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신화 속 심리학 (2) 오이디푸스 신화
어릴 적에 경험할 수 있는 불안 중에 "분리 불안"이 있습니다. 이 분리 불안은 자신의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과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느낌인데 주로 자기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에 대한 불안입니다. 이때 불안을 느끼는 이유는 선천적인 성질의 것으로서 아직 여러 면에서 미숙한 자신을 보호해 주는 사람에게서 분리되면 당장 세상과 맞부딪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릴 적의 분리 불안 말고도 성인의 경우 위험한 상황에 처하거나 몹시 곤란하거나 기 막힌 상황과 마주쳤을 때 누군가 나를 좀 도와주고 지켜주고 지지해줬으면 하는 바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성인이 되어서도 지나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의 사랑과 관심에 연연하면서 그들로부터 버림받을까 봐 전전긍긍하는 사람도 있는데 심리학 이론 중의 "일반화의 법칙"을 사용해서 그런 경우를 설명해 보자면 그 또는 그녀는 아릴 적에 가까운 사람, 특히 엄마로부터 자주 거부당하거나 외면당해서 "엄마가 나를 버렸다"라고 생각하게 되어서 시간이 흐르면서 가까운 사이가 된 사람들로부터도 엄마에게서처럼 버림 당할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자신에 대한 그들의 애정과 관심을 반복해서 확인하려 하고 이런 반복되는 시도는 가까운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해서 실제로 그런 그에게서 멀어져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이런 원치 않는 경험을 반복하게 되면 그의 머릿속에는 내가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하나의 우울한 도식(schema)으로 자리 잡고 그 도식은 악순환처럼 점점 더 강고해질 위험이 있습니다. 게다가 버림받은 이유가 "다 내가 부족해서, 또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라는 주관적인 믿음도 점점 더 강해지고 단단해져서 결국 헤어 나오지 못하는 미로 속을 헤매듯이 악순환에 빠져서 심각한 우울증에 걸릴ㅇ 수 있습니다.
자신의 어머니인 줄 모르고 엄마인 이오카스테와 결혼해 테바이를 통치하던 오이디푸스는 테바이에 역병이 돈 이유가 자신이 자신의 친부를 친부인 줄 모르고 살해한 것에 대한 벌임을 알게 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어머니인 이오카스테의 브로치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고서 왕좌에서 물러나 방랑의 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제 주관적인 해석일지는 몰라도 저는 이 이야기가 분리 불안과 관계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서 엄마의 도덕적 관념이나 은근한 윤리적 명령을 내면화했지만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신의 욕구에서 비롯된 사고와 감정의 생성과 변화라는, 때론 힘들고 곤란한 심리적 과정을 거치지 않은 내면화된 "타자의 윤리"는 제대로 납득될 수 없어서 자기 자신의 심리적 체계로 편입될 수 없기 때문에 가래를 뱉어내듯이 불쑥불쑥 내뱉고 싶은 심리적 거부감을 느낄 수 있는데 태생적인 독립에 대한 욕구에 바탕을 둔 엄마의 윤리적 명령과 도덕관념에 대한 의혹이 들고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설익었을지 몰라도 자신의 다른 의견이나 주장을 내세우고 싶어지면 엄마의 마음을 불편하고 속상하게 해서 그 결과 엄마가 자신에 대한 애정을 거둬들일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낄 수 있어서 자신이 가진 의혹을 엄마에게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한번 의식된 엄마의 윤리적 명령이나 도덕관념에 대한 의혹은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내면에서 점점 더 커져갈 뿐 아니라 엄마의 윤리적 체계를 이루는 내용들의 관계성을 파악하게 됨에 따라서 질적으로도 의혹은 확장되기도 합니다.
분리 불안은 육체적인 거리가 멀어지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 못지않게 엄마와의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 탓으로도 생길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엄마의 보호와 돌봄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서 육체적인 보호와 돌봄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심각하게 엄마의 심리적 돌봄과 보호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아이는 심한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때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독립에의 욕구인데 얼핏 엄마의 보호와 돌봄이 아이의 독립 욕구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지만 제 생각에는 두 요소가 건강한 긴장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립은, 특히 심리적 독립은 무모한 과신과는 성질이 달라서 때로는 서툴러서 아니면 미처 생각을 못해서 실수를 저지를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데 이 실수와 실패가 치명적이 되지 않게 하려면 자동차의 에어백처럼 안전한 지원과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연극으로 치면 주인공이 주로 조명을 받더라도 연극의 분위기가 제대로 느껴지려면 반드시 조연이 필요한 것처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엄마는 아이 옆에서 조연을 맡은 배우처럼 아이를 지원하고 도와야만 합니다. 물론 조연의 등장이 필요한 경우가 있듯이 아이에게 필요한 경우에 엄마가 자신의 역할을 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그런데 엄마가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사실상 감시하며 은밀하게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아이에게 강요해서 아이가 그를 따르더라도 아이의 내면에서 싹을 틔운 독립에의 욕구, 즉 한 개인으로 성장하고자 하는 욕구 때문에 아이는 비록 신체적으로는 안전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몰라도 심리적으로는 혼란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분명히 엄마의 지시와 명령에 대해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면서 뭔가 다른 것이 옳은 것 같은 느낌이 있지만 그 정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어서 머리와 마음속이 안개가 낀 듯한 모호함 때문에 말이지요. 그래서 오이디푸스가 결국 자기 엄마의 브로치, 제 눈에는 엄마에 대한 심리적 의존과 공생관계를 뜻할지도 모르는 브로치로 자신의 눈을 찌른 것은 더 이상 엄마의 윤리적 지시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자각을 의미하고 그 후 긴 방랑의 길에 접어든 것은 아직 여물지 못한 자신의 윤리 체계, 즉 도대체 어떻게 방향을 잡고 살아가야 할지 몰라서 헤매는, 사춘기 시절의 특징이기도 한 혼란스러음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설명을 돕기 위해서 잠깐 삼천포로 빠지자면 불가의 화두 같은 표현 중에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이 있는데 이 표현이 근사해 보이기도 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틀린 말도 아니지만 비단 어린아이가 아니어도 우리는 몹시 혼란스럽거나 두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누군가 말없이 옆에 있어 줬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저 누군가 내 옆에 있어서 좀 안심이 된다는 느낌을 받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를 엄마와 아이의 관계에 대입해 보면 아이가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할 때 서툴고 경험도 부족해서 실수하거나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래서 마음이 답답해지고 아이의 행복을 바라는 엄마는 자신이 나서서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고 싶어지기도 하지만 이 경우 자연이 인간에게 준 소중한 선물인 끈기와 삼감의 능력을 바탕으로 옆에서 잘 참아가며 실수도 하고 실패라는 경험도 하면서 느리게 성장해 가는 자신의 아이를 지켜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엄마의 행동은 아이로 하여금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때 아무 말 없이 옆에서 지지하고 지원하는 존재로 느껴지게 해서 안전에 대한 욕구와 독립에 대한 욕구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건강한 긴장관계를 맺도록 함으로써 앞으로의 삶에서 원치 않게 마주치게 되는 곤란한 문제나 어려움에 맞설 수 있는 정신적 심리적 힘을 점점 더 강해지게 할 것인데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늘 곁에서 지지하고 응원하는 존재가 내 옆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듯한 심리적 안정감과도 비슷할지 모릅니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부모, 특히 엄마의 윤리적 관념이 반드시 옳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문제는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그 윤리적 관념을 마음으로 수용하려면 설득이 빠져서는 안 되는데 설득은 다름 아닌 왜?라는 질문과 함께 어떻게?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의 기준을 아이에게 적용하고자 할 때 아이의 일반적인 인간적 측면과 함께 아이가 현재 처한 독특한 상황이나 처지, 그리고 아이의 선천적인 성향과 소질에 바탕을 둔 아이의 관심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아이가 엄마의 주장이나 견해를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아이의 현재 윤리적 판단이고 엄마와는 다른 윤리적 판단일 뿐이어서 존중받을만한 가치가 있다면 설사 답답하고 속이 상해도 타인으로서 아이를 존중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 현재 자신이 가진 윤리 체계가 이런저런 조건과 경험 때문에 때론 연거푸 폐기되거나 수정되었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아이가 가지고 있는 당장의 윤리적 판단이 옳아 보이지 않더라도 그건 당장의 가치판단일 뿐 삶을 살아가면서 아이도 이런저런 경험과 조건을 통해 자신의 윤리체계를 성숙시킬 가능성이 있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장하는 윤리체계는 개성을 가진, 누가 대체할 수 없는 개인으로 성장케 하는 동력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덧붙이자면 살수와 시행착오로 인해 본인의 마음의 빛깔이 어두워져서 낙담하고 좌절할 수도 있지만 그건 성장 또는 성숙의 과정에 포함될 수도 있을 텐데 다시 불가의 표현을 빌자면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지만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로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는 말처럼 거듭되는, 하지만 그때그때 때론 힘겹게 감당할만한 정도의 좌절과 실망 그리고 그에 따르는 고통을 견뎌낸다면 그 고통스러운 경험은 마주친 세상을 여러 각도로 보게 해서 장차 닥쳐올지도 모르는 두렵고 싫어서 피하고 싶기도 한 스크레스를 견딜 수 있게 하는 밑바탕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록 육체는 성인으로 성장했지만 어쩌다 보니 어른이 된 심리적 아이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마음속에 생기는 불안과 갑갑함과 속상함을 견뎌가면서 옆에서 필요한 경우에만 조심스레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내 배 아파 나은 자식"일지라도 나와 다른 엄연한 타자이자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자기 자녀를 대해야 한다는 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