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굽이 뻗은 골짜기, 신선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다
[등구사 삼층석탑. 삼층석탑 정면 하봉에서 오른쪽으로 중봉,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과 산자락이 가깝게 보이나, 운무에 가려 왼쪽 하봉의 모습만 희미하게 보인다. 사진 오른쪽 중앙에 있는 봉우리는 함양군 마천면의 창암산이다. ]
1489년(성종20) 4월 14일(음력), 탁영 김일손(1464~1498)은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14박 15일에 걸친 지리산 유람 대장정에 나섰다. 몇 년 동안 그가 마음에 두고 있던 이 유람에는 함양 출신의 도학자인 일두 정여창(1450~1504)도 동행하였다.
“14일(임인일). 드디어 천령(함양)의 남쪽 성곽 문에서 출발하였다. 서쪽으로 10리 쯤 가서 시내 하나를 건너 객사에 이르렀는데, 제한蹄閑이라고 하였다. 제한에서 서남쪽으로 가서 산등성이를 10리 쯤 오르내렸다. 양쪽으로 산이 마주하고 있고 그 가운데 한줄기 샘이 흐르는 곳이 있었는데, 점점 들어갈수록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몇 리를 가서 한 고개를 올랐다. 하인(從者)이 말하기를,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누구에게 절을 하느냐고 묻자 그가 답하기를, ‘천왕天王입니다.’라고 하였다. (중략) 이 날 비가 퍼붓듯이 내렸고 안개가 온 산을 휘감고 있었다. 말에 몸을 맡겨(信馬) 등구사에 이르렀다. 솟아 오른 산의 형상이 거북과 같은데, 절이 그 등에 올라앉아 있는 것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중략) 절집 위 동서쪽으로 두 건물이 있었다. 일행은 모두 동쪽 건물에 묵기로 하고 하인들을 가려서 돌려보냈다.”
위의 글은 탁영의 「두류기행록」에 나오는 내용으로, 함양 읍내를 출발하여 지리산 유람에 나서는 첫 장면이다. 여기서 ‘제한’이라는 곳은 예전 함양-인월-남원을 잇는 대로大路(통영별로) 상에 있었던 역원驛院으로, 오늘날의 함양 구룡리 조동마을에 있었다. 현재 이곳에서 산자락으로 나있는 도로 ‘지리산 가는 길’을 따라 오르면 지안재를 지나고, 또 다시 한 차례 가파른 오르막이 끝나는 곳에 오도재가 있다. 이 고갯마루에서는 천왕봉을 중심으로 장쾌하게 펼쳐지는 지리산 주능선을 마주하게 된다. 위의 글에서 하인이 탁영에게 절을 하라고 한 것은 지리산 유람을 무사하게 잘 하게 해달라고 빌며 지리산 산신에게 예를 올리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리고 『신동국여지승람』 함양군 불우조에는 “등구사, 오도봉에 있다”라고 나오는데, 지금의 오도재-등구사로 이어지는 지명과 동선이 일치되는 것이 확인된다. 그런데 현재 오도재라는 고개 이름의 유래에 대해 대부분 ‘청매인오대사가 이 고개를 오고가며 깨우침을 얻어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 조금 거리가 있어 보인다. 청매대사는 17세기 초반 도솔암, 영원암 등 함양 마천면의 절집에 주석하였던 인물이고, 이 고개를 지나며 득도를 하였을지는 몰라도 오도재라는 이름은 훨씬 그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탁영이 머물게 되면서 15세기 후반 등구사에는 동서로 절집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함양 출신으로 탁영과 같은 점필재의 문인인 뇌계 유호인(1445~1494)은 지리산의 절집 곳곳에서 독서를 하였는데, 등구사에 대한 더욱 자세한 모습을 전하고 있다. 뇌계는 ‘등구사 탄이당坦夷堂에서 우연히 시 세 편을 얻다’라는 시에서 당시 등구사에는 금당, 옥실, 탄이당이라는 건물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절집의 내력을 전하고 있는 『등구사 사적』에는 ‘1708년 안국사가 화재로 불타버렸을 때,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시기에 불이 나 빈터로 남아 있던 등구사 절터에 새로 절집을 중창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렇듯 사적기에 비워져있는 조선전기 등구사의 모습이 15세기에 활동했던 두 지식인의 글에서 역사로 채워지고 있는 것이다.
“밤새도록 내린 비가 아침나절이 다하도록 그치질 않았다. 그런데 한 승려가 문득 ‘비가 개어 두류산이 보인다.’고 알려주었다. 우리 세 사람이 화들짝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고 내다보니, 푸른 세 봉우리가 문 앞에 우뚝 솟아 있었다. 흰 구름이 가로지른 듯이 감싸고 있어 검푸른 봉우리만 은은히 드러날 따름이었다. (중략) 이 날 밤에 다시 개어 달빛이 환하게 비추자 푸른 산의 모습이 전부 드러났다. 굽이굽이 뻗은 골짜기에는 선인仙人과 우객羽客이 와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는 듯하였다.”
[2021년 11월 30일 등구사 구한선원 앞 마당에서 바라본 지리산 주능선. 왼쪽 나란히 솟은 세 봉우리가 왼쪽부터 하동, 중봉, 천왕봉이고, 오른쪽으로 주능선이 이어진다.]
비 때문에 등구사에서 하루를 더 머물게 된 탁영이 둘째 날인 비 개인 보름날 밤에, 지리산 천왕봉, 중봉, 하봉 등의 봉우리와 산자락을 바라보며 남긴 글이다. 필자도 그 모습을 눈에 그리며 1월에만 두 차례 등구사를 찾았지만, 꽉 막힌 시계에 지리산은 겨우 눈짐작만 하고 와야만 했다. 언젠가 이곳에서 탁영처럼 가슴 설레며 지리산의 풍경을 맞이하게 될 날을 기대해본다.[2022.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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