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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찬란 Oct 05. 2015

신신리

작은 기억의 조각

  가을이다. 사실 나는 이상하게도 중복만 지나면, 지나가던 잠자리의 꽁다리만 보면, 날씨가 아무리 덥고 햇볕이 아스팔트를 녹여도 도무지 덥지가 않았다. 또 마음에 코스모스들이 날개를 피기도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가을이 왔다. 계절을 심하게 타는 나로서는 계절의 변화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과 같이 마음의 줄타기를 하고 싶지 않은 시점에는 더욱 그랬다. 특히 계절의 왕인 가을과 봄에는 1달 전부터 그 찬란한 계절을 보낼 걱정에 몸살을 앓았다. 그렇다고 해도 가을이 다가왔다.


  가을의 입구에 있는 추석이 지나갔다. 오늘 아침,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시장의 입구에는 할머니들이 봉지 봉지마다 얼갈이 무나 단감, 더덕과 같은 것들을 놓고 팔고 있었다. 항상 내가 가곤 했던 12시 이후에는 없던 풍경이었다. 그 시간에는 보통 시장의 시간이라 그런지 그냥 121번 채소 아주머니, 29번 견과류 파는 아저씨, 45번 정육점인데, 이 아침에는 나날이 바뀌는 할머니들의 시장이었다. 차창으로 잠깐 지나가는 할머니들의 보따리는 크고도 개수도 많았다.


  오랫동안 할머니라는 존재를 잊고 살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신지 오래기도 했고 할머니 생각만 하면 그냥 눈물이 나서 생각을 잘 안하고 살았다. 우리 할머니는 계속 울었다. 만날 때도 오느라 수고했다면서 울었고 밥 먹다가도 울고 기도하다가도 울었다. 예전에 고생한 얘기하면서도 울었고 먼저 간 외삼촌 얘기를 하면서도 울었다. 아, 물론 가장 할머니가 많이 울 때는 우리가 집에 올 때였다. 할머니가 울면 엄마는 보통 할머니에게 툭툭 엄마 왜 울어하고 말았지만, 꼭 마을 입구를 돌면 엄마도 울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생각하면 할머니가 수도꼭지처럼 울었다는 것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신신리. 외갓집이 있던 마을이었다. 신신리에 가는 길은 멀고도 어두웠다. 아마 명절날에 엄마의 애가 타도록 꼭 늦게까지 아빠를 붙잡던 할머니와 또 고스톱을 치던 아빠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어쨌든 신신리를 가는 길은 20년에 가까운 지금도 기억이 난다. 차를 타고 뒷자리에 앉아서 손에는 엄마가 추석 선물로 사준 똘똘이 인형의 머리를 만지며 창밖을 쳐다보곤 했다. 신신리로 가는 길에는 조그만 불빛들이 많았다. 작고 빨갛게 반짝 거리는 빛들이 많아지면 신신리가 다가온 것이었다. 지금은 신신리에 크고 좋은 도로가 생겼지만, 예전에는 울퉁불퉁한 돌길이었다. 그 돌길을 지날 때면 이상하게 오줌이 마려웠다. 그래서 꼭 중간에 차를 세우고 가족들이 일렬로 앉아 볼 일을 봤다.


  외갓집 입구에 도착하면 시골 동네의 밤이라 깜깜했다. 마을 입구에 바로 있던 집. 할머니집의 불은 늘 안방에만 켜져 있고 티브이 소리가 크게 났다. 그 집 앞에 아빠가 차를 세우면 엄마가 차에서 내려 철 대문을 쾅쾅 치면서 “엄마”, “아빠”를 불렀다. 그러면 한참 후에 거실 불이 켜지고 할머니가 천천히 나타나 문을 열어주고는 했다. 할머니는 밤에 잠도 없었다. 이부자리를 펴고 잘 준비를 하면 할머니가 슬그머니 요강을 방으로 들고 오셨다. 그러면 엄마랑 할머니는 무슨 이야기인지를 밤새도록 했다. 오래전이라 기억이 전혀 나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배경삼아 거실에 있었던 무섭도록 거대한 회중시계의 뎅뎅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숫자를 세면서 잠에 들었다.


  아침이면 정말로 커어어어어어어다란 밥상에 2층으로 켜켜이, 그야말로 켜켜이 쌓인 밥상을 할머니가 차리셨다. 외삼촌들에 비해 식욕이 왕성해 밥을 3그릇, 4그릇씩 먹고는 했던 아빠를 위해 할머니는 따로 전기밥솥을 아예 할머니 자리 옆에 두었다. 반찬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갓 무친 겉절이, 젓갈이 많이 들어갔으면서도 시원한 묵은 배추김치, 나박김치, 무생채, 파김치, 고들빼기김치, 양파대로 무친 김치, 총각김치, 무나물을 비롯한 이름을 모르는 나물들(이 나물들은 된장, 고추장, 참기름, 들깨 등 다양한 방식에 의해 무쳐 있었다.) 약간 매운 된장찌개, 또 기름이 반지르르한 잡채, 외갓집 특유의 방식으로 만들어진 파와 김치, 고기를 꼬치에 끼운 꼬쟁이, 황석어 젓갈 무침, 갈치창 젓갈 무침에 기본 장류, 그리고 들깨를 가득 넣은 지금까지도 비법을 모르는 우거짓국까지 상을 꽉 채우다 못해 상 밑에서 준비를 하고 있는 반찬들도 있었다.


  이런 밥상을 놓고 우리는 절대 한 번에 먹을 수가 없었다. 교회 장로님인 할아버지는 절대 기도를 단 시간에 끝내는 법이 없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면 일단 오늘 먹는 밥에 대해 감사하고, 우리 가족 하나하나의 근황 토크, 그리고 큰 외삼촌부터 막내이모까지 7남매의 안녕과 큰 사촌 오빠부터 그때는 태어나지도 않았던 동생들까지 15명이 넘는 자손을 보혈로 덮어주십사하는 기도를 하고 나서야 ‘아마’ 끝났다. 기도를 하는 시간은 지금 생각하면 5분 남짓이었던 것 같은데 어린 나에게는 너무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맛있고 따끈한 음식이 향기를 폴폴 풍기며 유혹하는 데 이에 젓가락도 가져다대지 않는 건 정말 음식에 대한 부끄러움이 들 정도였다.


 사실, 아마 내 근황토크 시간이 지나면 할아버지 몰래 슬며시 눈을 뜬다.

 그러면 할아버지와 너무도 성실한 아빠만 눈을 감고 있다.

 아멘.

 할머니, 엄마와 동생은 이미 눈을 뜬 지 오래인데,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익숙한 손길로 할아버지 몰래, 반찬을 하나 집어먹고 입을 씰룩인다.

 아멘.

 할머니는 웃기지만 차마 웃을 수 없는 얼굴로 엄마를 탁 친다(아주 작게).

 모두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눈을 마주친다. 쿡. 그리고 잠깐

 아멘.

 아빠는 눈을 너무 뜨고 싶지만 경건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다.

 옆에서 동생은 엄마를 쿡 찌르고 입을 벌린다.

 아멘.

 엄마는 다시 할아버지 몰래 할아버지로부터 가까운 반찬을 쓱 집어 동생의 입에 넣어준다. 그리고 또

 아멘.

 할머니는 엄마를 툭 친다.

 어느새 할아버지의 기도가 막바지로 다가가고 있고 우리의 입은 입 안의 음식물을 기도가 끝나기 전까지 씹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빠르게 움직인다.

 할아버지가 아멘을 하기 직전에 우리는 모두 눈을 감고 경건한 마음으로 모두 대답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아침밥을 먹고 할머니는 할머니의 텃밭에 갔다. 텃밭을 가려면 어두운 창고를 지나 좁고 작은 쪽문을 열고 나가야 했다. 허리를 늘 반쯤 접고 걸었던 할머니와 키가 큰 아빠는 그 텃밭에서 한참을 이야기하곤 했다. 할머니와 아빠는 둘이 사이가 좋았다. 죽이 잘 맞았다는 편이 맞나. 가정적인 편이 아니었던 친할머니와는 다른, 외할머니를 아빠는 유난히 좋아했다. 그리고 다정한 편이 아닌 외삼촌들과 다른, 아빠를 외할머니도 유난히 좋아했다.(물론 내 생각에는 아빠가 밥을 4그릇씩 먹었던 것도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텃밭에서 무슨 이야기인지를 한참 웃고 배꼽을 잡는다 하고는 또 시장에 가서 한참을 있다가 오곤 했다. 시장에 다녀오면 아빠는 양 손 가득 까만 봉지를 들고 할머니와 나타났다.


  점심을 먹고 상을 치우면 외할머니는 무진장 바빴다. 엄마를 앉혀놓고 반찬통과 항아리를 번쩍번쩍 들고 옮기며 냉동실과 냉장실을 비웠다. 당시 작았던 아빠의 빨간 깍두기 차에 트렁크부터 뒷자리의 발판 놓는 곳까지 차곡차곡 테트리스 하듯이 쌓았다. 아빠가 좋아하는 김치들과 할머니의 된장, 고추장은 항아리 채로 싣고 내가 좋아하는 떡을 집에서 해먹을 수 있도록 반죽으로 꽝꽝 얼린 것, 그리고 외갓집에 갔을 때만 먹을 수 있었던 써니텐 포도맛도 넣었다. 엄마는 가만히 있다가 꼭 깐 마늘을 챙길 때 할머니한테 화를 냈다.


  차가 푹 꺼질 정도로 짐을 실으면 우리가 차에 타는 것도 고역이었다. 일단 동생이 아빠 뒤로 탔다. 발을 넣을 공간이 없었으므로 당연히 신발은 벗고 탔다. 그리고 내가 타면 할머니는 언니니까 잘 들고 가야해. 라며 또 무엇인가 검은 봉지를 안겨줬다. 그럼 또 그 봉지를 안고 아빠다리를 한 채로 차에 올라탔다. 엄마의 철학은 ‘이별은 짧게’ 였는 데, 외갓집에서 나올 때 그 철학은 반짝 빛을 발했다. 외할머니는 사실 짐을 쌀 때부터 울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마 우리를 차에 태우면서도 계속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차에 타면 할머니는 집의 마루에 앉아서 울었다. 어여가라. 할아버지 말이 떨어지면 우리는 손을 흔들며 신신리의 높은 지붕 집을 떠났다. 신신리의 마을 입구를 돌면 그때부터는 엄마가 할머니의 바통을 터치하고 울었다.


얼마 전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산소에 갔다가 신신리에 갔다. 할머니의 높은 지붕 집은 산뜻한 빨간 색으로 지붕도 다시 올리고 대문도 다 바뀌었는데, 할머니의 텃밭과 텃밭으로 가는 쪽문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들어가지 못하는 그, 집 앞에서 할머니의 텃밭을 담 너머로 넘겨보며 엉엉 한참을 울었고 나는 엄마에게 툭툭 엄마 왜 울어라고 말했다.




정찬란 남김

좋은 사진을 찍는 재주가 없어(일명, 똥손) 사진을 찾았습니다. 만

이 글에 더할 사진을 찾을 수가 없어 사진을 덧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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