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수기 -1
시간이 흘러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뒤에야 본격적으로 집을 나와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다.
동기들 중 글에 재주 있던 녀석들은 이미 일찍 등단했고,
글로는 먹고살 수 없다며 기술을 배운 자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저런 여자를 만나 남들보다 조금 일찍 결혼했다.
다니던 직장은, 누군가와 함께 일하는 게 맞지 않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다.
사랑으로 결혼했느냐고 묻는다면—글쎄, 라고 답하겠다.
단지 글에 쓸 ‘소재’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자연스레 결혼까지 흘러갔고, 어느새 아이는 셋이나 되었다.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조차도, 성욕만큼은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참으로 역겨운 인간이었다.
아무튼 흔히들 말하는 ‘사랑’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내가 만든 이 가정에서도 끊임없이 ‘자유’를 꿈꾸었다.
아이 셋이 있는 집엔 늘 생활비가 부족했고,
밀려드는 고지서들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그러나 아내는 내게 책임을 지라며 매번 어깨를 붙들었다.
지겨웠다. 귀찮았다.
그리고 분노가 차올랐다.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직장은 방해였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건 반드시 이뤄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설령 또 한 번의 파멸이라 해도.
그렇게 나는, 책임이 따라붙는 쾌락에서 도망쳤다.
이후 여자들과 노름을 하는 술집을 다녔고
당연하게도 주위 사람들은 충고랍시고 말을 보탰다.
“그렇게 사는 건 문제야.”
“이 사람, 언젠가 큰일을 내겠어.”
“글쎄, 이런 글은 너무 작위적이지 않나?”
“당신 아내가 찾고 있던데, 연락은 했나?”
답답했다.
왜 이렇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관심이 많은 걸까.
그러면서도 나는 사람을 만나면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에 새로 나온 원고입니다. 꼭 한번 읽어주세요.”
“이번 건 조금 다를 겁니다.”
그러면 돌아오는 대답은 언제나 원고와는 상관없는 말이었다.
“그래, 알겠네. 그런데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어?”
“응, 검토해보지. 하지만 여기서 여자나 끼고 술이나 마실 때는 아니지 않나?”
구질구질한 인간들이었다.
결국 여자와 술, 노름을 위해 이곳까지 찾아와서는
마치 자기는 도덕의 편에 선 듯 나를 훈계했다.
역겨운 위선자들뿐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자들이 내 원고를 읽고 채택해준다면,
신문 구석에 이름 석 자라도 박힌다면,
다음 공모전에서 수상이라도 한다면—
나는 그들의 신발을 입으로 물고,
그들의 가랑이 밑으로 기어들어갈 수도 있었다.
그 정도의 비굴함쯤은 내게 익숙했다.
속으로는 그들이 역겹고, 미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입으로는 아첨을 흘렸다.
“이번 원고는 조금 다릅니다. 선생님이 보시면 아실 겁니다.”
그들이 술에 취해 먼저 귀가하면,
나는 남은 술잔을 비우며 옆에 앉은 여자들에게 떠들었다.
“영감탱이들이 뭘 안다고 떠들어?”
“집에 가면 쭈글한 마누라 가슴이나 만지겠지.”
“다 늙어서 감정이란 걸 이해나 하겠어?”
여자들은 웃었다.
그 웃음이 내게 잠시 위로처럼 스쳤다가도,
이내 다시 공허만이 남았다.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곤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천박한 말들을 뒤에서 내뱉고 다녔다.
그리고 다음 날, 또다시 술집을 찾아가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인간을 욕하면서도, 인간에게 매달렸다.
그 모순이 내 생의 유일한 리얼리즘이었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은 돈마저 노름으로 잃었다.
가게에 달린 외상 금액만 계속 불어났다.
하루는 술에 취해 술집 방 한구석에 앉아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고, 방 안에는 술 냄새와 담배 연기가 엉켜 떠돌았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때였다.
방 안에,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서 있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사장, 못 보던 얼굴인데 누구야?”
내가 중얼거리자, 구석에 있던 주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야.”
나는 여자를 다시 쳐다보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어깨에 닿는 머리카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눈빛은 어딘가 비어 있었다.
“신기한 애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는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때 나는 문득, 그녀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걸 느꼈다.
마치 오래전,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그 표정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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