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의 기대와 인정 중독, 결국 소통

by 청블리쌤

기준과 성취 의지가 높은 부모유형은 자녀들이 인정 중독에 빠지게 할 위험이 있다.

일반화할 수 없지만 내가 그 증인이다.

<부모의 다른 기댓값, 다른 무게감>

얼마 전 남동생과 긴 통화를 했다.

남동생은 나와 6살 차이가 나는데 의도하지 않게 나 때문에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을 거라는 생각이 나이가 한참 들고나서야 느껴져서 가슴 아팠다.

전교 1등을 하며 학교와 지역사회에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던 형과 비교되는 삶을 동생은 살았던 것 같다. 한참 후에야 사소한 계기들이 모여서 드라마틱한 성취를 이루긴 했지만 한참 동안 인정받지 못하며 헤매는 굴곡진 과정이 길었다.

남동생은 나를 현실 이상의 능력자로 올려치기 했다. 실제로 학창 시절에 성적에 대한 부모님의 비판에 형은 현실에 거의 존재하지 않는 비율일 뿐, 자신은 평균보다는 훨씬 잘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고 한다. 아마 나와 선 긋기를 하면서, 형을 절대 시기 질투하며 당장 그 이상이 되려 하지 않았고 자신의 속도와 역량을 바라봤기 때문에 정신건강을 지키면서 이후의 성공을 이뤄낸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다.

그래도 동생은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없었기 때문에 형과는 달리 자기만이 멘탈과 속도를 지킬 수 있어서 한편으로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모님의 기대가 내 삶에 미친 영향>

지난날을 돌아보니 아버지는 특히 나에 대한 기대가 크셨다. 장남의 무게도 소심한 내가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는 의도와는 다르게 나의 어깨를 늘 짓눌렀던 것 같다.

고등학교 일기장을 보면 아직도 내가 생존해있는 것이 기적같이 보일 정도로 난 우울했고, 불안했다.

지금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한글을 다 익히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 당시에는 입학 후에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이 더 많았다.

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우리 집에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 중에...

우리 집에 놀러 오신 어머니 친구분이 자기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 전 한글을 다 뗐다고 자랑을 하고 계셨다는데... 나는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한자 공부 좀 해야지"이러면서 한자책을 가져다 공부를 했었다고..

머리가 좋다는 조짐이 있어서인지, 부모님의 맹목적인 기대감 때문이었는지, 부모님의 기대는 내 감정에 조금씩 묻어들어오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들도 월말고사 등의 시험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국민학교 시절...

국민학교 2학년 때 어쩌다 보니 실수로 전교 1등을 했었다. 어려운 형편임에도 아버지는 내게 1등 선물로 위인전 전집을 사주셨다.

칭찬과 격려는 선한 의도로 시작하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때의 칭찬은 내게 족쇄가 되었다. 그것도 위인전의 인물처럼 성장하라는 아버지의 메시지는 나의 일상을 잠식했다.

그 기대감이 더 힘겨워지기 전, 소심한 반항으로 나는 친구들과 몰려서 놀러 다녔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

그러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험공부를 열심히 해보았는데 1등을 했다. 그때 얻은 성취감과 자신감으로 부모님의 기대 말고 나의 의지와 욕심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게 되었다.

그때부터 전교 1등의 고단한 삶이 이어졌다.

한 번 얻게 된 성취는 곧 디폴트 값이 된다. 적어도 부모님의 기댓값은 예외 없이..

그래서 최근에 학생들과 상담할 때 "너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걸 부모님께 들키지 마라. 너 스스로에게도 들키지 마라."라는 조언이 잠재의식에서 튀어나온 것 같다. 부모님께도 스스로에게도 최대치 열심이 디폴트 값이 되는 순간 이후의 모든 노력이 실망과 좌절로 얼룩질 수 있을 거라는 과도한 걱정은, 이미 내가 오랜 삶으로 어린 마음에 새겨진 상처에서 나온 것이었을지도...

아버지는 그 이후로 1등을 당연시했고 전 과목 만점 맞을 때만 업어주시면서 기념사진을 찍곤 했다.

결과적으로 서울대 갈 성적으로 서울대를 지원하지 않고 경북대를 썼다는 실망감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경북대 사범대 차석(전액 장학생)이자 문과 전체 3등으로 입학했을 때도 내게 극도의 실망감과 분노를 드러내셨다. 지역 뉴스에서 전체 수석 등의 실명을 공개하던 그 시절, 수석을 해서 방송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은 서울대를 진학하지 못한 것도 나고, 한두 문제 차이로 수석을 놓친 것도 난데, 그런데도 서울대 떨어지고 나 홀로 집에서 힘겨운 재수를 마무리하면서 아쉬움은 있었어도, 합격했다는 안도감과 어느 정도의 노력에 대한 인정을 바랐던 나의 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기대에 연연하지 않았다면 그런 실망도 없었을 것인데.. 지금 생각하니 그 기대감에 길들여져 있었던 것 같다.

<칭찬의 양면성>

그렇다면 잘했을 때 칭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인가?

아니다. 그러나 결과에 대해서만 칭찬을 하면 아이는 과정보다 결과에만 치중한다. 과정 자체가 버텨내야 할 지옥훈련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결과나 성과가 목표가 될 수는 있지만 우리가 추구하며 우리 의지로 이뤄낼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칭찬은 그 영역을 의지와 노력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려는 불가능한 미션을 던져준다.

충분히 열심히 했어도 결과로 증명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사소한 성취에 행복감을 느낄 겨를이 없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연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은...

칭찬은 결과가 아닌 노력하는 과정에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노력하는 과정은 자신의 의지로 조절하고 이뤄낼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도한 욕심으로 인한 과도한 칭찬은 결과에 치중되어 있지 않더라도 해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우울한 사람에게 가장 하지 않아야 할 말은 "힘내", "할 수 있어"라는 말이라고 한다.

우울감과 불안함이 가득 차 있는 이들에게 당장 의지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무력해 있는 이들에게 마땅히 힘을 내야 하고 그럴 수 있다는 격려와 칭찬은, 과정 자체가 이미 이루기 힘든 성취가 되어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력하는 과정에는 마음껏 칭찬을 해도 된다는 메시지로 해석하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칭찬은 부드러운 족쇄이며, 일종의 외적 보상이다. 본질적인 보상은 스스로 성취감을 느낄 때 스스로에게 얻는 것이어야 한다.

<자녀 성적표에 대한 반응>

자녀의 성적표를 보는 것은 관심이고, 아이가 잘 되기를 바라며 피드백을 주는 것은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의 의도와 상관없이 아이들은 눈치를 보게 되고,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결과에 실망한다.

원하는 성적을 얻지 못한 것에 가장 속상한 것은 본인이다.

그러나 그 속상함이 부모의 기대에 대한 실망, 그걸 살피는 눈치라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스스로 온전히 속상해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사랑해서 모진 말을 하는 거라고?

성적표를 조작하거나 숨기는 학생들에게 물으면 대부분은 부모님이 원하는 성적이 나올 때까지만 보여드리는 것을 보류하는 것뿐이라고 핑계를 댄다. 그런 학생들에게 젊은 시절에 나는, 현실을 마주해야 발전이 있는 거라며 솔직히 보여드려야 한다는 말을 무책임하게 던지곤 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변해야 할 것은 성적표 보여드릴 용기를 가져야 할 학생이 아니라, 있는 모습 그대로의 출발점과 성장의 속도를 존중하고 인정해야 할 부모였다는 걸 젊은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부모님은 분명 적군이 아닌 아군이 맞는데, 적어도 성적표와 관련해서는 혼란스럽다.

기대감과 기준이 높은 부모님께는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기가 어려워진다. 그 약점은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고 전략을 세우는 메타인지 형성의 기회가 되어야 하는데.. 부모님의 격려를 옷 입은 비판과 실망으로 메워진다.

<기대감보다 더 절실한 공감>

아이와 함께 아파하려면...

적어도 부모의 속상함이나 욕심이 아이에게 개입할 여지를 주면 안 된다. 부모의 절제를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이 필요한 지점이다.

아픔을 함께해 주는 공감이, 서툴지만 아이들 스스로 성장의 걸음을 자발적으로 내디딜 수 있는 기회를 준다.

어떤 부모님은 자신은 아이에게 강요한 적도 강압한 적도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에게 쏟는 모든 관심과 물질적인 서포트도 모두 기대의 영역이다.

학군지에서 중간기말고사 시험이 끝나는 순간 많은 아이들이 이렇게 절규한다.

"XX 우리 엄마가 사교육비로 들인 돈이 얼마인데!!!"

이것도 감정 표현에 능한 용기 있는 학생의 외침일 뿐 대부분의 학생들은 조용히 그 말에 격하게 공감만 겨우 하며, 잠시 부모님을 적군으로 한 동지애를 느끼기도 할 것이다.

<부모의 높은 기대와 기준, 소통의 문제>

성적표는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상징일 뿐, 모든 영역에서 아이들은 부모의 기대와 기준에 맞춰 자신의 일상을 돌아본다.

그리고 기대와 기준에 넘어선 일들만 알리는 안정을 선택한다.

그러면 부모님은 당연히 칭찬을 해줄 것이다. 그렇게 칭찬에 중독이 되면... 아이가 느끼는 부담감보다 더 큰 문제는, 어렵고 힘든 일을 부모와 공유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가 힘든 일을 홀로 다 짊어지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자기주도성과 독립적인 성향은 결국 이뤄내야 할 가치이지만, 부모의 영향력은 실제로 문제 해결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거나 개입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 없이 기대어 울 수 있는 존재감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남동생은 힘들고 어려운 일들은 전혀 부모님과 공유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도 굳이 실패하고 좌절한 일들을 일부러 꺼내어 보여드리고 싶지 않았다.

나의 삶은 오로지 칭찬과 인정으로만 가치를 인정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 열심히 애쓰고 노력하게 되기는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님의 기대가 아니라 나의 성취와 내가 부여하는 의미가 더 중요해졌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기대와 인정 중독의 잔재가 내게 남아 있다.

<기대감이 대물림되지 않게 하려는 큰딸의 사례>

큰딸이 성균관대 공대에 합격하고 찾아뵈었을 때 아버지는 열심히 해서 삼성에 입사할 수 있을 거라는 격려를 해주셨는데, 그동안의 족쇄 같은 기대감의 억압을 딸에게 대물림할 수 없다는 비장함으로 폭발하듯 아버지께 몇십 년간 쌓였던 분노를 터뜨렸다.

순응적이고 적어도 면전에서 대들거나 하는 일이 극히 적었던 나의 갑작스러운 폭발에 아버지도 당황하셔서 이후 기차 시간 될 때까지 모든 가족이 어색한 침묵으로 대기했었다.

손녀에게 덕담을 하는 것이 뭐 그렇게 잘 못된 일인가?

적어도 내 성장 배경에서는, 아픔으로 점철되며 상처 없는 행복교육을 꿈꾸며 형성된 나의 교육철학과 가치관에는 절대 잘못된 일이었다.

혹 큰딸이 그걸 성취하더라도 그 성취의 목표를 정하고 성취하는 시기를 정하는 것도 본인의 것이어야 하니까. "성균관대 공대 = 삼성 입사" 이런 공식이 당연해지면, 공식에 부합하는 성취는 디폴트가 되고 약간의 오차도 실패와 좌절이 될 것이 아닌가...

큰딸은 의외로 타격감이 없었다고 했지만... 나도 그런 기대감과 칭찬과 인정 지옥에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했다. 조금씩 벗어났다고 생각했을 때 괜찮다는 억압과 회피로 포장된 상처였던 것이었다.

할아버지의 영향이 아니라도.. 큰딸은 취업에만 몰입하는 대학생활을 추구하지 않았다. 대학에서 밴드부에서 베이스기타를 치는 활동을 서울 문과, 수원 이과 캠퍼스 두 군데를 오가면서 활동했고, 이후에는 DJ 동아리에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 활동들이 어른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길에 맞닿아 있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좀 더 미래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너무도 당연한 현실적인 조언도 나는 회피했다.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한 회피일 수도 있었겠지만, 난 적어도 어느 정도 이상의 성취를 딸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래야 성취를 하더라고 그 성취가 오롯이 딸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 딸이 3학년이 되어서.. 내게 이랬다.

대학에 와 보니 과학고, 영재고 등의 학생들 사이에서 자신이 천재가 아님이 확실했고, 그렇다고 치열하게 노력할 생각도 없어서 힘들다고...

기계공학 전공하는 학과 학생들은 취업에만 몰입하고 있는데 자신은 그런 숨 막히는 경쟁에 뒤늦게 참여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의미 있는 뭔가를 성취한 것 같지도 않다고..

난 딸의 방황 같은 고백이 가슴 아팠고 한편으로는 감사했다. 이런 힘든 이야기를, 인정과 칭찬을 얻지 못할 이런 이야기들을 아빠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음에...

난 당장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나서 그냥 아픔을 함께해 주었다.

성취 여부나 정도가 아빠의 딸에 대한 사랑의 깊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응원의 마음은 변함이 없지만, 승승장구하는 것을 확인하려는 것만이 응원의 이유와 목적이 아니라는 것도. 방황하고 낭비하는 과정조차 의미 있는 성장의 과정임도 명확하게 했다. 실패와 좌절을 통해서도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을 응원한다는 진심의 마음만 전했다.

아빠의 존재감은 현실적인 도움이 아닐 것인데... 딸도 이미 인지하고 있는 너무도 당연한 조언과 현실적인 상황, 그리고 후회로 떠올릴만한 과거의 아쉬움을 강조할 이유는 없었다.

그저 함께 아파하면서, 손을 잡아주는 존재감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랬어야지. 그러니까 이걸 해야지."

이런 종류의 조언은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하는 당사자에게 자책과 후회를 강화할 뿐이다. 응원의 마음을 듬뿍 담았다고 생각했어도 그렇다.

그런데 아이가 그걸 잘 받아들이고 힘을 얻고 있다고? 아마도 그런 척하거나, 억압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으니 잘 살펴야 한다.

딸은 힘겨운 과정에서 사소한 일상의 의미부터 찾아갔다.

그 후로 딸은 음악은 거의 그만두었다. 음악을 그만두고 의미 있는 일을 찾은 것이 아니라, 음악보다 더 재미있고 자신의 역할을 하며 의미 부여할 수 있는 길을 찾았다. 그리고 학사랩실에 들어가서 석박사통합과정까지 바라보면서 치열하게 그 분야에서 노력 중이다. 그 길에 대한 확신이 100%는 아니겠지만 재미와 보람과 의미를 다 잡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빠로서도 너무 행복하다. 그러다가 다른 길을 또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딸의 매 순간 선택을 인정하고 존중하려 한다.

<둘째 딸의 사례>

얼마 전 둘째 딸이 알바를 마치고 전화를 했다. 알바 과정에서 실수를 해서 여러 사람을 불편하게 했다는 거였다. 자책과 미안함으로 딸은 울고 있었다.

판단하지 않고 그냥 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좀 더 조심했어야지. 뭐 그렇게까지 미안한 일이 아닐 텐데 어느 정도만 수습하고 수업을 갔어야지."

이런 종류의 말들은 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건 아니다. 거의 목구멍 위까지 올라와서 말하기 직전까지 갔지만 힘겹게 참아내야 했다.

한참 이야기를 들어주고 나서 딸에게 감사한 두 가지를 말해주었다.

"이렇게 힘들고 마음 아픈 일을 있는 그대로 엄마, 아빠한테 이야기해 주어서, 힘들 때 엄마아빠가 기댈 수 있는 존재라서 너무 고맙다.

실수를 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않고 정말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애쓰고 마음을 전하는 따뜻함과 진심을 지닐 정도로 성장해 줘서 너무 고맙다."

좋은 의도라도 자녀의 실수와 좌절에 대해 단정적으로 판단하고 조언하고 심지어 감정을 담아서 화를 내거나 실망감을 드러냈다면...

자녀는 마음의 문을 닫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독립성과 주도성에 도움이 될 것이니, 아이가 있는 모습 그대로 존중받듯이 부모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아이를 대하면 되겠지만..

<결론은 부모, 자녀의 소통.. 행복교육>

적어도 내겐 소통의 단절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다. 소통을 이어가려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잠시 멈춤(Pause)"다. 생각나는 대로 감정이 올라오는 대로 바로 표현하지 않고 잠시 멈출 수만 있다면 공감과 소통의 폭은 더 깊고 커질 것이다.

남동생은 내게 우리의 순응적 반응이 아버지의 기대를 더 강화했을 것이니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상처 주려 하지 않았어도 그럴 수 있다는 것. 그럼에도 극복하고 성장하고 사랑하는 게 가족일 것이다.

고통스러운 성장의 배경에서도 난 자녀와 학생들 위한 교육관을 형성해갔다.

딸들에게도 이런 행복교육이 전달되기를 늘 바랬다.

나의 교육관은 큰딸이 고3 때 스스로 생각해 낸 고3 좌우명인 "행복할 만큼만"으로 구체화되었다. 막연했던 나의 교육관은 딸이 네이밍 같이 생각해낸 문구로 실체를 얻은 것 같아서 그 문구를 접했을 때 놀랐고, 기뻤고, 뿌듯하기까지 했었다.

그리고 그저 과정에 행복했을 뿐인데... 도달하게 되었던 매 순간의 성취와 의미 있는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들을 맞이하며 이렇게 삶으로 외치고 있다.

과정은 "행복할 만큼만", 결과는 "어쩌다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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