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성월
성모성월, 나주 성모 이단자들의 이단적 회유 페이스북 메신저 받고
마음에 분심이 생겨 이렇게 글을 씁니다.
괜히 하느님의 어머니를 욕보이며 신심을 왜곡하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 저는 그 보속을 대신하고 싶습니다. 이 어지러운 시대, 어머니를 오해하는 이들을 대신해 고통을 봉헌하며, 그들의 회개를 위해 희생을 바치고자 합니다.
성모님의 전구와 발현은 그분 자신의 능력이 아닌, 온전히 하느님의 능력 안에서 이루어진 은총의 표징입니다. 성모님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으뜸이시며, 전적으로 순종하신 주님의 걸작입니다. 그 어떤 성인보다 깊이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신 분, 하느님께서 친히 빚으신 가장 정결한 도구이십니다.
루도비코 마리아 성인이 말한 ‘참된 성모 신심’을 품고, 성모님의 발현과 관련된 문헌들을 묵상하면, 우리는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순수한 대중 신심에 더욱 깊이 이르게 됩니다. 성모님의 발현에서 공통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하나입니다. 교회에 순종할 것, 예수 성심을 위로할 것, 세상의 죄를 대신하여 보속하고 희생할 것.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모님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겸손은, 놀랍게도 한 여인의 품에 안기어 아기로 나셨고, 가정이라는 가장 작고 일상적인 공간 안에서 그분의 천주성이 드러났습니다. 육신을 입으시고, 돌봄을 받으셨으며, 한 어머니의 손길 안에서 나고, 자라시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우리가 마굿간의 비천함과 피에타의 침묵 속 고통을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다면, 천주의 성모 마리아께서 겪으신 고통을 쓰신 하느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합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의 속량을 진심으로 믿는가? 성모님처럼 삼위일체와 깊고 의로운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가?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라고 말씀하신 순간, 교회는 어머니를 받았습니다. 그분은 단지 한 여인이 아니라, 교회의 전구자이자 우리 구원의 동반자이십니다. 우리의 해방은 이처럼 순종과 기도, 고통을 통과하여 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주님의 길을, 어머니는 묵묵히 걸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길 위에 우리도 초대받았습니다.
성모님은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는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신 분이십니다. 말씀 안에 머무르며 그분의 뜻을 품고, 매 순간 하느님의 현존에 순명하셨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단지 거룩한 여인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머문 지극히 조용한 거처요, 성령의 신비 안에서 새 계약의 궤가 되셨습니다.
그 중심에는 성모님의 결정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한마디는 구세주의 탄생을 향한 문을 여는 가장 순전한 믿음의 응답이며, 교회가 세상 속에서 걸어야 할 겸손과 신뢰의 길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성모님께 대한 신심이 때때로 진리에서 벗어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한국 교회가 이단으로 규정한 나주 성모 운동은 교회의 교도권과 공동체적 질서를 거스르는 행위로, 회심해야 마땅합니다. 성모님은 상경지례, 곧 ‘언제나 공경할 어머니’이시며, 예수님의 성심 앞으로 우리를 이끄는 다정하고도 분명한 중재자이십니다.
발현의 진실성은 언제나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교회와 일치된 순명의 삶 안에서 드러납니다. 성모님은 결코 법을 어기시지 않으며, 개인 계시가 공적 계시보다 앞설 수 없습니다. 교구와 보편 교회의 권위에 순명하지 않는 나주 성모 현상은, 참된 신심이 아닌 왜곡된 열정이며, 그릇된 길입니다. 진정한 성모 신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용기와 희망을 주는 길이어야 하며, 교회의 품 안에서 더욱 깊어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