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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지코에서 가을을

EP. 17

by 추설

신칸센에 오른 뒤로,

이상할 만큼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타이밍을 재다,

결국 이 기류를 끊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저기요. 근데 그쪽, 일본어는 왜 그렇게 잘해요?

공부는 진짜 안 할 것처럼 생겨서는.”

그는 내 무례한 말투에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입꼬리만 얕게 올렸다.

“참나… 어이가 없네요.

내가 외국어 잘하는 것도 생긴 거랑 연관 지어야 해요?”

“아니, 그게 아니라.

진짜 그렇잖아요. 그렇게 막힘없이 외국어를 하려면

뭐, 워킹홀리데이? 아니면… 유학파 예술인?”

“뭐 같은데요?”

그가 짧게 되물었고,

나는 한순간 스친 생각을 던져버렸다.

“… 설마, 그쪽.

이름 안 알려준 게 사실은 일본인이라든가… 그런 건 아니죠?”

그 순간,

그의 표정이 잠깐 흔들렸다.

이마 근처가 미묘하게 움찔하더니,

곧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돌아왔다.

“예...? 절대 아니니까요. 억측은 그만하죠.

그냥 어릴 때 관심이 좀 있어서 오래 공부했었어요.”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흘리며,

느릿하게 말을 덧붙였다.

“하다못해… 그쪽이 제 국적까지 바꿔버릴 줄은, 나도 몰랐지만.”

그 말에 나는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어색했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려서였을까.

그렇게 소소한 얘기를 나누다 보니,

신칸센은 어느새 고쿠라역에 도착했다.

“이제 내려서 갈아타야 해요.”

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내 캐리어까지 꺼내주며 덧붙였다.

“고쿠라에서 모지코 가는 일반 열차가 있어요.

바로 연결되진 않으니까 조금 기다릴 수도 있고요.”

우리는 플랫폼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신칸센에서 재래선으로 이어지는 통로.

현지인과 관광객이 뒤섞인 복잡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한 줄기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다.

나는 그를 따라가며 조용히 물었다.

“그쪽, 여기도 처음은 아니죠?”

그는 잠깐 나를 곁눈으로 바라보더니

작게 대답했다.

“글쎄요. 기억이 나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그 애매한 말에

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가 타야 할 열차가 플랫폼에 들어왔다.

한국보다 작고 소박한 차체.

관광보다는 일상에 가까운 풍경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앉았다.

어느새 전보다 조금 가까운 거리.

창밖으로는 낮은 건물들과 산책길,

그리고 멀리 바다가 언뜻언뜻 보였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가로수,

조금씩 도시의 색이 묽어졌다.

그는 창밖을 오래 바라보다가

조금은 슬퍼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그가 말을 꺼냈다.

“곧 도착해요. 모지코는 바로 다음 역.”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시선을 잠시 발끝에 두었다가

다시 창밖으로 옮겼다.

그와 함께 타고 있는 이 열차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 흐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열차가 멈추는 소리.
창밖이 천천히 멈추며 시야가 또렷해졌다.
모지코역.
오래된 건물과 벽돌 지붕,
기차 유리 너머로 스며드는
조금은 낡고, 조금은 고요한 공기.

그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짐을 들어주며 말했다.
“내려요.
이제, 진짜 도착했네요.”

나는 그의 발걸음을 따라
조용히 뒤따랐다.


모지코.
그의 목적지.
그리고 지금은,
나의 여행지.

무엇이 시작될지 모르지만
이곳은 분명, 좋든 나쁘든
오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표지.jpg '모지코에서 가을을'과 이야기를 공유하는 작품 『세상에 없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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