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시 민물고기 전시관, 민물김 연구센터
누구나 반복되는 꿈이 있다. 스토리라인도 일치하고 등장하는 인물이나 배경도 뻔할뿐더러 결말은 항상 흐지부지한. 각자의 직업적 스트레스, 트라우마로 남은 과거의 사건, 그리고 극상의 행복을 경험했던 순간들이 나름의 중층구조를 이루며 일정한 간격을 두고 램 수면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곤 하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쯤은 종이에 적어 정리해보고 싶었는데 잘됐다. 이런 꿈들이다.
⊙학력고사(수능이 아니라고 놀리지 말 것) 수학과목의 시험을 치른다
⊙뉴스 시작 5분 전인데 원고가 없다 / 스튜디오를 도무지 찾을 수 없다
⊙화장실 욕조 안에 바닷고기와 민물고기를 합사해 기르고 있다
대입 학력고사 수학 과목은 왜 하필 내가 학력고사를 치른 해에 극상의 난이도를 기록했단 말인가. 준킬러 정도만 됐어도 별다른 아쉬움이 없었을 텐데. 이 꿈은 학업에 정진하지 못했던 자의 어설픈 변명과 우리나라 교육계의 서열식 입시제도에 반반의 책임이 있다고 본다.
뉴스 전 원고의 부재와 공간의 변형은 전 세계 모든 앵커와 아나운서들의 공통된 악몽이다. 틀림없다. 이 대목을 읽는 아나운서들의 공감 가득한 박수 소리가 들린다. 뉴스가 펑크 나는 꿈을 꾸지 않는다면 아나운서 협회에서 탈퇴해야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물고기 꿈. 세 가지 단골로 찾아오는 꿈 중 가장 개인적인 영상이다. 어김없이 평범한 아파트 화장실 욕조가 등장하고 그 안엔 온갖 물고기들로 풍성하다. 얼마 되지 않는 부피 속 자잘한 녀석들이 물이 담긴 PVC재질의 낯선 용기를 탓하지 않으며 평화롭게 유영하고 있다.
앞의 두 꿈은 꾸고 나서도 뭘 어쩔 수 없는 무가치한 것이지만 마지막 꿈은 현실에서 구현 가능한 것이었고, 더 이상 물고기들을 욕조에 가두어놓지 않아도 되는 개선의 여지가 있었다. 작은 세상의 창조주가 되고자 하는 오타쿠 기질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 같고, 그 세상은 수중세계였어야 했다. 삐약거리던 꼬마가 비닐에 담아왔던 빨간색 금붕어 한 마리는 40여 년이 지나 번듯한 수조 속의 생태계로 세계관을 확장했다.
제주도민이었던 시절, 꿈은 현실이 되었다. 그것도 하는 김에 초급자용을 월반한 가로 90센티미터 길이의 3자 수조. 물생활하다 보면 어차피 큰 수조로 계속 업데이트하기 마련이라는 글을 줄기차게 봐 온 탓에 아예 시작부터 질러버리자 식이었던 거다. 열정은 방법을 만들어내는 법. 열대어 기르기 유튜브의 구독자가 돼 적지 않은 준비기간을 가진 결과, 커다란 시행착오 없이 수생생물군을 3자 민물 수조 안에 안착시킬 수 있었다. 나름의 조형미를 구현할 돌을 구하러 애월의 동네를 쏘아다니는 일은 얼마나 기꺼웠던지.
물고기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잡이'란 과정을 거쳐야 한다. 다만 세세한 화학기호와 작용원리까지는 사절이다. 특정 박테리아들은 어류의 생존에 필수 요소인데 막 받은 물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수초를 먼저 심고 여과기를 돌려 초기 환경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 한 달여 뒤, 강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물잡이용 어종 - '제브라다니오'가 강력하다 - 을 투입해 녀석들의 배설물을 여과사이클의 매개로 활용한다. 며칠이 지나면 수조 속의 화학물질 변화로 대망의 박테리아들이 창궐하게 된다. 그러니까 물고기의 똥이 유용한 미생물을 창조하며 자신의 생존을 돕는 셈이다.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유익한 미생물은 사람의 소화를 돕기 마련이고, '적당한 양을 섭취했을 때 건강에 도움을 주는 장내 미생물'로 정의되는 프로바이오틱스는 또한 건강식품의 이름이기도 하다. 한편 항생제 남용은 건강에 필수적인 우리 몸속 미생물의 균형을 파괴해 각종 호르몬 질환을 일으키는데, 유익한 미생물 보충에 제공되는 것이 대변, 즉 똥이다. 똥에는 미생물이 득시글거리니까. 실제로 건강한 사람의 똥을 캡슐에 넣어 장내 미생물 균형이 빈약한 환자들에게 투여하는 것이 엄연한 의료현장의 처방이라고 한다. (그렇다. 반드시 캡슐에 넣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최고의 프로바이오틱스는 똥이다. 생존의 지름길은 똥이고 똥 처방의 미래는 밝다. 똥을 무시하지 말자.
아무튼 한 달이 넘는 과정을 거친 여기까지가 기본 물잡이. 꽤나 진득한 참을성이 필요하다. 화려한 물고기 떼가 어른거려 죽겠는데 한 달이라니. 어릴 적 내 금붕어가 그렇게도 빨리 세상을 떴던 까닭이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수도꼭지에서 바로 나온 깨끗한 물을 좋아하겠지, 그래도 염소가 날아가도록 하루는 수돗물을 대야에 받아놓아야겠어. 먼지도 들어가지 않도록 신문지로 덮어놓을 거야. 깨끗한 물에는 고기가 모이지 않는다는 건 진실이었고, 꼬마의 선의는 곧 살생의 수단이 되었다. 오호통재라!
고래상어와 청상아리의 웅장한 흐느적거림은 장관이나, 야생에서 멀리 떨어진 메트로폴리스의 한복판에서 군무를 감상한다는 건 부자연스럽다. 계곡에 사는 녀석들을 만나러 삼척시 근덕면 소한계곡으로 간다. 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아쿠아리움도 아니다. 민물고기 '전시관'이라고 정직하게 쓰인 이정표가 소박하다.
반짝이는 명소다. 산허리 쪽에 민물고기 생태학습관도 갖추고 있어 아이를 동반한 가족여행에도 안성맞춤인데 심지어 관람이 무료다. 수산자원센터의 부속시설이니까 응당 그래야지 싶다가도, 이 정도 구색을 갖춘 전시관이라면 소액의 입장료를 받아도 불만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가장 통쾌한 것은 산과 계곡의 조화 속에 자리 잡은 전시관의 위치. 삼척의 순진한 하늘을 올려다보니 아쿠아리움이 들어선 대형 쇼핑몰의 지하층은 상상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어차피 가두어진 생명들이지만 이곳의 물고기들이 더 자유로워보이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이다. 도심의 아쿠아리움은 대형 감옥, 삼척 민물고기 전시관은 작은 연수원이라고 한다면 과도한 도시혐오증 환자의 망발일까. 7번 국도를 따라 장쾌한 대양을 바라보다가 청정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짜릿함은 디폴트값이다. 편애는 그래서 돋아날 수밖에 없다. 얼마든지 선입견을 가져도 좋겠다.
지역의 계곡이나 하천에서 자생하는 생물군은 물론이고 멀리 아마존 수역의 어종까지 건강하게 물속을 날고 있다. 정도를 넘어선 수조의 투명함은 오히려 비현실적이다. 생존에 필수적인 박테리아들마저 존재하지 않는 듯 맑디맑은 물의 정체는 강원도의 1급수 계곡물인 것인가. 공기만큼 투명한 물 속이므로 녀석들은 날아가고 있는 것이 자명하다. 중력에 발이 묶여 걷고 걸어야 할 존재는 그들을 바라보고, 저항 없이 날아다니는 그들은 두 발을 딛고 있는 가련한 존재를 탐색한다.
밀집도에 비해 여유 있는 수조의 공간이 가두어놓은 야생을 보아야 하는 죄책감을 상쇄한다. 좁다는 것은 얼마나 눈물 나는 일인가. 단칸방에 구겨 살던 가족들의 따스함은 더할 나위 없으나 증발해 버린 각자의 공간은 각자의 마음속에서 닳고 해어져 상처가 된다. 대궐 같은 광막함도 삶에 이로울 게 없지만 한 몸 오롯이 운신할 공간만큼은 어떤 생명에게나 주어져야 할 생의 조건이다. 신이 인간을 가두어놓고 전시하는 거라면 부디 최소한의 공간은 확보해 주기를.
위풍당당 국내 유일의 민물김을 배양하고 있는 민물김 연구센터는 민물고기 전시관에서 소한천 상류 쪽으로 460미터 지점, 걸어서 불과 7분 거리에 있다. 그러니까 낙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이 계곡길을 따라가면 삼척 민물 수산업의 헤드쿼터를 빠짐없이 만날 수 있는 것이다. 민물고기야 그렇다 치는데 민물'김'이라니. 세계 8대 불가사의 감이다. 민물이니 짠물이니 가릴 것 없이 김은 무조건 바다 아니었나. 벼르고 별렀던 질문들을 쏟아내고야 말겠다. 적극적인 자세와 공격적인 태도 중간쯤의 마음가짐으로 센터의 벨을 누른다.
우리나라 민물김은 김동삼 박사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내 조류(藻類) 연구의 최고봉을 알현하다니. 존경심으로 공격적인 태도는 녹아내렸다. 의례적인 인사말이 잠시 오갈 것으로 생각했는데 첫마디에 날 알아보겠다고 하신다. 강원도로 돌아오기 전 제주해양수산연구원에서 수년간 근무했는데 그때 TV에서 자주 봐 익숙해졌다고. 19년 데일리뉴스의 위력인가. 타지에서 이 얼굴 보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강릉방송국에서는 다행스럽게도 라디오 방송만 하고 있으니 얼굴 테러는 이제 끝났습니다. 안심하세요.
연구소에서 배양되어 자라난 민물김
센터가 위치한 소한계곡에서 생산되는 김은 지역사람들에겐 놀라운 존재가 아니었다. 채취하는 양이 적었어도 사는 사람 역시 많지 않았던 삼척의 시골마을에서는 미역 대신 산후조리용으로 소비되었을 정도니까. 사실 바닷김은 홍조류지만 민물김은 녹조류, 그것도 민물파래과다. 즉 김보다는 파래에 가까운 생명체인 것. 그러나 김발에 붙어있는 민물김을 조각내 맛보면 여지없는 김의 풍미다. 바닷김보다 깊되 슴슴하다고 느껴지는 건 조리김에 익숙해진 입맛 탓일까. 좋다. 바다에 상어가 있고 강에 철갑상어가 있듯이, 바다에 가재와 게가 사는 것처럼 강과 호수에 민물가재와 민물 게가 있듯이 김도 그러지 말란 법이 없다. 그러나 왜 하필 삼척인가. 우리 고장에서만 민물김이 난다고 자랑하는 건 지나친 섣부름이 아닌가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민물김 나는 곳이 여기뿐이라는데, 확실한가요?"
답이 전광석화다.
"네."
북한을 제외하곤 민물김이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된 곳이 삼척과 영월이었는데 영월의 민물김은 물길이 바뀌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 우리나라에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생지는 삼척 소한계곡이다. 답이 전광석화일 수밖에 없는 이유. 그런데 왜 그리 까다로울까. 민물김은 수온이 12도에서 14도 사이가 연중 유지되는 빠른 유속의 계곡물에서만 자생한다. 특정한 시기가 아닌 '연중' 일정한 수온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지하에서 용출되어 하류로 내달리는 초속 1.2미터의 빠른 유속 때문이다. 덥혀지지 않고 얼지도 않는 일정한 수온과 꾸준한 유속을 지니는 물의 흐름은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의 강산에서 찾아보기 힘든 환경이다. 소한계곡은 그래서 귀하다.
민물김이란 녀석은 참으로 까다롭구나 싶어도 일단 출현하기만 하면 질기디 질긴 생명력을 보인다고 한다. 가물어 유량이 줄어도 포자 상태로 바위에 달라붙어 생존을 유지하다가 다시 풍부한 물이 흘러들어오면 증식에 집중한다. 번식 방법 또한 설명을 들어도 낯설어 갸웃거리게 만든다. 일 년에 두 번 유성과 무성생식을 통해 번갈아 생장한다니. 이 독특한 번식법 탓에 지금은 제한적으로 양식을 하고 있으나 바닷김과 미역처럼 무성생식으로 종묘를 생산할 수 있게 된다면 대량생산도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그런 날이 곧 오지 않을까요?" 김동삼 박사는 되묻는다. 옅은 미소와 함께. 이건 확신에 찬 소리다. 믿어보자.
민물김이 자랄 수 있는 유속과 수온을 유지하며 펌프는 쉴 새 없이 계곡물을 순환시킨다. 기분이 좋은 것은 바로 순환되는 물이다. 소한계곡의 투명한 물은 버려지지 않고 돌고 돈다. 저 정도 맑은 물이면 손우물을 만들어 단숨에 들이켜고 싶다. 대야에 담아 뽀득뽀득 세수를 해야 한다. 계곡물 드링킹과 고인 물 세수의 마지막은 도대체 언제였던가. 고집스럽게 1급수의 꾸준한 공급을 바라고 있으니, 민물김의 본질은 청정이 아니면 이상할 지경이다.
청정의 집약체라도 한 장에 3만 원의 가치는 부담스럽다. 언제쯤 관광객들이 특산품으로 사 갈 수 있을 정도가 될까 묻는 말에 지금과 같은 연구 노력이라면 5년 내에 대량 생산이 가능할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럴 줄 알았다. 김박사의 자신에 찬 미소가 있지 않았던가. 쿠팡으로 전국 각지에 보낼 만큼은 아니더라도, 삼척에 오면 선물로 넉넉하게 구입할 수 있을 거라는 말. 저녁 밥상에 차려진 구운 민물김에 막 지은 밥을 올리고 양념간장을 쓰윽 바른다. 양 끝단을 매조지어 밥알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단속한 뒤 그대로 입 속으로 직행. 강원도의 계곡이 몸을 관통하는 느낌. 그 경험은 5년 후면 현실이 된다. 김박사님, 잘 부탁드립니다.
어릴 적 문방구 앞 좌판에서 사 온 탈색한 병아리와 동네 수족관에서 뜰채로 고르고 골라 비닐봉지에 담아 온 금붕어(빨간색도 검은색도 '금(金)'붕어다. 난 이것이 너무도 이상하다.), 시장에서 엄마를 졸라 사 온 국적불명의 거북이 새끼와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온 몇 마리의 크고 작은 강아지들. 우리가 이들을 굳이 키우려는 까닭은 뭘까. '말을 못 해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상호작용의 강도와 빈도는 제각각임이 분명하다. "아이구 우리 새끼 이뻐 죽겠어~." 죽고 못 사는 사랑고백에 대한 푸들의 반응과 금붕어의 대응은 극과 극이다. 그렇다 해서 작은 수조에서 유영하는 빨간 물고기가 무대응으로 일관한다고 우리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것 봐, 뻐끔뻐끔 뭐라고 말하는 듯하며 다가오잖아. 오래 길렀더니 제 주인을 알아보기는 하나 봐."
퇴근한 주인과 그의 턱을 연신 핥고 있는 푸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고차원적 애정행각을 벌이고 있는 중일 테니까. 고등 동물끼리의 화학적 상호작용에 언어는 개입될 여지가 없다 하더라도 번역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우리 귀요미, 아빠가 힘들어 보여서 위로해 주는 거야? 역시 착한 우리 강아지밖에 없어."
푸들이 아빠를 위로하고 있는 건지, 간식을 애타게 달라고 하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산책 나간 지 너무 한참 된 거 아니냐는 항의의 몸짓인지는 상관없다. 어떤 결말이든 사람의 말로 해석하는 주체는 사람이니까. 내가 힘들 때 반려동물의 몸짓은 위로면 되고, 들떠 있는 나에게 지금 그들의 행동은 애교면 되는 것이다. A.I. 가 개입해 진정한 동물의 언어를 발설한다면 인간은 반려동물을 버릴 개연성이 농후하다. 날 위로해주지 못하는 동물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사람은 동물의 의지를 스스로의 언어로 포착해 더불어 살아가는 중이다.
협소한 수조로 생태계의 크기를 사정없이 줄여놓아도, 열대어는 그들만의 수역에서 살랑거린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깊이 30센티미터의 수조에서도 수면 가까이에는 형형색색의 구피와 글래스피쉬가 놀고 있고, 중간 수심에서는 테트라류가 발광을 하며 정어리떼 못지않은 단체군무를 시전하고 있다. 흑사와 자갈이 깔린 바닥에는 코리도라스가 가라앉은 먹이를 정신없이 먹어치운다. 입을 벌리고 정신이 반쯤 나간 채로 수조 속 세상을 감상한다. 영화를 보는 듯하다. 나에게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좋다. 가끔은 주인이 원하는 반응을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것이다. 그게 한 차원 높게 더불어 사는 풍경이 아닐까.
폭염의 기세가 최고조에 달한 어느 여름, 휴가를 다녀와보니 열대어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명색이 열대어인데 정작 열대에 가까운 날씨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수면에 선풍기까지 장착하고 갔건만 변명일 뿐이겠지. 유선형의 생명체들이여, 목숨도 지키지 못한 천인공노할 주인을 용서하기를. 다음 세상에 날 반려동물로 부려도 할 말이 없으리라.
소한계곡은 흘러 초당저수지에 고인다. 겨울을 이겨내야 할 해는 막바지 힘을 다해 가시광선을 쏘고 있다. 물속의 생명체들도 아직은 수면의 따스함을 즐길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다. 겨울잠에 가까운 침잠을 위해 곧 호수 바닥의 벙커로 이동할 시기가 임박한 것이다. 무겁고 긴 겨울을 잘 이겨내야 할 텐데. 힘 있는 반동으로 탄력 있는 몸통을 퍼드덕거릴 봄이 어서 오기를, 아직 오지도 않은 겨울에 앞서 성마르게 월계(越季)를 바라고 있다.
양가적 이율배반의 감정.
누구나 아는 삼척이 아닌, 소한과 초당이 반짝이는 삼척을 많은 사람들이 만끽했으면. 고속철도 연결된다니 곧 그렇게 되겠지.
아니야. 그러다가 계곡 생태계가 파괴될 수도 있어. 그럼 민물김은 어떡하라고.
난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