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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나의 기부일지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하세가와 요시후미)

by 초연이

어느 날 우편이 도착했습니다. 우편함을 들여다볼 일이 잘 없던 요즘, 두둑한 우편이 반가웠습니다. 아주 아주 소액의 기부금을 내고 있던 단체에서 보낸 선물이었습니다. 선물의 내용이 무엇이었든, 내가 받을 자격이 있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단돈 천 원이라도 후원하는 물리적 행위 자체로 자격이 부여된다면 충분하겠지요. 하지만 받아 든 우편물이 제 손에 실어주던 무게는 마음을 무겁게도 했습니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가볍게 시작했던 그림책 한 권으로 마음 한편이 먹먹하던 나날들. 호기심을 '단순하게' 품어서, 그리고 '호기심'이라는 얄팍한 궁금증을 가져서 참 미안했어요. '미안'이라는 말로 사과가 될지, 이 상황에서 사과를 하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어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안절부절못했던 이 마음조차 사치일까 싶어, 실속 없는 행위이지 싶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세가와 요시후미의 '내가 라면을 먹을 때'라는 그림책입니다. 다시금 이 책의 표지를 볼 때마다 그저 고개가 숙여집니다. 일본 작가가 그려낸 일본 아이의 라면 먹는 이야기는 어떤 서사를 가지게 될까, 그게 전부였어요. 아직 어려서 라면을 먹어본 적 없는 제 아이에게, '라면 먹는 오빠'의 재미난 이야기를 읽어보자며 호기롭게 펼쳤던 기억이 납니다.



라면을 먹고, TV를 보고, 바이올린 레슨을 받는, 제 시선에서의 평범한 일상이 보였어요. 동시간대에 '평범한' 아이들의 평온하게 보내는 '평범한' 하루들이 한 장씩,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마주한 이 페이지에서, 잠시 마음에 돌이 쿵 내려앉는 듯했습니다. 이 마음의 돌이 과장된 해석이었길 바라며, 동생으로 추정되는 아기를 돌보는 한 여자아이의 작은 어깨를 한참 들여다보려다, 얼른 페이지를 넘겼습니다.



조금씩 그 돌이 무겁게 주저앉았습니다. 펌프질로 물을 긷고, 빵을 파는 여자아이. 아이의 표정이 제 마음처럼 굳어져갔습니다. 여리디 여린 아이들의 팔에 전해졌을 펌프와 빵수레의 무게가 저의 온몸이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동시간대에 제 품 안에서 책을 읽는 저의 아이들이 누리는 삶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상들이 알삽하게 그려졌습니다.



쿵. 그냥 멈췄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 말도, 아무 마음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 마음과도 같았던 페이지가 네 쪽에 걸쳐 펼쳐졌습니다. '바람이 분다'라는 문장 외에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로, 적막하고 고독했습니다. 바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고, 네 쪽을 지나는 동안 비통한 마음을 달랠 수 있어 어찌 보면 참 다행이다 싶었어요.



참으로 적막하고 고독했던 그 하늘을, 한 고양이가 창문 너머로 바라봅니다. 고양이나 저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상황을 뒤로 당장 되돌릴 수도, 앞으로 당장 낫게 할 수도 없는 무력감이 에워쌌습니다. 그렇게 휑, 하고 쓸모없는 바람소리만 들리는 듯, 책이 끝났습니다.






우편물이 반가웠고, '선물'이라는 말은 설레는 단어인데, 봉투 표지의 문구를 본 순간 그저 부끄러웠습니다. 반가웠던 마음, '선물'에 잠시 설렜던 마음이 한없이 작아지던 순간. 조금의 관심으로 시작한 기부였지만, 월급에서 매달 자동이체가 되어 나가고, 연말이면 기부금 영수증을 받아 연말정산에서 혜택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무미건조한 소액의 후원자가 받는 특별한 선물은 양심의 가책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머나먼 땅, 에티오피아에 사는 한 아이와 결연이 되어 있었지만, 어떤 사정으로 다른 아이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리고 몇 달이 지나고, 우연히 기부단체의 전화를 받았을 때, 저는 바뀐 다른 아이의 이름은커녕, 바뀌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자동이체에만 의지했던 제 마음과 행동들이 떠올랐어요. 이 책을 읽으며 얼마나 하찮고 부끄럽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무심함이 진행되는 이 동시간대에, 지구 반대편에서는, 또 어떤 아이들이 힘겹게 이 생을 살아가고 있을지, 마음이 소리 없이 와르르 무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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