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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Jul 23. 2023

이름 모를 선생님을 추모하며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여론에 비쳐진 것과는 별개로 묵묵히 학생들을 위해 자리를 지키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많고, 교사에 대해 무한 신뢰를 보내주시며 감동까지 주시는 학부모님들도 많다는 사실이다.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에서 우리는 균형을 잡아야 한다.

그러나....


알고 지낸 선생님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아픔을 공유하고 있었을 같은 교사였다는 사실만으로도 너무 가슴 아프다는 느낌을 넘어서 고통스럽고 우울하며, 처절하게 미안하기까지 하다.

지역도 다르고 학교급도 다르고 만난 적도 없지만 선배교사로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도 든다.


무슨 위로도,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무력감 속에서 무심한 듯 난 이미 준비한 <학교에서 일잘러 되기>글을 개인블로그에 올렸다.

추모의 글을 올리지 못할 거면 아무 글도 올리지 않고 그저 침묵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갈등하면서, 마치 그 자리에서 일상을 지키는 것이 마치 나만의 추모라고 다짐이나 하듯이 그냥 글을 올렸었다.


카톡 프로필에 추모의 리본을 단 것 가지고도 학생들에게 악역향을 끼칠 수 있으니 내려달라는 어떤 학부모의 요청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순간 난 그저 민감한 이슈에 대해 중립을 지키려는 비겁한 교사였던 것인지 돌아보게 되었다.


그 선생님이 작년 학부모님들께 보냈던 편지글을 기사에서 접하고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구구절절 선생님의 애정과 열정이 담겨 있었고 감성과 행복이 가득했던 편지였다. 이 일과 연결시키지 않더라도 이런 편지를 전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감동이었을 것이다.


학생들에 대한 애정과 열정의 깊이만큼 깊은 상처를 받게 되는 교사의 숙명 같은 아픔을 확인했다.

상처를 받지 않으려면 그냥 교육 활동을, 학생들을 대하는 것을 비지니스처럼 하면 된다. 기대도 실망도 없는 그 지점에서는 학부모의 민원이나 아이들의 비교육적 행위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도 없을 것이니...


그래서 더 가슴 아팠다.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성장을 돕고 응원하며 아이들의 꿈을 지켜주려는 그 꿈의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꺾여 버린 그 아픔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난 자신이 없었다. 글로도 생각으로도 정리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몇 마디 말과 글로는 그 아픔과 고통에 대한 온전한 공감이나 추모, 그 근처에도 닿지 않을 것 같았다.


난 침묵으로 추모하기를 선택했는데...


아래 글에 달린 교사가 된 제자의 댓글을 보고 나서 생각을 바꿨다.

https://blog.naver.com/chungvelysam/223156710824

그 일이 일어나기 3일 전에 올린 글이었다. 여기에 제자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전 이 글을 이제서야 읽었네요 계속 샘 글을 팔로잉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기부에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여서 놓쳤네요ㅜ 뉴스에 우울해하는 저를 보며 신랑이 이 글 읽으라고 추천해서 이제서야 읽고 위로받네요. ㅎㅎ고마워요 ^^♡


난 이렇게 답했다.

열정과 애정이 클수록 상처도 크지요ㅠㅠ 우린 모두 우울하고 힘든 상태지만 의식적으로 힘낼 이유를 찾아야 해요. 한 학기 고생 많았죠? 평안하게 충전해요. 신랑이 함께 블로그 글을 봤다니 감사하네요. 우린 이렇게 동역자 인증이네요^^


위의 포스팅에서 열정 넘치는 교사들에 대해 이런 조언을 했다.

한계를 인정할 것... 약점보다 감정에 더 집중할 것, 즉 선택과 집중을 할 것. 거절은 학생들에게 더 집중하기 위한 어렵지만 필수적인 덕목임을 기억할 것.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고 표현도 적극적으로 할 것.

모든 학생들이나 선생님들께 좋은 인상을 주거나 인정받으려 애쓰지 말 것. 모두가 다 자신을 좋아하고 자신의 좋은 의도를 다 알아줄 수 없음을 기억할 것.

지금 이 순간 한 번에 한 학생씩만 바라볼 것. 교사의 교육활동은 결실이 아니라 씨를 뿌리는 작업임을 기억할 것. 그러니 기다릴 것.

지금 이 순간 자신의 진심과 최선을 다하고 있다면 결과나 결실을 확인 못 하는 것이 당연한 상황에서도 정말 의미 있는 귀한 일을 해내고 있음을 자각할 것.

좌절하고 있는 학생들에게도 동일한 위로가 전달되도록 할 것.


그리고 후배 교사의 이런 교사의 마음도 언급했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단 한 사람의 어른(One caring adult)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

그분이 들었던 학부모 민원 중에 "당신은 교사 자격이 없다"는 말도 있었다고 한다.

교직에 큰 뜻을 품지 않은 사람은 이 말에 크게 반응 안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교사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가슴 아픈 말이긴 하다. 정말 열심히 애쓰고 노력한 사람에게는 특히 치명적인 아픔이다. 그동안의 자신의 노력과 애씀이 이 한마디에 다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 말은 한 사람은 그 말이 얼마나 아픈지 알지 못할 것이다. 이 말은 교사로서의 미래의 희망까지도 부정하는 말이다.


나도 그동안 학부모님의 항의 전화를 여러 번 받았다.

전화 내용은 다 생각나지 않지만, 전화를 받고 난 그전에 나의 열정과 열심과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다 부정당한 기분이었고, 너무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내게 교사 자격이 없다는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전화를 받았다는 것 자체가 난 자격 없는 교사라는 증명이나 증언 같은 확신까지 들었다. 너무 괴로워하다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에 동학년 하던 선배 선생님들께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선생님들 몇 분이 내게 문자로 격려를 해주셨다. 그 몇 마디가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상처는 여전히 남았고, 내가 좋은 교사인지 늘 자문하게 되었다.


어떤 때는 1년 이상 불안증에 시달린 적도 있었고, 또 어떤 때는 6개월 이상 우울해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픔은 나의 아픔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을 것이니까... 내가 교사 자격이 있는지 여부를 확정받는 것과는 별개로, 난 부정적인 감정을 분리하여, 적어도 다른 학생들 앞에 서 있을 때는 내가 가진 모든 역량과 진심을 단 하나라도 방해받아서는 안 되는 거였으니까...


그래도 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어떤 때는 지속적인 민원 전화를 대신 받아주시는 부장님도 교장선생님도 계셨고, 대놓고 내 편이 되어준 선배교사들도 있었다. 물론 부끄럽지만 내가 먼저 소문을 냈기 때문이기도 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뭐 그렇게 사소한 일로 힘들어하냐고... 멘탈이 너무 약한 거 아니냐고... 그런 정도는 이겨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이 또한 지나갈 것인데 뭐 그렇게 집착하듯 괴로워하냐고..


그런데 늘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며, 학생들 앞에 당당하고 떳떳하게 서려고 애쓰는 교사들에게 사소한 말은 없다. 학생의 말 한마디에도 상처받는 교사들이 많고, 동료나 선배교사의 의도하지 않은 말에도 깊이 찢기는 상처를 입기도 한다.


오래전 학교 이동할 때 원하지 않았는데도 고3 담임을 하게 되었고, 그 당시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다면 2년 정도는 고3 담임을 하고 내려오는 것이 암묵적인 룰이었음에도, 학년을 마칠 때 교감쌤께서 내게 새로운 고3들을 상대하기엔 나의 카리스마가 부족하니 2학년 내려갔다가 그 다음 해에 3학년 데리고 올라오라는 말씀을 하셨다. 평소에 친절하게 대해주시고 인격적으로 감화를 많이 주던 분이셨는데, 그분은 나름 배려한다고 한 말이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말을 듣고 자전거로 퇴근하며 다리를 건너는데 이대로 그냥 뛰어내리고픈 충동까지 느꼈었다. 아직 젊은 교사였고 수련과 성장의 여지가 많았으며, 교감쌤 말씀이 틀린 것도 아니었는데, 그 말씀이 나의 자격지심과 열등감과 만나서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탓이다. 이후에 나 같은 부적격 교사가 설자리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고 그만큼 괴로웠다. 그동안 교사로서의 나의 모든 것이, 이후의 모든 교사로서의 삶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다. 혹 내가 지켜야 할 가족, 딸들의 존재가 없었다면, 내가 더 용기가 있었다면, 교사가 나의 삶의 전부이고 내 정체성이었던 난 그 생각을 실행에 옮겼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힘겨워하고 있을 때 그런 일이 반복되어 일어났다면, 기다림의 끝에 그 끝이 보이지 않고 영원히 터널이 이어질 것 같다는 확신이 짙어졌다면 그 생각은 더 구체화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든다고 아픔이 무뎌지지 않는다. 여전히 상처받고 힘겨워한다. 나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그런 일들이 내게서 비껴가기만을 소원할 수밖에 없다.


그 선생님의 고통과 괴로움을 헤아릴 수 없지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들었을지 생각할수록 그 아픔이 전이된 듯이 아파온다. 눈물이 자꾸 나려고 한다. 그걸 혼자 다 짊어지고 있었을 그 심정이 자꾸 상상이 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생각하니 그 고통의 감정이입은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마치 모든 교사의 상처와 고통을 대표로 혼자 다 지고 가신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아 있는 교사들은 생존자처럼 미안한 마음과 죄스러운 마음을 안고 살아가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교육의 최전선에서 아이들을 만나야 한다. 우린 여전히 성장하며 꿈을 이뤄갈 기회가 있고,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가는 삶을 배워야 할 많은 아이들을 만나게 되어 있다.

학부모님들의 긍정적인 개입만 있는 건 아니고, 의도하든 그렇지 않든 아이들을 향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우린 그래서 더 절실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학생 한 명, 한 명을 만나야 한다.

힘겨운 상황에 모든 고통을 다 짊어진 아픔으로 먼저 가신 분을 추모하여, 살아 있는 교사들은 그 선생님 몫까지 현장을 지켜야 한다.


어차피 누군가 알아주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명예를 얻고자 하는 건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우리의 목표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저 아이들만 바라보기로 인생을 걸고 삶의 결단을 한 사람들이다. 나로 인해 달라질 아이들, 나로 인해 살아갈 힘을 얻는 아이들, 그들의 삶의 여정에서 기적 같은 인연으로 행복한 기억을 공유할 아이들..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그 자리를 지켜왔고, 무력감과 싸우고, 고통 가운데서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몰라줘도 상관없다.

그 어떤 시스템이나 외적인 영향력도 우리와 학생들의 교감과 삶의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고 꿈을 이어가는 그 만남을 막을 수는 없다.


무슨 숭고한 선교사 같은 미션을 말하고 헌신을 강제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교사가 살아갈 이유와 힘겨워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와 힘이 되는 것도 결국 아이들이다.


그렇게 우린 아이들을 만난다. 여전히 우린 실수도 하고, 혹 의도하지 않게라도 아이들에게 상처주지 않도록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아이들을 향한 진심과 최선을 거두지 않을 것이다.  

만남이 허락된 최후의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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