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상담 두번째 기록
어느덧 세 번째 상담 날.
상담사 셜리의 표정이 좋지 않다.
- Lucy, 상담지 결과를 받았어요.
- 살기 싫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나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털어놓았다.
- 저는 제가 실행에 옮길 거라고는 생각하지는 않아요.
- 하지만 지난 2주간 '살고 싶지 않다'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스친 적은 있어요.
- 그런 생각을 이겨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 지금은 괜찮아요.
셜리는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고 했다.
- 그럼, 당신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이 있나요?
안아달라는 듯이 뻗은 아기의 팔,
잠결에도 따뜻하게 안아주는 남편의 품,
일본 가수 아이묭의 노래 가사,
주말 호숫가의 시원한 바람,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셜리의 표정이 안심하듯 한결 좋아졌다.
- 사실 저와 제 남편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미국의 불안정한 고용환경이에요.
남편이 일하고 있는 미국의 빅테크 기업은 대규모 레이오프를 연례행사처럼 한다.
높은 연봉과 화려한 커리어를 당근으로 주는 대신,
치열한 경쟁 속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지 못하면 냉정하게 내쳐지는 곳이다.
퀭한 눈으로 밤낮없이 일하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아직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한 내 상황이 초조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함께 여유롭게 육아 시간을 보내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하다.
(미국 테크 이야기는 또 다른 포스팅으로 썰을 풀어보겠다.)
셜리가 이해한다는 듯이 공감의 눈빛을 보내왔다.
- 한국에서의 모든 기반을 접고 왔으니 더욱이 그럴 것 같아요.
- 여기서 무엇도 보장되지 않았는데,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상황이니까요.
같은 상담사와 여러 회차 상담을 하면 내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어서 역시 이해가 빠르다.
이런게 라포가 형성된다고 하는 걸까?
- 그래도 몇번의 상담 이후로 제가 좀 좋아졌어요.
- 미국에서도 나를 지지해주고 내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게 위로가 돼요.
- 상담을 통해 앞으로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도 생기는 것 같고요.
실제로 상담을 받는 것은 나를 단단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친한 친구나 지인이라 하더라도 육아나 취업, 결혼생활처럼 부분적으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이지,
삶 전체의 궤적이 같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30대가 되니 가정과 커리어 등 우선순위가 높은 일들로 가득차기 시작하면서,
온전히 '나'에 대해 누군가와 깊게 얘기하는 시간을 내기가 힘들었다.
가족과 얘기하면 되지 않냐고?
지난 경험으로 비추어보자면, 오히려 가까운 가족일수록 내 감정에 대해서 날 것으로 얘기하기가 조심스럽다.
정제되지 않은 감정으로 얘기하다보면, 내가 가진 불안이나 우울이 전파되거나
의도치 않게 상대방을 책망하는 것처럼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아빠와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아빠와 이에 대해 얘기하는게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아빠가 후회와 죄책감으로 여전히 그 시간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면,
나 또한 물 속에서 발목이 잡힌 것처럼 가라앉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가정과 자녀, 미래까지 우르르 무너지는 것이 가장 두렵기 때문에,
평소에는 의식적으로 엄마의 죽음을 '엄마의 인생'과 '내 인생'으로 구분하고자 노력한다.
엄마의 죽음이 나에게 남기고 간 숙제도 물론 많지만,
나 때문에 엄마가 돌아가셨다든가,
엄마가 힘들었다든가 하는 생각은 최대한 피하려고 하는 것이 그 일환이다.
엄마의 인생에는 희생과 헌신이라는 엄마의 선택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비록 그로 인해 엄마의 건강이 악화되어 일찍 세상을 떠나셨다고는 해도,
그 선택을 존경하고 존중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왕국을 점령하고 32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해서,
그 업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죽음 이후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도 사실이지만,
죽음이 치열한 생의 흔적을 아무것도 아니게 만드는 것 또한 사실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엄마의 영혼과 스스로를 위로하곤 한다.
엄마의 죽음에 대해 아빠와 나의 슬픔은 같지만, 인식의 차이가 크기 때문일까.
공감과 위로로 시작한 대화는 결국 설득의 영역으로 넘어가 이내 소통의 벽으로 막힌다.
그렇기에 가족보다도 제3자인 상담사와 이야기를 하는게 때론 더 편안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빠와의 관계에 대해서도 셜리와 한번 대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셜리는 내가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를 물었다.
- 새로운 사람을 많이 만나고 있어요.
- 미국에 사는 한국인, 개발자로 커리어를 바꾼 사람들, 어린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 등등 ...
- 저와 공감대가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감이 생겨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두려움을 이겨낸 것에 대해 셜리는 내가 자랑스럽다며 칭찬했다.
별 것 아닌 것에 칭찬을 받은 것 같아 민망하면서도,
마음이 힘들어 혼자 웅크리고 있었던 시간을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 사실이기에 내심 뿌듯했다.
- 그런데 요즘 저는 제가 ADHD가 아닌지 의심하고 있어요.
- 한 가지에 집중하기가 힘들고, 시작한 일을 마무리 짓지를 못해요.
- 일을 하다가도 SNS나 유튜브를 확인하고 쉽게 정신이 산만해져요.
셜리는 ADHD는 자신의 전문이 아니라며 정밀 검사를 받고 싶다면 전공의를 찾아가볼 것을 권했다.
한편으로는 나를 둘러싼 일들이 너무 많아서 내가 집중이 힘든 것일 수도 있다며 한 가지 명상법을 제안했다.
- SNS나 알림을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진짜 세상'에 집중하는 연습이 필요해요.
- 먼저 손을 비비고 따뜻하게 만든 다음에, 양 옆의 땅에 대어 보세요.
- 그 상태로 땅에 대해서 감사한 마음을 소리내어 말해보세요.
- 저부터 해볼까요?
- 나는 땅이 항상 그 자리에 있음에 감사하다.
- 마치 엄마가 아기를 감싸안아 들듯이, 나를 지지해주고 지탱해주는 땅이 있음에 감사하다.
- 자, 이제 Lucy가 해보세요.
나는 카페 소파에 앉은 채로 손을 비비고 소파에 양 손을 대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옆자리 사람들에게 일단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 음... 내가 서 있을 공간이 있음에 감사해요.
- 걸을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감사하고, 끝없이 펼쳐져 있음에 감사해요.
상담사 셜리는 이어서 팔을 하늘 어깨 높이로 들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해보라고 했다.
- 삶의 의미를 무한히 채워 주는 우리 딸에게 고마워요.
- 가정을 위해 희생하는 남편에게 고맙고,
- 조금 더 좋아지려고 하는 나 스스로에게 고마워요.
셜리는 아주 잘 했다며,
다음 단계를 내가 미리 말해버렸다고 했다.
3단계는 팔을 스스로를 감싸 안고 스스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4단계는 팔을 들고 하늘에게 감사한 것을 말해보라고 했다.
여전히 남의 일에 무관심한 옆자리 사람들에게 한번 더 감사의 말씀을 전하며,
소심하게 양손을 들었다.
- 저는 밤하늘의 별들에 감사해요.
- 매일 밤 잠들기 전, 딸을 안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엄마에게 인사를 해요.
- 우리 딸은 이제 밤하늘을 '할머니'라고 부르기도 해요.
- 그러면 마치 엄마와 대화하는 것 같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음에 감사해요.
말을 하면서 나는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 엄마 얘기를 할 때마다 눈물이 나는군요.
스크린 너머로 셜리의 따뜻한 눈빛과 목소리가 건너와 닿았다.
- 울고 싶을 때는 울어도 돼요.
- 감정을 위한 마음의 공간을 남겨두세요.
- 사람이니까 울 수도 있는거에요. 울지 못하면 우리는 고장나버려요.
셜리는 마치 아이를 대하듯 내 감정을 온전히 받아들여주었다.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게 이번 상담도 울다가 웃다가 마무리가 되었다.
상담과 함께 나는 긴 호흡으로 감정을 인정받고,
다른 이의 감정을 수용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감정을 이용하려는 사람, 부정하는 사람, 비난하는 사람들로부터는
조금씩 거리를 두는 법도 배우고 있다.
사는 곳이 달라졌어도, 내가 있는 곳이 곧 내 공간이고,
내가 느끼는 모든 감정이 온전한 내 경험이니까.
조금씩 더 단단하고 솔직하게, 나답게 살기 위한 연습을 계속해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