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2010년 3월 17일, 로이시스템 주식회사
도대체 며칠 연속을 쉬지도 않고 근무하고 있는 건지 이제는 모르겠다. 2월부터 쭉 주말에도 사무실로 출근 중이다. 음… 이대로 쭈욱 가는 건가? 3월 31일까지? 하나님도 7일째에는 쉬셨다는데… 그래도 이제 감사 필드 배정받은 건 모두 끝나서 처음으로 월요일, 화요일, 오늘까지 사무실에서 밀린 일들을 하고 있다.
“기똥차 샘~~~”
모두 감사 나가고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사무실에서 심의구 이사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네.’하고 달려가니 심의구 이사님이 서류 가방에 짐을 싸며 말했다.
“니 감사 좀 갔다 와야겠다. 내랑.”
무슨 영문인지 몰랐지만 우선 짐부터 얼른 샀다. 나 이번 시즌 감사 필드 업무 다 끝난 거 아니었어? 조용히 밀린 일 하면서 휴가 계획이나 짜려고 했더니만… 다른 선생님들 다 4월 되면 휴가 간다기에 언제 내 차례가 올까 하며 첫 휴가에 대한 기대가 아주 만땅이었다.
심의구 이사님은 우리 사무실에서 채 10분도 되지 않은 곳에 있는 건물에 주차를 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이사님은 노트북 가방도 없다. 나만 일 하는 건가? 설마 나만 놓고 가는 건 아니겠지? 우리는 15층짜리 건물의 15층에서 내렸다. 테헤란 대로의 고층 건물의 창 밖으로 보이는 오후 풍경이 참으로 도시적이고 멋지다고 생각했다. 이런 멋진 분위기는 여름보다는 지금 겨울이 최고일 거라고 거의 확신하며 보안 상 닫혀 있는 유리문 앞에 섰다. 유리문 안 쪽으로 앉아 있던 여자 분이 우리를 보고 어떤 버튼을 눌렀는지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빅포회계법인에서 왔는데요.”
심의구 이사님이 말을 마치자 지척에 있었는지 중년의 여자가 우아한 차림으로 걸어 나왔다.
“회계사님, 오셨어요?”
이사님에게 건네는 인사가 구면인 모양이다. 회의실로 들어가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 나누니 그분이 이 회사의 대표이사다. 뭐 하는 회사지? 이 멋진 여성 대표님은 어떤 히스토리를 가지고 계실까? 또 호기심이 마구마구 샘솟았다.
“여직원과 함께 오셨네요?
“기동차 회계사입니다. 기동차 회계사가 아주 기똥찹니대이.”
심의구 이사님은 대표님에게 말하고 나서 나를 보며 말했다.
“오늘 오후면 끝날 기다.”
심의구 이사님은 나와 대표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진짜로 나만 놓고 갔다. 혼자 뭘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대다가 우아하고 차분하면서도 명랑하고 큰 목소리를 가진 대표님이 자료를 다 준비해 놨다며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가 직접 다 들고 들어오셨다. 그 사이 나는 정신을 차리고 재빠르게 노트북과 계산기 등을 셋팅했다. 나독립 선생님이 어싸인한 것처럼 오늘은 내가 나에게 모든 계정과목을 어싸인하고 ‘회계하셨으니 감사하자.’ 하고 속으로 외치면 되겠다 싶었다. ‘일단 해보자.’하는 용기가 생겼던 이유는 사장님의 부드러운 태도의 역할이 컸다. 상당히 협조적인 태도랄까. 다른 회계 직원이 아닌 대표님이 직접 감사 대응을 한다는 게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혹시 같은 여자라서 일까?
감사는 심의구 이사님의 말대로 정말 오후 한 나절이면 족했다. 2시에 시작한 감사가 6시가 다가오자 이미 어느 정도 다 훑은 상태가 되었다. 약 4시간 동안 회사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입증 감사절차를 끝내고 나니 회사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그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우선 이 회사의 업종은 임대업서비스이다. 많은 임대서비스 중에서도 부동산. 대표님이 주신 자료 맨 위에 놓여 있던 한 장 짜리 사업자등록증에 그렇게 쓰여 있었다. 말로만 듣던 사업자등록증을 시즌이 다 끝나가서야 드디어 보게 되었다. 기동차 출세했네. 여기에 오게 된 건 결국 잘 된 일이었다. 그런데 임대사업자가 회계감사를? 부동산 부자이신가? 아직 재무제표는 열어보지도 못하고 회사에 대한 궁금증으로 호기심이 폭발하기 직전에 전기 감사보고서의 주석[1] 1번을 보고 그제야 궁금증이 풀렸다. 법인 소재지는 아까도 얘기했듯이 테헤란로에 있는 15층짜리 건물의 15층. 그리고 부동산 임대업으로 운영 중인 부동산이 바로 이 건물. 이 건물 전체. 그러니까 이 회사가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고, 여기 이 대표님이 회사의 대표로 표기되어 있었다. 주주이기도 할까? 다른 회사에 나갔을 때 보니 상장사 빼고는 주석 1번 회사 소개 부분에 주주명부도 있었다. 맞네. 주주명부에 있네. 근데 최대주주는 아니다. 근데 최대주주가 대표님하고 성이 같다. 대표님 하고 성이 같아 보이는 주주가 둘 더 있다. 그러니까 박태자(최대주주), 박우아 (대표이사), 세라 팍, 태오 팍. 이렇게 넷. 일단 여기까지. 회사 소유에 관련하여 더 듣지 않아도 대충 가족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박태자가 박우아의 남편이거나 아버지이거나 오빠나 남동생일 것이고(아무래도 남자 이름 같아 보이니까), 세라 팍, 태오 팍은 박태자가 박우아의 아버지라면 박우아의 형제들일 것이고, 남편이라면 박우아의 자녀들일 것이고, 오빠나 남동생이라면 오빠나 남동생의 자녀들일 것이다. 더는 알 길이 없었다. 뭐,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소설책을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재무제표를 열어보니 외감 맞네. 자산총계가 150억 원이다. 순자산은 100억 원이고. 자산의 대부분이 투자자산으로 분류된 토지, 건물이 그냥 거의 150억 원이다. 다른 자산은 뭐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테헤란로의 고층빌딩은 얼마나 하나 했더니 150억이구나. 아니지 이건 장부가액이니까 역사적 원가일 테고 언제 취득했는지는 몰라도 그 당시 시가였겠지. 지금은 더 뛰었겠지. 주석을 이리저리 살펴봐도 재평가[2] 되었다는 얘기는 없으니까 저 금액이 취득원가 그대로겠네. 외감이긴 해도 임대업 한 업종만 있다 보니 재무제표가 참으로 심플하다. 계정과목이라고는 예금, 미수수익[3], 투자부동산, 임대보증금[4]과 선수임대료[5] 정도가 전부다. 손익계산서 쪽으로는 임대료 수입, 영업비용[6], 이자수익이 전부이고. 이 밖에 법인세 관련 계정과 퇴직급여 관련 계정이 재무제표 여기저기에서 눈에 띄는 정도이다. 그 흔한 차입금도 없고, 영업비용도 얼마 되지 않아 영업이익률[7]이 40%나 된다. 와우! 상당히 높다. 영업비용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게 여기 직원이 대표님 포함해서 3명뿐이다. 한 명은 아까 그 문을 열어줬던 직원으로 대표님 비서를 겸하고 있으며, 나머지 한 명은 건물 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남자 직원이었다. 이 셋 인건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건물 관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건물 관리비가 전부였다. 이렇게 회사에 대한 이해와 간단한 입증 감사 절차로 감사를 마치고 사무실로 복귀했다.
3월 31일부로 우리가 할 일은 다 끝난 듯했다. 외부 감사 대상 회사는 매년 전 사업연도 종료일로부터 4월 이내에 당해연도에 대한 외부감사인을 선임하여 전자공시시스템에 공시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심의구 이사님과 박직새 전무님은 감사 계약 수임으로 무척 바빠지셨다. 이제 딱히 마감에 쫓기는 급한 일이 없어 거의 비어 있는 사무실에서 달콤한 휴가를 꿈꾸며 짬짬이 감사 조서 철을 정리하고 있었다. 시즌이 끝난 후 앞자리에 앉아 있는 김장수 선생님은 평소처럼 별로 말은 없었지만 그나마 입을 여는 순간이면 Big Four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마도 곧 이직하지 않을까 하는 감이 온다.
다음 주부터 일주일 씩 다른 선생님들의 휴가 일정이 채워지고 있으니 나도 넷째 주 정도에는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들떠 있던 어느 날 사무실에서 마주친 심의구 이사님이 로이시스템과의 감사계약서 2부를 주시면서 로이시스템에 가져다주고 날인 받아 한 부는 다시 가져오라 했다. 다른 업체들은 박직새 전무님이나 심의구 이사님이 영업 차 방문하거나 미팅할 때 감사계약서를 주고받거나, 그마저도 시간이 허락하지 않거나 지금이 아니라도 나중에 따로 만나도 될 정도로 사이가 돈독한 경우에는 그냥 우편으로 주고받는다. 그러나 로이시스템의 경우 우리 사무실과 지척이기도 했지만 그 대표님이 특별히 나를 지목하여 감사계약 체결을 겸하여 점심 식사를 같이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감사 당일 저녁 대표님은 저녁 식사를 함께 하자고 제안했으나 나 혼자는 처음이라 어색할 것 같아서 거절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땐 좀 회식 없이 쉬고 싶었다. 그때 그 대표님이 했던 끝인사가 다음 감사 때도 꼭 나오라고 했던 말이 떠올라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테헤란로를 걸어서 로이시스템에 도착했고, 감사계약서를 서로 나누어 갖고 대표님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왔다. 대표님과 나는 근처 또 다른 고층 건물의 1층으로 들어갔고, 그곳엔 중국집의 이름인 듯한 간판이 내걸어져 있었다. 그러나 내부 인테리어는 양식을 품목으로 하는 고급 레스토랑의 분위기를 자아냈고, 우리에게 자리를 안내하고 메뉴판을 가져온 중년의 웨이터는 마치 고급 호텔 레스토랑의 웨이터 같았다. 중식 코스 요리를 먹는 동안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취미를 여쭤봤다. 골프나 아니면 등산 정도를 떠올리며.
“저는 골프 안 쳐요. 재미가 없더라구. 저는 말 타요. 근데 체력 약한 사람은 승마도 못하겠더라구요. 그래서 헬스해요. 허벅지 힘이 강해야 승마할 수 있어요. 허벅지 조이는 힘으로 타는 거예요. 몰랐죠?”
그제야 나이 예순이 넘었다는 대표님이 많아야 쉰 정도로밖에 안 보였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헬스와 승마로 다져진 몸매와 출근하는 사람의 복장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게 했다.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와 그리고 주변에서 봤던 보통 아주머니들과 분위기가 전혀 다른 중년 여성의 모습은 참으로 신선했다. 의외로 대표님과의 수다에 마음이 점점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변으로부터 흔히 들어왔던 ‘우린 모두 건물주가 되고 싶다’라는 로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나 대표님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참, 지루한 사업이에요. 젊은이들은 더 큰 꿈을 꿔야죠.”
이 참에 나는 최대주주에 대해서도 물었다.
“대표님, 그 주주명부에 있던 박태자라는 분은 어떤 분이세요?”
“아, 제 아버지세요. 옛날에 벤처 열풍 불었을 때 테헤란로의 황태자로 불리셨어요. 그때가 재미있었지. 어디 투자할 만한 데 없어요? 재미있는 데 있으면 알려줘 봐요.”
그렇게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대표님은 대학 때 미술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왔으나 화가로서 활동은 하지 않고 결혼 후 육아에 전념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기도 했고, 아버지의 연세가 많아지기도 하고 해서 그 건물과 임대 사업을 증여받으면서 경영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회계는 전혀 몰랐는데 회계 감사를 받으면서 하나씩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그런 사람과 가까이서 대화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다음 달에 있을 진로의 날 특강 PPT에 노대차 선생님이 얘기해 준 회계사의 장점 두 가지에 나와는 많이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점을 추가하고 싶어졌다.
[1] 재무제표에 대한 주석의 줄임말로서 재무제표에 대한 부가 설명을 말한다.
[2] 자산의 장부가액과 공정가액의 차이가 나는 경우 공정가액으로 자산을 다시 평가하여 재무제표에 표시하는 것을 말한다. 자산의 가치가 현저하게 떨어지는 경우에는 손상차손을 인식하도록 하고 있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재평가는 평가 증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평가 증은 기업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자산재평가법에 의해 국가에서 허용해 줄 때에만 가능하다.
[3]미수 임대료와 미수 이자가 포함된다.
[4] 임차인이 낸 보증금은 임대인에게는 임대보증금으로 부채 계정에 해당한다.
[5] 미리 받은 임대료 또한 부채 계정에 해당한다.
[6] 서비스업의 경우 매출과 매출원가 대신 영업수익과 영업비용으로 표시하기도 한다.
[7] 영업이익을 매출액으로 나눈 것으로 기업의 영업 활동에 대한 성과 지표 중 하나다.
마지막 화가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