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

단절.

by 천히

설 연휴에 아무런 일정도 없었던 나는 주말부터 모자란 잠을 보충한다는 핑계로 내리 잠만 잤다. 그 결과 새벽 4시에 잠에서 깨었고, 아무것도 할 일이 없던 나는 6시 즈음 필름카메라 하나만을 들고 무작정 광화문으로 향했다. 7-8년 전에 아무런 생각 없이 새벽 첫 차를 타고 광화문에 나온 적이 있었는데, 생각이 많아졌던 요즘 생각을 덜어내고 싶어서인지는 몰라도 새벽 광화문의 색과 내음이 문득 그리워졌다.


광화문 광장, iPhone X


날씨는 상쾌했지만 추웠고, 주변에 카페에나 들어 가 있으려 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주변에 연 카페가 없었다. 무엇을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며칠 전 세운상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지라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기엔 조금 거리가 있어서, 그 시간대에 길거리에 차가 없는 행운을 만끽하고자 따릉이를 빌려 청계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청계천을 따라, 광화문에서부터 을지로를 넘어가면 기분이 이상하다. 두 어 블록만에 오랜만에 보는 푸른 하늘을 앞다투어 가려대던 빌딩들은 사라지고, 높아봤자 4층 정도의 손때 가득한 건물들에는 카세트 테잎이나 전등, 전자부품 따위를 판다. 세운상가의 시작이다.


어렸을 적, 전자부품에 퍽 관심을 가졌던 나를 데리고 아버지는 세운상가에 오셨다. 세운상가에 들리면 한 손에 쥐어져 있는 다양한 부품뿐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이곳에서 살면서 이것저것 만들어 보았다는 아버지의 추억을 한 가득 쥐곤 했다.


000017760028.jpg 철거되는 세운상가. Minolta X-700 f3.5, Fuji SUPERIA X-TRA 400

그 세운의 시작에는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감추기 위한 노란색 천막과, 세운을 살려내라는 상인들의 천막이 여럿 달려 있었다. 이에 관련된 여러가지 이야기들은 잘 모른다. 하지만 하나 확실히 알게 된 건 있었다. 아, 또 한 세월이 사라지는구나.


조금 발걸음을 옮기니 노란 천이 다 사라져, 무너진 건물의 잔해만이 보이는 곳이 있었다. 철거가 예정되어 있는 바로 옆 건물 옥상에는 한 사내가 소리치고 있었는데,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가 언듯 서려 있었다. 아마 공사장 인부가 아닐까, 설 연휴에도 일하고 있는 사실에 화가 나는 게 아닐까.

000017760029.jpg 철거되는 세운상가. Minolta X-700 f3.5, Fuji SUPERIA X-TRA 400

또 다시, 감정의 순간은 감정의 순간이며 삶은 감정을 기다리지 않는다는 불변의 사실을 깨달았다. 세운이 다 날라간 건 아니지만, 나의 추억 일부가 날라갔구나- 라는 감정을 사내는 기다려 주지 않았다.


입이 텁텁했다. 여기서 더 여운을 즐기려다간 오히려 기분을 잡칠 일이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어 서둘러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냥 계속 상가를 보고 싶어 동대문까지 이어지는 상가의 거리를 계속 달렸다. 동대문에 가서야 다른 사람을 마주했고, 그제서야 늦잠에서 깨는 서울에 맞게 나도 본연의 일인 자전거 타기를 즐길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