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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블리쌤 Jul 30. 2023

축복(24년 제자와의 인연)

이상은의 노래를 들었다. <언젠가는>

응답하라 1988에도 나왔던 <담다디>라는 노래로 유명하지만, 의의로 그 노래도 가슴을 울리는 슬픈 노래였지만...

이 노래의 가사는 이 나이가 되어서 들으니 그냥 가슴을 후벼판다. 이젠 다 흘러가버렸지만 파편처럼 기억으로만 흩어져 있는 나의 젊은 날을 마주하고 있다는 착각 속에 머물게 해주는 것 같다.

이 노래는 93년도 노래이니 벌써 30년이 지났다.

아래 노래는 97년 영상이다.

https://youtu.be/3bEW-ak4ctE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생각해 보니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눈물 같은 시간의 강 위에 떠내려가는 건 한 다발의 추억

그렇게 이제 뒤돌아 보니 젊음도 사랑도 아주 소중했구나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소중함... 왜 그때는 그걸 몰랐을까 하는 후회...

남은 건 실체 없는 한 다발의 추억...

관계가 이어지지 않고 그냥 그렇게 헤어진 사이라면 사무치는 그리움과 회한은 감당할 수 없어 그저 묻어두고 아무 일 없는 듯이 살아야 했을 것이다.

오랫동안 만남을 지속하는 관계라도, 그때 모습 그대로는 아닐 것이니, 우리는 그렇게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는 것이니... 당장은 느끼지 못하다가 한참을 지나 뒤돌아보면 아주 먼 길을 걸어왔다는 걸 깨달으며 아쉬움의 흔적들만 찾을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품 안에 꼭 안겨 잠들던 딸들의 기억이 아닌 현실이었던 시절이 손에 잡힐 듯 그렇게 생생하고 구체적인데, 지금은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독립을 이뤄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으며 더 잘해주지 못한 후회로 아쉬움을 묻어 버리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지나서 아쉬움이 있어도, 분명 그때 사랑을 했을 것이다. 순간순간 진심을 다했을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아쉬울지도 모르지만, 그 나이의 나는, 그 시절의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그 관계를 소중히 여겼을 것이다.

다만, 후회 같은 마음이 드는 건 더 이상 현실일 수 없는 기억의 파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든 아쉬움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미숙해서 젊음이고, 그 실수와 넘어짐과 아쉬움과 후회의 과정을 넘어섰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 성숙해 있으니까...

그때는 몰랐으나 지금은 그래서 의미가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은, 그렇게 아쉬움으로 떠올릴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가 축복 같은 일이었음을 그냥 감사하면 될 것 같다.

물론 계속되는 관계는 더 소중하게 이후로도 유한하게 주어지는 기회에 감사한 마음으로 진심을 다하면 될 것이고...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우리 다시 만나리

헤어진 모습 이대로


우린 한 번씩 그런 꿈을 꾼다. 졸업하고는 더 이상 만나지지 않는 소중했던 친구를, 제자를 우연히라도 다시 마주치는 일을... 서로 못 알아보고 지나치기도 하겠지만, 더 이상 기억 속의 그 사람이 아니어서, 피천득의 수필 <인연>의 아래 마지막 구절처럼 서로 다시 만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는 결론에 이를 수도 있겠지만...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어제 24년 전 제자를 만났다.

24년 만에 만난 건 아니었다. 24년 동안 망각의 강으로 흘려보내지 않게 한 번씩 전화 통화도 하고 만나기도 했었기 때문에, 세월의 흐름을 넘어선 것이 아니라 세월의 흐름을 함께 한 관계였다.


특히 어제 만남에서는 24년 전, 고등학교 1학년 때의 모습이 오버랩되어 신기한 마음이 들어서 그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물론 나도 지금처럼 머리가 희끗한 중년이 아니라 청년 같은 모습이었겠지.


그런데 교사와 제자라고 규정하기에는 애매한 점은 있다. 학교에서 가르친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대학 졸업하자마자 고등학교에서 3년 근무하다가, 군휴직을 했다. 시력이 안 좋아서 보충역 판정을 받았고, 공익근무를 구청에서 하게 되었다. 공원녹지계에 배정받아 평소에는 산불관리이나 공원이나 인공폭포 등의 시설관리를 하다가, 여름방학이 되면 교사경력을 인정하여 구청으로 오는 중고등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을 담당했다. 학생들이 너무 그리운 나로서는 그 시간이 가장 의미 있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봉사활동을 나왔던 학생 중 유난히 나를 잘 따랐고 내 말에 잘 경청했던 **여고 1학년 학생이 있었다. 봉사활동 이후 연락이 계속 이어지고, 휴대폰도 없던 그 시절, 손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공익근무지만 나름 군생활로 본다면 일종의 위문편지(?)였을까? 난 그 학생 덕분에 교사라는 정체성을 계속 부여받을 수 있어서 감사했고, 고민이 많던 고등학교 시절에 그 학생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음에 기뻤다.

그러다 편지로 복음을 전했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저 소개하는 정도였는데도, 그 학생은 교회를 가기 시작했다.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어서는 교회에 완전히 정착하고 신앙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 무엇보다 이 만남이 내게 너무 소중해졌던 결정적 이유 중 하나다. 이후 난 이 학생의 신앙의 멘토를 역할을 기쁜 마음으로 감당했다.


아래 글은 그 학생이 고3 때 학교 문집에 실었던 이야기이다.


축복

**여고 17代 ***


짧았지만 고등학교 2년 생활에 있어 가장 기억에 남는 일, 혹은 가장 뜻깊었던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이미 1학년 때 나를 전도해 주신 선생님을 만난 일일 것이다. (문집에 실은 내용은 나에게 있어 고등학교 생활을 더듬어 보게 하는 작업이라 하기에...) 게다가 그 선생님께서 D고와 관련이 아주 많기에 나와 그 선생님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아 왔기에

그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여기저기 봉사활동을 하러 돌아다니다가 다 퇴짜 맞고 찾아간 곳이 바로 서구청이었다.

“봉사활동하러 온 거예요? 어, 한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할 텐데...”

서울 말투, U.D.T(우리동네특공대) 특유의 복장을 한 어떤 공익 아저씨(?)가 나에게 건 말이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었지만 그때까지 여기저기서 퇴짜 맞고 간신히 찾아온 봉사활동 자리였기에 말 그대로 한 시간을 기다리다 결국 출발하게 되었다.

아까 나에게 처음 말을 걸어 준 그분이랑 같이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봉사활동 장소로 가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학교 영어 선생님 이름을 거의 다 아시기에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저 이래 봬도 전에 D고에서 영어 교사였거든요.”

하면서 여기(U.D.T)에 들어오기 전의 학교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자연스럽게 내가 다니는 학교 얘기를 꺼낼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선생님께서도 정든(?) 학교를 떠나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했기에 학교생활을 매우 그리워하고 계셨고 나 역시 고등학교 첨 들어왔을 때의 황당함부터 시작해서 학교에 대한 말이 아주 잘 통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틀 연속으로 한 봉사활동이 끝나는 날, 선생님(영어 교사였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이렇게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물론 영어뿐 아니라 신앙적인 면에서도 해당되는 말이지만)께서는 마지막이라며 혹시 도움이 될 자료가 있다면 보내겠다고 메일주소를 물어보셨지만 컴맹이었던(지금도 그렇지만) 내겐 메일 주소가 없었기에 그냥 선생님 메일 주소만 받고서 봉사활동을 끝내게 되었다.

그러다 수행평가로 PC방 갔다가 선생님께 안부 메일 보낼 걸로 말미암아 선생님과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다. 고등학교 올라와서 조금은 힘들어서 그런지 내 고민이나 신세 한탄(?) 같은 걸 선생님은 아주 잘 들어주셨고 같이 걱정해 주시고 도움도 주시곤 했다.

그렇게 계속 편지를 주고받다가 어느 날 선생님께 성경책을 받게 되었다. 독실한 크리스찬이시던 선생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나에게 소개해 주셨고 나 역시 독실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믿게 되어 지금까지 부족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시고 있다.

그렇게 나는 그 선생님에게서 영어라는 학문뿐만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는데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누구보다 힘들고 혼란스러워하며 보낼 수 있었던 2년여 동안의 고등학교 생활을 이렇게나마 잘 견뎌낼 수 있었던 건 아마 그 선생님을 만나서였던 것 같다. 지금도 역시 고3이라는 거대한 난관에 서 있는 나이지만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선생님의 배려와 내가 사랑하는 그리고 선생님께서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해 주시란 걸 알기 때문이다.

인연이라고 하겠지만 난 이렇게 믿고 있다. 선생님을 만난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정말 감격스러운 글이었다. 이걸 공적인 학교문집에 실었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난 공익근무를 하고 1년 반 후에 D고등학교에 복직했다. 그 학생이 고3이 되어 대학원서를 쓰면서 고민할 때 내가 그 학교 근처로 달려가서 상담을 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원하는 전공과 대학 사이에서, 학교의 입장과 집안 형편까지도 깊이 고민하고 있었다. 그냥 하고 싶은 거 하면 될 것인데도 늘 남을 먼저 배려하고 상황을 살피는 학생이어서 고민이 너무 깊었다.

원하는 전공을 찾아 다른 대학에 진학하고 싶은 본인의 마음과 학교 실적을 위해 어느 정도 강력한 설득을 하는 게 당연했던 그 시절의 학교 입장, 그리고 집안 형편 등을 고려해서 결국 서울대에 진학했다.

그리고 지금은 서울에서 윤리선생님을 하고 있다.


신기하게도 이 학생이 졸업한 해에 난 그 여고로 발령을 받았다. 2년 전 그 학교에서 영어몰입수업으로 초대되어 20년 만에 그 학교에 갔을 때 수업 전 잠시 만나 점심 식사를 하고 그 학생과 함께 교정을 거닐며 거의 비슷한 시기의 각자의 추억을 나눴던 기억도 난다.


대학 진학한 이후에도 난 이 학생의 기독교 신앙과 교직 선배 혹은 멘토로서 필요한 역할을 계속해주었다.

목사님 아들과 결혼하게 되었음에도, 내게 주례 부탁을 하기도 했었다. 기독교식으로 예식을 진행하는데 목사 안수를 받지 않은 내가 주례 서는 건 말이 되지 않았고, 주례를 하기에는 난 너무 젊었었다(?). 신랑도 나를 “영적인 아버지(?)”처럼 존중하고 뜻을 함께 했다고 해서 그 제안만으로도 감사하고, 감격스러웠던 기억도 있다.


그 후로 24년이 지났고, 한 번씩 만날 때나, 전화 통화를 할 때도, 여전히 난 폭풍 잔소리를 꼰대처럼 늘어놓지만, 이 제자는 고등학교 1학년 시절의 그 모습으로 여전히 겸허하게 경청하며, 여전히 내가 교직, 신앙, 자녀 양육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필요한 존재라는 존중을 내게 보여준다.

내 블로그의 열혈 구독자이기도 하다. 지역은 다르고 일상은 다르지만, 블로그를 통해 소식을 듣고, 위로와 힘을 많이 얻는다고, 손편지를 주고받다가 블로그를 통해 소통을 하게 된 것이 엄청난 세월의 흐름인 것 같다는 말을 내게 했다.

얼마 전 올렸던 “이름 모를 선생님을 추모하며”를 자신의 프사로 올리는 열심을 보이기도 했다. 캡처한 그 부분이 내가 특히 엉엉 울면서 오열하듯 썼던 부분이라서 놀라기도 했다.


내게 도움받는 것에 대해, 나의 존재에 대해서 늘 감사를 표현하지만, 내 교직생활을 이 제자를 제외하고 논할 수 없을 정도다. 학교를 벗어나서도 비슷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뿌듯함과 이렇게 한결같은 성장과 행복의 과정을 공유해 주는 것까지, 내가 교사됨과 무조건적으로 날 응원하고 존중해 주는 그 존재감까지 나도 감사한 마음뿐이다.


정말 신기하고 귀한 인연이다. 이런 걸 우리는 축복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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