들어가자 아까 생각한 “삶은 고해다”라는 말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온몸에 행복감이 번지기 시작했다. 하지먼 학원 숙제. 그것도 무슨 뜻인자도 제대로 모르고서 해야 하는 학원 숙제를 늦은 새벽녘까지 해야 하고 내일도 모레도 마찬가지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삶은 고해가 맞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고 지훈이는 변덕스러운 저기 맘 때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마음속에 이상야릇하게 번지는 슬픔을 느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