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림은 앞에 있는 남자와 한집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카린 루시안' 이것이 그의 본명이었다. 로운은 밖에선 그를 삼촌이라 했고 집에선 카린이라 불렀다. 진 바지와 남방셔츠, 까무잡잡한 피부, 헝클어진 머리칼, 천진난만해 보이는 순박한 표정과 잘 어울렸다.
그는 사람을 숫자로 쪼개어 생각하는 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할 정도로 많이 부족했다. 공항 근처 쇠퇴한 거리에서 작은 꽃집을 하고, 22평 주상복합 빌라 전셋집에 살고, 가족이라곤 뉴욕의 헬렌과 로운이 전부였다.
그 셋은 한국의 서울, 미국의 뉴욕,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20년도 훨씬 넘는 간격으로 태어났다. 출생지와 시대가 다름에도 그들은 만나 완벽한 가족을 이뤘다. 로운인 수시로 뉴욕의 헬렌과 페이스톡으로 통화하고, 카린은 볼륨감 넘치는 다 큰 여자애를 세 살배기 아이 다루듯 애지중지했다. 그는 로운에게 '사랑한다.' '예쁘다' '네가 최고다'라는 유치한 언어를 어리숙한 말투에 섞어 넉살 좋게 썼다. 어릴 적부터 순수하고 우월한 소리를 듣고 자란 로운은 자신이 월등한 여신이라도 된 것 모양 자신만만하고 밝았다.
그럴 때마다, 혜림은 법원 판사가 정해준 이혼 숙려기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했다. 그녀는 자신에게도 그런 유치한 말을 해주었으면 하는 염치없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리숙한 말투는 짙은 사랑을 끊임없이 전달하려는 표현 방식일 뿐이었다. 그와 인류 고대사에 관해 대화할 땐, 수수께끼 같은 인류 고대 문명과 진화를 탐구하고 파헤쳐 진실을 찾아가는 구도자처럼 보였다. 그가 문득문득 깊은 생각에 잠겨있으면 또 다른 모습이 나타났다. 마치 그는 꿈쩍도 안 하는데,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는 듯했다.
혜림은 얼마 전 들렸던 환청이 기억났다. 그날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것이 쫓아오는 무서운 환상에 시달렸을 때 '영혼을 지키려면 세상에 가장 강한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는 속삭이는 소리였다.
정말, 내 안에 있는 영혼이 그를 두고 한 말이 아닐까?
그녀는 많이 부족하고 어리숙하고 유치한 남자로 인해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믿음마저 생길 지경이었다.
"우리 걸을래요?"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 네."
그녀의 삼키듯 한 단마디 대답엔 늦은 밤 첫 데이트에 대한 수줍은 기대와 설렘이 길게 배어 있었다.
건너편 카페에서 처음부터 그들을 쭉 지켜보던 여자가 혼잣말했다. 눈처럼 시린 은빛 머리를 옆으로 땋은 이십 대 초반의 유럽계 여자는 차가운 금속판을 정교하고 흠집 없이 붙여놓은 듯 서늘했다. 그녀는 인간에 대한 동정심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냉담한 눈빛으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보며 오묘한 미소를 지었다.
카린은 진실로 사랑에 빠진 남자라면 당연히 겪어야 하는 나약한 고민을 했다. 혜림은 그녀를 꼭 닮았다. 그는 오랫동안 늘 같은 꿈을 꾸곤 했다. 숲속 공터 나무둥치에 기대어 앉은 여인의 허벅지를 베고 한가로이 누워있는 남자에 대한 꿈이었다. 그는 꿈속 연인에게〈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부드러운 햇살〉과 〈숲속의 사냥꾼〉이라는 인디언식 이름을 붙였다. 유년 시절이 지나자, 그는 숲속의 사냥꾼이 되어 보드라운 허벅지를 베고 있었고, 그녀는 나뭇잎 사이로 비추는 어른거리는 햇살처럼 상큼한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내려다봤다.
그의 고민은 깊어졌다. 이렇게 시간만 흘려보내다 그녀를 훌쩍 떠나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가혹한 생각마저 들었다. 혜림이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고 불편한 마음에 집을 나간다거나 좋은 친구로 지내자고 한다면 미쳐버리고 말 것이라 여겼다. 함께 보낸 지난 팔 일간 매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이젠 그녀가 없는 삶은 떠올리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 그는 강한 사람이었으나 사랑 앞에선 매우 소심한 숫기 없는 남자에 불과했다.
혜림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과분한 남자였다. 겉은 어리숙하고 순수해 보여 편안했고, 속은 깊고 강해 자신의 여자를 섬찟한 세상으로부터 너끈히 지켜 주고도 남았다. 그와 함께 있으면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따위는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를 사랑한다는 것이었다.
만약 이 순수한 남자가 고백한다면, 그것은 남녀가 단순히 사귀는 것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옆에 있어 달란 소리야... 평생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 남자야... 아니야 내게 고백할 일 없어, 난 애도 못 낳고 방금 이혼했어... 제대로 된 남자라면 나처럼 허영심으로 똘똘 뭉쳐 살아온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카린은 세상이 무서워 벌벌 떠는 한심한 여자를 동정한 것뿐이야... 그런데 함께 보낸 지난날처럼 맘껏 웃어 본 적 없어... 사랑하는 사람과 완벽한 가족이 되고 싶지만 그러기엔 너무 미안하잖아... 안돼, 내일이라도 당장 그 집에서 나와야 해... 서로를 위해...
혜림은 '사랑하니까 헤어진다'라는 비논리적이고 이해 불가능하지만 헤어지는 연인들 사이에 널리 통용되는 아주 흔한 결심을 했다.
'어서요, 나 지금 떨려요.'
침묵이 가져온 무거운 정적은 불과 몇 초간이었으나 한없이 느긋했다.
드디어 그의 고백이 기다림으로 가득 차고 설렘으로 떨고 있는 서른아홉 살 여자의 가슴으로 쏘아졌다.
"사랑을 기다리게도 지치게도 의심하지도 않게 할게요."
활시위를 당기듯 잠깐의 떨림으로 출발한 그의 고백은 지독했다. 거침없이 날아와 심장을 뚫고 지나가 단숨에 힘겹게 버티고 있는 여자의 영혼으로 파고들었다. 듣는 순간, 학습된 프로그램으로 뇌에 저장돼 있던 관습 규범 도덕과 같은 잡다한 것들은 깡그리 무시됐다. 그녀의 머리가 미쳐 생각할 틈도 주지 않고 영혼이 먼저 결정했기 때문이다. 멍하니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자신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똑 하고 떨어져 바닥으로 스며드는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로운이가 있잖아요, 혜림 씨만 내 곁에 있어 주면 돼요."
그녀가 말을 꺼내려는 찰나, 그가 혜림을 잡아당겨 양팔로 으스러지게 끌어안으며 말을 끊었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가 본인의 잘 못도 아닌 것을 가지고 망설이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한 여름밤 더위로 땀이 밴 그의 셔츠에 파묻힌 채 심호흡을 크게 해서 널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러자 그의 진한 체취가 맡아졌고 자신이 토해낸 뜨거운 숨결에 놀란 그의 심장이 거칠게 뛰는 소리가 생생히 들렸다.
"카린은 첫 데이트에 여자나 울리는 참 나쁜 사람이에요."
그녀가 그의 가슴에 대고 말했다.
그가 허리를 감싼 한쪽 팔을 풀어 한껏 달아오른 그녀의 이마를 살며시 밀어젖혔다. 둘의 시선이 얽혔다. 그는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는 그녀의 물기 있는 맑은 눈동자 안에 담긴 열망의 유혹을 견딜 수 없었다. 가볍고 부드럽게 탐색하듯 입술을 스치고 싶었으나 본능은 거칠고 깊게 하길 원했다. 한동안 계속된 격렬한 입맞춤이 멈추자 둘은 자유로운 젊은 연인들처럼 다정하게 손깍지를 끼었다. 그녀는 눈물이 날 정도로 순수하고 멋진 고백을 받은 이 아름다운 장면만큼은 절대 잊히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가 단정히 뒤로 바싹 말아 올린 머리칼로 인해 훤히 드러난 그녀의 섬세한 목덜미에 진한 숨결을 불어넣자, 내 남자의 거친 욕정이 내 여자의 전신으로 번졌다. 그녀는 활활 타오르는 열망을 억누르고 다음 순서를 기다렸다. 그는 뜨거운 숨결을 계속 불어넣으며 그녀의 등을 더듬거렸다. 그러나 마땅히 있어야 할 것이 없었다. 혜림은 그가 다급히 찾고 있는 것이 원피스 지퍼라 생각했다.
"요즘 원피스는 지퍼가..."
그녀가 조그맣게 말하자, 카린은 그녀의 너풀거리는 치마를 성급히 잡아 올렸다. 혜림은 팔을 들어 그의 어깨에 살며시 얹어 벗기기 편하게 해 주었다.
머리핀도 풀러야 겠지.....
그녀는 뒷머리를 고정시킨 집게 핀이 방해될 거라 여겼다. 혜림이 집게 핀을 뽑자 긴 머리가 출렁이며 호박색 불빛이 내려앉은 그녀의 매끄러운 쇄골 위로 흘러내렸다. 그가 혜림을 번쩍 들어 침대에 눕히고 자신도 재빨리 벗어던진 다음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그녀 위로 포개졌다. 그리고 밀착된 상태로 그녀의 일부를 가리고 있던 나머지 작은 것들도 서둘러 해체했다. 그녀는 어깨를 젖히고 엉덩이를 슬며시 들어주는 것으로 그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혜림의 가슴에 머무르던 부드러운 혀가 배꼽을 지나 더 아래로 천천히 옮겨갔다. 그는 중간중간 숨을 깊게 들이켜 달콤 상큼한 살 냄새를 음미했다. 그녀의 잠자던 모든 세포가 한꺼번에 깨어나듯 동시에 움찔거렸다. 몰아치는 전율에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힘껏 쓰다듬었다.
그녀가 카린의 얼굴을 끌어당기자 그가 올라와 입맞춤했다. 뿔처럼 단단한 것이 길을 못 찾고 방황했다. 혜림이 손은 뻗어 감싸 쥐고 부드럽게 인도해줬다. 그가 빈틈없이 그녀의 안으로 들어왔고 그녀는 그를 남김없이 차지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고무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중력을 거스르고 무한정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의 목을 양팔로 부여잡고 매달렸다. 그들은 거친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 하모니처럼 서로의 작은 동작에도 격렬히 반응했고, 입에선 낯부끄러운 사랑의 언어가 쉼 없이 쏟아져 나왔다.
빛나는 아침, 이륙하는 비행기 소리에 깨어난 그녀는 모든 아침이 똑같지 않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하지만 민망한 생각에 눈을 뜰 수 없었다. 지난밤 몇 번이나 함께 절정에 이르렀고, 입술과 손길이 서로의 몸을 구석구석 빠짐없이 탐험했고, 대범한 사랑의 행위는 욕실까지 이어졌었다. 평생 속으로 삭히고 참고 살아왔던 숫기 없는 자신이 그렇게 도발적인 섹스를 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그가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으려는 듯 조심스럽게 침대서 빠져나와 창가로 다가갔다. 그 순간 혜림은 잠시라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다는 기분 좋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가 실눈을 살짝 붙여 뜨고 바라봤다. 어깨부터 발끝까지 이어진 선명한 곡선을 따라 잔잔한 근육으로 뒤덮인 내 남자의 뒷모습과 탄탄한 엉덩이가 보였다. 그가 화이트 그레이 톤의 린넨 커튼을 활짝 열어젖히자 파란 하늘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가 눈을 곱게 흘기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