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묻힌 아이』의 샘 셰퍼드
경기아트센터 매거진 '예술과만남' 202008-202009
Dramatis Personae 무대 위 인물 이야기_ 샘 셰퍼드
깨진 거울 같은 사람이 있다. 분명 한 사람인데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한다. 극작가이자 배우, 연출가, 시인, 음악가,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 등 어떤 타이틀을 붙여도 어색하지 않은 샘 셰퍼드는 깨진 거울처럼 하나로 정의하기 어려운 다양한 모습으로 분화된 사람이다. 사실 깨진 거울은 그 자신이 반영하는 것뿐 아니라, 반영하지 않는 균열 때문에 표현력이 강해지는 법이다. 작가로서의 경험을 연기에 싣고, 배우로서의 경험으로 다시 글을 쓰고, 극을 위해 음악을 만들고, 영화배우로서의 경험을 살려 시나리오를 쓰면서 그는 갈라지면서 더 강해졌다.
국내에는 영화배우로 알려졌지만 사실 샘 셰퍼드는 1970년대 이후 미국 연극계를 대표하는 극작가이다. 그는 미국 서부 시골 마을에서 자라나 농업대학을 다녔다. 그러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 희곡에 매료되어 연극을 하기 위해 뉴욕으로 향한다. 전통적인 방식의 극작을 배워본 적이 없는 그의 초창기 희곡은 거칠고, 정제되지 않았지만, 마약에 취한 예술가들이 넘쳐나던 60년대 뉴욕 젊은이들의 분노와 서부에서의 개인사를 극 속에 고스란히 담아내며 주목받았다.
1966년부터 오프 브로드웨이 연극상인 오비상(Obie Awards)을 총 10번 이상 받으며 명성을 쌓아갔지만,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배우도 처음에는 부업으로 시작했다. 필립 카우프만의 1983년작 <필사의 도전>(The Right Stuff)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오를 만큼 영화배우로서 인정받았지만 스스로 정체성을 작가라고 단언할 만큼 그는 글을 쓰고 싶어 했고, 평생 총 44편의 희곡을 완성했다. 1982년 영화 <여배우 프란시스>(Frances)에서 만난 제시카 랭과 재혼했는데, 금발 섹시 스타와 희곡 작가의 만남은 세기의 커플이었던 마릴린 몬로와 아서 밀러와 비교되며 작품보다 이름을 더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는 세계적인 예술가들과 함께하면서 작품세계와 예술관을 확장한다. 1985년 세계적인 거장 로버트 알트만 감독이 연출한 <사랑의 열정>(Fool for love)의 주인공으로, 1987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은 빔 벤더스의 <파리, 텍사스>(Paris, Texas)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참여하면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93년에는 리버 피닉스 주연의 영화 <싸일런트 저스티스>(Silent Tongue)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1993년 <펠리칸 브리프>(Pelican Brief) 같은 상업영화에도 출연했고, 2013년 <어거스트 가족의 초상>(August: Osage County), 2016년 <이타카>(Ithaca) 등 2017년 루게릭병으로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배우로 활동했다. 뉴욕 매거진은 ‘현존하는 가장 위대한 미국인 극작가’라고 그를 칭했는데, 이젠 소멸하여 영원한 전설이 되었다.
가정 3부작과 『파묻힌 아이』
샘 셰퍼드의 작품은 줄곧 서부를 벗어나지 않는다. 아메리칸 드림을 이뤄냈지만, 이제는 황량한 사막으로 남은 서부를 묘사하는 그의 글에서는 까끌까끌한 모래가 느껴진다. 『파묻힌 아이』(Buried Child) 역시 서부의 한 농장을 배경으로 가정비극이라는 전통성과 손을 잡으면서도 패륜에 가까운 충격적 내용과 모호한 표현법으로 고전 비극의 전통성을 비튼다. 이 작품으로 샘 셰퍼드는 1979년 오비상(Obie Awards)과 퓰리처상을 동시에 받았다.
가정비극 속에서 불완전한 타인들의 근원적 불행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시작된다. 불행과 악행은 어김없이 유전되기 때문이다. 사실 분열된 가족 사이에 속수무책으로 방치된 아이의 미래만큼 차가운 비극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파묻힌 아이』는 샘 셰퍼드의 가정 3부작이라 불리는 『굶주린 층의 저주』(Curse of the Starving Class, 1977)와 한 가족의 붕괴를 통해 서부 시대의 종말을 이야기한 『트루 웨스트』(True West, 1980)를 이어주는 작품이다.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하는 서부에서 바스러지는 가족을 통해 아메리칸 드림은 혼합 교배종의 아이처럼 죽었다고 선언하는 것 같다. 더불어 샘 셰퍼드는 『파묻힌 아이』를 통해 아이의 원죄는 과거이자 미래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매장되었던 아이의 시신을 파헤치고, 죄악을 시인하는 순간 30년간 아무것도 자라지 않던 농장에 농작물이 자라는 장면을 통해 샘 셰퍼드는 후세에 아비의 죄는 대물림되지만, 그래도 구원의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는다.
연극 <파묻힌 아이>는 경기도극단에서 준비해 경기아트센터에서 2020년 상반기에 공연하기로 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한 차례 연기되었고, 오는 9월 15일부터 경기아트센터 소극장에서 공연한다. 42년 전 작품을 통해 희망이 필요한 시대에 어떤 울림과 메시지를 전할지 궁금하다. 객석이 울컥할 만큼 그리운 요즘, 하반기에는 부디 극장에서 배우들의 팔딱이는 호흡과 마주할 수 있게 되길 기대해 본다.
글·최재훈
영화평론가. 칼럼니스트.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며 등단하였다. 2019년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2018년 이봄영화제 프로그래머, 제3회 서울무용영화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객석, 문화플러스 서울 등 각종 매체에 영화와 공연예술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