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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평론가 최재훈 Sep 20. 2024

나의 어린 아빠, 해진 기억의 위안

영화 <애프터썬> 리뷰

<애프터썬> 포스터

추억은 지나가고 사라진 것들에 대한 기억이다. 그래서 추억의 뒷장에는 늘 어떤 상실이 적혀있다. 흘러간 시간, 놓쳐버린 사랑, 사라진 사람, 그리고 지금 보다 훨씬 어린 나는 모두 과거 속에 있다. 그리고 추억은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장르이기도 하다. ‘그대’보다는 ‘그때’, ‘그대의 나’보다는 ‘그때의 나’를 먼저 떠올린다. 우리가 정작 그리워하는 것은 그 시간, 가장 반짝였던 나 자신일 때가 많다. 그럼에도 모든 것을 떠나보낸 후 혼자 오롯이 남은 추억이라는 덩어리는 오늘의 나를 살게 하는, 애를 쓰지 않아도 내가 가질 수 있는 든든한 위안이기도 하다. 


2023년 개봉 후 지난 8월 재개봉한 작가 겸 감독 샬롯 웰스의 <애프터썬>은 1990년대 즈음 튀르키예에서 휴가를 보내는 아빠 캘럼(폴 매스칼)과 11살 딸 소피(프랭키 코리오)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추억을 이야기하는 영화다. 남매처럼 보일 정도로 캘럼은 무척 젊은 아빠다. 휴양지에서의 두 사람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들의 시간 속에 울적함과 불쑥 찾아오는 고뇌는 사라지지 않는다. 캘럼의 마음은 아주 어두운 호수 같이 어둡지만 소피를 위해 힘을 내어 노력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아빠가 나를 위해 너무 애를 쓰는 모습은 소피에게 상처가 된다. 


<애프터썬>은 늘 친밀한 것 같지만 적의를 드러내며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고야 마는 가족의 이야기를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함께 하자고 조르지만 함께 나가지 않는 노래 대회에서 소피는 쑥스럽고 창피하고 원망스럽게 혼자 노래를 한다. 마치 각자의 삶은 그렇게 혼자 버티는 거라고 말하는 것 같다.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하는 소녀의 날선 감정과 낯선 떨림, 그리고 가끔은 관능적인 호기심까지 담아내는 두 배우의 표정과 몸짓, 긴 한숨과 쉼표가 보이지 않는 더 많은 이야기를 관객들의 상상 속에 숨겨둔다.  


두 사람의 추억을 기록하고 회상에 빠지게 만드는 도구는 DV캠에 기록된 영상이다. 입자가 굵은 영상은 과거에 묻혔다고 생각했던 소피와 캘럼의 시간을 모니터 위로 다시 불러들인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시간이 화면이 되어 현재로 불쑥 솟아오른다. 성인이 된 소피가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기억과 상상 사이를 오가는 장면이 있는데 막연하고 아름답게 필터링된 과거의 이미지와 구체적이고 또렷한 기억, 그리고 기록된 영상은 꽤 큰 간극을 보인다. 


그래서인지 소피의 기억과 추억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아버지 캘럼은 하나의 주체가 아니라 대상처럼 보인다. 캘럼의 과거와 과거 속 현재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여백 때문에 <애프터썬>은 더욱 추억의 묵은 향기가 나는 영화가 된다. 소피는 아빠 캘럼에게 “같은 하늘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위안이 될 때가 있어.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해가 저 하늘 아래에 어쨌든 같이 있는 거잖아.”라고 한께 있는 지금, 그리고 그 기억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영화가 끝나고 나면 문득 화면에 담기지 않는 나의 어린 시절, 그 시절 나의 아빠를 떠올리게 된다. 나의 기억 속에 혹시나 내가 놓쳐버린 프레임은 없는지 자꾸 생각하게 된다. 팽팽하게 당겨진 끈에 묶여 그 구심점으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는 날선 현실 대신,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추억은 언제나 든든하다. 뭉클 피어오르는 추억과 아련함을 담아내는 튀르키예의 햇살이 아름답다. 사춘기 소녀의 정체성의 혼돈과 상실이라는 먹먹한 공기를 깔고 있지만 결핍과 비밀이라는 그늘에 가려 시들해져 버리는 다른 성장영화와 달리 소피는 끝내 지치거나 좌절하지 않은 채 씩씩하다. 


혼자 있어도 나를 환히 비추는 햇살처럼, 밤의 외로움에 숨어있는 내게도 찾아오는 달빛처럼 추억은 언제나 섬광처럼 불쑥 찾아온다. 어리고 어리석어서 월컹대던 성장의 시간. 태양은 뜨거웠지만 차가운 물속에 갇힌 것 같았던 그 시절조차 추억이라는 프레임에 담기면 일종의 빛이 된다.  <애프터썬>은 가장 따뜻했던 것 같지만 사실은 무척 차가웠던 마음의 기억을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퉁치지 않는다. 아프고 쓰렸지만, 그것도 너의 시간이라고 말하는 그 이야기가 제법 다정해서 위안이 된다. 


명대사 

우리가 같은 태양을 볼 수 있단 사실을 떠올려비록 같은 장소에 함께 있진 않더라도같이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애프터썬(2023)

•감독 : 샬롯 웰스

•출연 : 폴 메스칼(캘럼), 프랭키 코리오(소피)

•국내개봉일 : 2023.02.01. / 2024.08.28.(재개봉)

•관객수 : 6만6천명

•볼 수 있는 곳 : 넷플릭스, 티빙, 웨이브, 왓챠, U+모바일tv, 네이버시리즈온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을 수상하여 등단하였다.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으며 영화·문화예술 관련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나는 아팠고어른들은 나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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