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에게서 초대 전화가 왔다.
그동안 치열하게 연습해왔던 대학 댄스동아리 정규 공연 초대였다.
물론 딸은 엄마 아빠가 꼭 올 것을 기대하고 얘기한 것은 아니었다.
금요일 저녁 7시 서울에서 진행하는 행사라서 아빠도 엄마도 직장에서 조퇴를 하거나 연가를 내야 도달한 거리와 시간이라는 것을 본인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간에 학교 축제라는 큰 무대도 서고 중간중간 실전 무대도 있었지만, 한 해 동안의 활동을 결실하는 가장 큰 행사이며, 가족들을 초대하는 분위기라서 얘기를 꺼낸 거였다.
게다가 얼마 전 기숙사에 부모님들을 초대하는 오픈하우스 행사에서 댄스동아리 오프닝 공연을 할 때 참석하신 많은 부모님들을 보고 엄마 아빠 생각도 났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늘 딸의 댄스 라이프에 물심양면으로 응원을 아끼지 않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노쇼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 안타까웠다.
수업교체를 하고 조퇴를 할 수도 있을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동안 교직에 있으면서 늘 마음으로는 가족이 우선이었지만 몸은 학교가 우선이었던 것 같다. 학교 일정 이후에 주어진 시간에만 아내와 딸들에게 집중했다. 연가를 내는 것도 가능한 일이었겠지만 수업교체하고 담임으로서 개인 사정으로 빠지는 것에 대해서 스스로 엄격했다.
학교에서 반 학생들의 보호자 동행 체험학습을 결재를 해주는데 정작 나는 딸들과 보호자 동행 체험학습을 써본 적이 없었던 것도 교사인 아빠의 단상이다.
그러고 보니 졸업식과 겹쳐서 딸 졸업식에 가지 못한 적도 있었다.
둘째 딸이 태어난 날, 특휴임에도 고3 담임으로 학교 애들 수시원서 상담하고 접수를 도우러 학교를 다녀왔었다.
딸이 유아세례 받는 날에도 수능 끝난 직후부터 반 학생들 모두에게 전화를 해준다고 교회로 가는 택시 안에서까지 딸의 축복스러운 여정길에 온전히 집중해 주지 못했다.
정해진 학교 내에서의 시간과 필요한 노력 외에도 난 그렇게 굳이 안 해도 될 열정을 더 쏟았었다.
학교와 집, 교회, 도서관 외에는 출입하는 곳이 없고 친구를 만나러 다닌 적도 없어 그 외의 시간은 가정에 올인했지만, 나의 헌신값만큼 가정에서의 시간과 노력의 총합은 줄었을 것이다.
아내와 딸들은 그런 나를 남편으로, 아빠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었다. 덕분에 함께 하는 모든 시간엔 온전히 행복했고, 그 관계가 세월이 훌쩍 지나버린 지금까지도 친밀하게 유지되고 있다.
웬만큼 아파서는 병가도 잘 쓰지 않았다. 얼마 전처럼 거의 걸을 수가 없는 상태이거나, 도저히 정신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만 한 번씩 병가를 썼다.
수업교체를 하고, 부담임쌤께 반 학생들을 부탁드리며 연가를 쓸 수도 있었을 텐데라는 유연한 생각에 이르렀지만...
딸의 공연일인 11월 15일은 고입성적 확정일이다. 중3 담임에게 가장 중요한 날 중 하나인데, 학년부장인 내게는 모든 고입 성적 작업의 책임이 있어 적어도 퇴근 시간까지 꿈쩍할 수가 없다. 담임선생님 부재 시 학년부장이 대신하여 성적처리를 할 수는 있지만 학년부장을 대신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게다가 성적처리 이후에 전교생들에게 배부할 개별성적과 일반고 및 특성화고 지원서 작성작업까지 기획하고 약속드린 상태라서 기대 이상의 일까지 감당해야 한다.
글을 쓰면서 이렇게 못 가는 이유에 대해 구차하게 변명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너무 한심하고 딸에게 미안해졌다. 그동안에도 아이들이 원하고 필요했던 순간에 함께해 주지 못 했던 건 아닌지...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잠들어 있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새벽마다 학교로 나섰고, 학교에서 열정을 다 쏟고 나서는 밤이 깊어지기 전에 아이들보다도 더 먼저 잠드는 일이 많았다.
아이들과 함께 주어진 시간에 많이 놀아주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게 주어진 물리적인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갑자기 미안함으로 차올랐다. 가족들과 여행도 다니고 나들이도 제법 다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의 제한된 상황의 나만의 최선은 아니었을지... 아이들에게 평소 아빠의 부재와 노쇼에 대해 직접 물어본 적은 없지만, 묻기가 두렵다.
딸은 엄마 아빠가 정규 공연에 올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초대의 말을 던졌다.
못 가서 미안하지만, 그럼에도 난 그 초대가 너무 고마웠다.
나였다면 아버지께 동아리활동 자체에 대해 말씀드리지도 못했을 거였다. 아버지가 원하지 않는 활동은 숨기면서 해야 했다. 실제로 큰딸이 고등학교 밴드부, 둘째가 중학교 댄스부를 한다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그만두어야 한다고 하셨다. 공부에 방해도 되지만, 그 활동 자체에 건전한 가치를 두지 않으셨기 때문이었다. 난 애써 무시했다. 딸들이 전공까지 고민한다는 얘기도 굳이 할 이유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학교 축구부에 발탁되어서, 겨울방학 동계훈련을 했었다. 개학 후 코치 선생님이 사정으로 바로 그만두셔서 정식 게임도 못 뛰어보고 훈련만 하고 나의 축구선수 커리어는 끝났지만, 아마 축구를 계속하고 싶다고 했어도 아버지는 끝까지 반대하셨을 거다.
그래도 덕분에 나는 그 이후 축구의 열정을 갖게 되었다.
물론 훈련 기간에 축구 경기는 안 하고 지그재그 뛰기, 트래핑, 패스 등의 기초 동작만 반복하고는 그걸로 끝이었으니 그 모든 훈련이 당시엔 부질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6학년 때 축구 경기할 때 스스로의 움직임에 놀랐다. 그때의 기본기가 몸에 축적되어 있다가 실전에 나타난 것이었다. 공이 발에 붙어 다녔고, 지그재그 동작이 몸과 일체화가 되어 여러 명을 제치는 능숙한 드리블도 가능해졌다.
훈련만 할 때는 느끼지 못 했던 재미와 함께, 그때 갈아 넣었던 기초와 기본기에 대한 노력이 어느 순간 실전에서 보상받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열정으로, 소나기나 한여름의 땡볕도 축구하는 나를 멈추지 못했다.
중고등학교 진학해서도 체육시간이나 교외활동으로도 축구를 계속했다.
고등학교 때 2, 3학년 동안 동일한 반으로 구성되었던 우리반은 2년간 축구 무패의 반이었다. 체육시간을 조정해서 축구를 하는데 한 번도 진 적이 없었고, 나는 붙박이 공격형 미드필더로 활약했다.
그러다 고3 체육대회 결승전에... 교목(학교목사)으로 계셨던 사립고등학교라서 아버지는 본부석에서 귀빈처럼 앉아서 나를 지켜보고 계셨다. 몸이 얼어붙었다. 난 갑자기 소심한 수비형 미드필더가 되어 있었다.
야구 선수 타율이 4할이면 전설이다. 현대 야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타자도 10번의 타석 중 평균 6번을 실패한다. 삼진을 두려워하면 홈런도 칠 수 없다.
그러나 난 늘 실패가 두려웠다. 특히 부모님 앞이라면 더 그러했다. 완벽주의적인 기준을 모든 일상에서 강조하셨기 때문이었다.
계속 전교 1등도 하고 있었으니 부모님의 기대는 타협을 몰랐다.
난 늘 최상의 결과로 증명을 해내야 했다. 작은 실수는 이후 더 큰 성장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고 그렇게 딸들과 학생들을 지도하고 용기를 주고 있지만, 여전히 난 그 인정 중독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실패를 얘기하면서 격려를 받는 자리가 아니었고, 늘 자랑이어야 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런 대화의 패턴이 이어졌다.
지금 나의 열심은 그런 인정 중독의 부작용일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나 비난을 미리 막으려고 먼저 움직이는 조급한 성취주의와 완벽주의 코스프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나는 학부모의 민원이나 학생들로부터 받는 상처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나의 사소한 실수라도 늘 나의 가치와 정체성 전체의 훼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도 난 축구를 즐겨 했다. 축구를 함께 했던 같은 과 선배인 손위 처남이 나의 축구 실력을 아내에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런데 난 한 번도 보여주지 못했다. 교회 체육대회에서 기회가 있긴 했다. 그러나 낯선 그 분위기에서 뭔가를 증명해야 한다는 생각이 날 얼어붙게 했다. 소심하게 어슬렁거리고만 있었다.
과감하게 실패하고 넘어지면서 좌절의 문턱을 딛고 나면 실력 발휘가 될 수 있을 텐데, 나의 소심한 두려움은 여전히 내 안에 실체로 자리하고 있었다.
중2 때 학교 대표로 수학경시대회를 홀로 나갔었다. 시내에 있는 학생들끼리는 서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 서로 모여서 반가운 대화를 나눌 때 난 시골의 이름 없는 중학교 대표로 홀로 벤치에 앉아서 소속감도 못 느끼고 주눅이 들어서 이미 시험 시작하기도 전에 결판이 났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 자신이 그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침 콧물이 많이 나서 코를 풀었는데 그 소리가 너무 컸는지, 주위에 있던 여학생들이 꺄르르 웃었다. 내 기준으로 그 비웃음과 같은 웃음소리가 나의 비참함과 한심함의 바닥이었던 것 같다. 순간 내가 그들에게 괜찮은 척할 필요도 똑똑한 척 밀리지 않으려 애쓸 필요도 없다는 각성이 되었다. 내가 갖고 있던 두려움과 자격 없는 듯한 그 자리에서 웃음소리로 전해진 그 실체의 바닥을 겪고 나서는 오히려 난 시험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똑똑해 보이는 아이들을 다 제치고 시군 규모의 대회에서 1등을 했다.
내게는 그것도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남들에게 멀쩡해 보이려고 가면을 쓰려고 했다면 마음 편하게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을까?
시험에서 꼴찌 해도 이미 망신을 당한 이후였기 때문에 이미 별거 아니었다는 당당함으로 두려움과 미자격의 실체를 딛고 설 수 있었던 일종의 심리치료 같은 경험이었다.
물론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나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난 여전히 가면을 쓰고 산다. 내 능력 이상으로 인정을 받아야 나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만 같아서 남들이 보기에 피곤한 열정의 굴레에 살고 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고 행복해하고 있으니 오해 없으시길...
둘째 딸은 공연 중 실수에 대한 두려움을 내게 얘기했다. 가장 큰 무대에서 실수할까 봐 그 떨림을 가슴에 계속 품고 있었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이 있는데도 부모님을 초대한다는 것이, 참석하지 못하는 미안함의 이면에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적어도 내가 딸에게 실수나 실패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면서 성취나 성과로서 증명해야 할 부담을 주지 않았다는 점에서, 나의 상처가 대물림되지 않았다는 안도감도 들었다.
딸들은 물론 시험 성적이 좋았을 때도 설렘으로 기다렸다가 내게 자랑하면서 함께 기뻐하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힘들어하는 일에 대해, 실패와 좌절에 가까운 체험과 학업과 삶의 고민에 대해 아빠에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는 것이 너무 감사하다.
늘 내가 해결책을 주는 것이 아니라도 실패하고 실수한 모습 그대로 내게서 위로를 얻고 힘을 얻을 수 있다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아니까...
딸에게 마침 수능 다음 날인 정기공연을 수능에 빗대어 이렇게 얘기해 주었다.
걱정되고 떨리는 것은 잘하고 싶고 잘할 수 있기 때문에 드는 설렘의 다른 모습이야. 수능이나 공연을 앞두고 그냥 마음이 편하기만 하다면 마음을 비웠거나 더 성장할 동력이나 동기를 찾지 못해서가 아니겠니.
물론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을 수 있지. 그래서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공연 연습을 한 거고.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도록.
그렇게 열심히 해 온 걸 아니까, 그냥 스스로를 믿고 무대에 그냥 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어느샌가 황홀한 행복감으로 가득 채운 무대가 무사히 끝나 있을 거야.
그동안 너무 열심히 잘 해왔으니 잘 할 것을 믿고, 혹 실수가 있더라도 어떻게든 끝까지 해낼 것이니 걱정하지 말고, 이 떨림의 순간조차 다 설렘과 행복으로 온전히 다 누렸으면 좋겠다.
그동안의 모든 과정이 아름답고 행복했으므로 그 행복이 자연스럽게 무대로 이어질 거란다.
떨리는 설렘을 굳이 선택했다는 것, 그런 도전이 멋있다.
직접 가지 못해 아쉽고 미안하다. 기도하면서 엄마 아빠가 계속 응원할게.
둘째 딸은 엄마 아빠가 못 와도 괜찮다고. 예상했던 것이니... 가까이 있는 언니와 친구들이 와주기로 했다고 했다. 외로워서가 아니라 와줄 사람들이 있음에도 엄마 아빠를 초대하려 했던 그 딸의 마음에 미안함과 감사함과 행복감이 들었다.
그리고 난 안다. 무대를 위해 달려왔지만, 무대만이 의미 있는 순간이 아닌 거라고. 수능도 그러하듯, 과정 자체의 매 순간이 의미 있고 행복한 성장의 과정이었을 것이라고.
도착점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할 뿐...
단 하나의 낭비 없는 순간의 행복과 성장의 기쁨을 응원할 수 있어 너무 감사했다.
작년에 수능을 응원했던 그 마음으로 딸의 공연을 기도하며 응원하려 한다.
최근에는 큰딸이 학부 랩실에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물리와 수학 전공과목을 잘 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중에 내게 불확실한 떨림 등을 전해왔고, 이후 기대 이상의 성과도 내게 기쁨으로 전해줬다. 계속되는 딸의 도전과 여정에 아빠 엄마의 기도와 응원도 계속될 것이다. 그 응원은 늘 최상의 결과에만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딸들의 도전과 노력을 향한 것이다. 성취나 성과는 그 과정의 끝에 "어쩌다 보니" 얻게 되는 보너스 같은 기쁨인 것이니. 결과에 관계없이 늘 성장하고 행복하기를 기대한다.
어쨌든 딸들에게 가닿을 수 있는 기도와 응원을 할 수 있어 감사하다. 확정되지 않은 떨림은 설렘이기도 하지만, 더 큰 희망이기도 한 거니까. 도전을 멈추지 않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