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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r Veronica May 17. 2023

생애 마지막 주치의

호스피스 완화의학과 의사의 이야기

 어느새 SNS 가 아이로 도배되어 버렸지만 사실 본업하느라 애 볼 시간이 거의 없다..

호스피스 의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렵고 훨씬 힘들고 기대했던 것보다 몇 배로 보람되고 뜻깊고 멋진 일이지만 내 아이와 보낼 시간이 줄어든 것만큼 안타까운 건 없다.

격주로 당직과 주말회진이 번갈아 있고 일을 하다 보면 시간이 초과되기 일쑤라 거의 80시간씩 일하고 있는데 이게 내 아이와의 시간과 맞바꿀 만큼 가치 있는 일인가 계속 돌아보게 되는 요즘이다.


호스피스 병동은 조용하면 조용한 대로 자문형 의뢰가 많아지고 대기자들이 아우성쳐서 바쁘고 호스피스 병동이 바쁘다는 건 환자분들의 상태가 악화되거나 임종하셨다는 얘기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다 힘들어진다.


내가 하는 업무는 호스피스 입원형 환자와 자문형 환자(즉, 협진)를 보고 교수님과 함께 상의해서 환자를 사정하고 환자에게 내릴 처치를 결정하고 전공의 선생님이 원활하게 오더를 내릴 수 있도록 봐준다. 3시간씩 오전 회진을 돌고 면담을 하고 오후 회진을 돌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다. 교수님께서 워낙 지극정성이셔서 그동안 정말 많은 걸 배웠는데 매일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오니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도 잘 몰랐다.


항상 전공의 오더에는 구멍이 있고 초보인 나는 잡아내질 못해 교수님이 발견하는 일이 허다했다. 주말 회진에서 전공의랑 나랑 상의해 무언가를 결정하고 교수님께 컨펌을 받으려 연락을 드리고 나면 오더가 바뀌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럴 때면 이제까지 배웠던 모든 지식과 경험이 부정당하는 느낌이었고 교수님은 단 한 번도 화내신 적은 없었지만 노티를 듣고 "어?" 하고 반문하실 때마다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전공의였다면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하고 교수님이 시키는 대로 다시 하면 되지만 전문의인 내 어깨에 지어진 책임의 무게는 생각보다 컸고 매 순간 결정이 어려웠다. 인턴 때나 전공의 때도 힘들어서 그만두고 싶다거나 어려워서 그만할까 느낀 적은 없었는데 호스피스에서 일하고 나서 두 달 동안 참 많이 울었다. 일이 힘들어서라기보다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었는데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맞나' 싶어서 매일 자괴감에 몸부림치고 의사로서 나의 역할에 혼란스러웠다.


면접 보러 갔을 때 교수님께서 하셨던 말은 실력보다는 '진심'이 중요하다 하셨는데 이곳에 와서 매일 진심으로 일하다 보니 그만큼 소진도 빨랐다. 첫 달엔 거의 매일 야근을 했고 당직 때도 후 달리는 마음에 환자들을 끊임없이 들여다보고 있었고 주말 회진을 위해 출근하면 반나절동안 못 갔다. 교수님이 "너 너무 열심히 일하지 말고 좀 쉬어. 대충 해. 병난다." 매일 그러셨는데 4월이 되자 정말 병이 났다. 4일 정도는 열이 나고 온몸이 아팠다. 육아와 호스피스 일을 병행하는 일이 내 몸이 견딜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나 싶어 정말 그만둬야 하나 뭘 위해 이렇게 열심히 하나 싶었다.


그러다가 그제부터 호스피스 표준교육을 받으러 나왔다. 오프라인으로 전환돼서 인천성모까지 와야 해서 오기 전에는 너무 귀찮았는데 3일간의 강의동안 많은 걸 얻었다. 우선 첫째는 로컬에서 일하시는 다양한 과의 연로하신 선생님들도 호스피스를 처음 접하게 돼서 교육을 받으러 오셨는데 저렇게 경험이 많은 분들한테도 새롭고 어려운 분야구나 싶어서 내가 못하는 게 당연하고 빨리 잘하려는 게 욕심이었다 싶어 겸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정보와 지식이 너무 많아 내가 잘 배우고 있는지 몰랐는데 여기 와서 토론 수업을 하고 강사들의 강의를 들어보니 생각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게 많고 머릿속에 체계적으로 정리돼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교수님께서 정말 하나하나 다 가르쳐 주셨는데 나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나 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수님들도, 경험이 많은 의사도, 다른 직군에게도 호스피스는 누구에게나 어렵고 소진이 될 수 있구나 싶었다. 강의 중에 서민석 교수님께서  "누군가의 삶에 마지막 주치의가 되어 생의 마무리를 도와주는 일을 할 수 있다니 정말 신성하고 멋진 일 아닐까요?"라는 하셨는데 그 얘기를 듣고 나니 뿌연 안갯속에 갇혀있던 나의 시야가 선명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부담스럽고 어렵기만 했는데 그런 일을 하고 있던 거였다니 조금 마음이 따뜻해지고 자부심도 생겼다.


두 달 동안 환자분들의 임종을 곁에서 지키면서 보호자들과 부둥켜안고 다독이기도 하고 눈물이 핑 돌기도 하고 정말 내가 해드린 게 없는 거 같은데 감사했다고 90도로 인사하시면서 병동 먹을 걸 갖다 주시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생의 마지막에 연결된 우리의 인연에 감사했고 그분은 그곳에서 편하시길 기도하면서 어려운 마음들을 추슬렀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이렇게 신성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감사하다. 어려 모로 마음이 무거운데 그래도 묵묵히 해볼 생각이다. 적응이 되는데 좀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래도 잘할 수 있겠지라고 믿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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