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산수화 길의 수성동 계곡을 찾아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계단 밑에서 출구를 올려다보니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
좋은 날씨 덕에 등산복 차림의 많은 이들이 서둘러 내 앞을 지나친다.
덩달아 내 발걸음도 빨라진다.
좋은 날씨만으로도 오늘의 나들이는 본전은 뽑았다 싶을 정도로 쾌청한 날이다.
오늘은 친구와 얼마 전 약속한 인왕산 자락 서촌에 있는 '진경산수화 길'을 걷기로 한 날이다.
(https://brunch.co.kr/@cielbleu/329 참조)
'진경산수화 길'은 겸재 정선의 발자취를 따라 만들어진 인왕산 숲길과 서촌 일대의 길이 섞여 있는 테마길이다.
그중 윤동주 문학관에서 수성동 계곡에 이르는 숲길이 산책코스로 유명하다.
걸어가는 방향으로 찾아볼 명소들이 직선 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첫 방문객들은 시행착오를 겪기 쉽다.
물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는 '진경산수화 길'중 겸재 정선의 작품 '수성동'과 '인곡유거', '독서여가도'가 그려진 현장을 가보기로 했다.
먼저 다녀온 지인들이 지하철 출구를 나오면 버스를 타라고 했다.
잠시 버스 노선을 두고 친구와 생각해 본다.
시내버스를 타면 '윤동주 문학관'으로 가고 마을버스를 타면 '수성동 계곡'으로 간다.
'윤동주 문학관'과 '수성동 계곡'은 산책길의 끝과 끝이다.
걸어서 곧장 '수성동 계곡'으로 갈 수도 있다.
경복궁역 2번 출구로 나와 통인시장을 관통하면 20여분 정도 걸릴 거라는 친구의 설명이다.
마음이야 겸재 정선이 남긴 '수성동' 현장을 빨리 보고 싶지만 친구 말이 '윤동주 문학관'도 둘러보고 한옥으로 지어진 '청운 문학 도서관'도 들러 보자 한다.
그리고 그쪽에서 시작해야 가는 길 내내 내리막길이 될 거라고.
산자락이니 내리막 길이 훨씬 수월하리란 짧은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산길에 계속되는 내리막이 어디 있겠으며 거의 시작점에서 만난 안내판에 적힌 '수성동 계곡'까지 거의 3km라는 표지판을 본 순간 아차 하는 마음이 든다.
평지라면야 괜찮을 거리지만 가볍게 생각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계속되는 숲길을 걸으며 둘 다 말이 적어졌다.
그래도 연 녹색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저 멀리 간간이 보이는 남산 타워와 서울 시내 전경을 보면서 서울 도심에 이런 산책 길이 있다는 것에 뿌듯함을 느끼며 힘을 내 걷는다.
가는 길에 만나는 '청운 문학 도서관'의 한옥 지붕이 정겹고,
출렁다리 가온 다리도 건너보고,
돌거북이 샘물 터에서 잠시 휴식도 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수성동 계곡에 다와가고 있었다.
숲길을 빠져나오는가 싶더니 계곡에 간간히 앉아 있는 사람들이 보이고 많이 본 조그마한 돌다리 가 보인다.
'기린교(麒麟橋)'다.
생각보다 더 작은 다리다.
대가의 그림 속에 남은 다리라 기대를 너무 했나 보다.
작지만 기린교가 갖는 의미는 대단하다.
'기린'은 용과 말 사이에 태어난 동물로 모든 동물의 으뜸으로 치는 상상의 동물이란다.
우리가 아는 목이 긴 기린이 아니다.
뛰어난 인재를 '기린아(麒麟兒)'라고 부르는 것도 이런 어원에서 유래한 것으로 위대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다리라는 뜻이란다.
그림을 봤으니 한눈에 알아봤지 그냥 왔다면 무심코 지나치기 딱 알맞은 작은 돌다리다.
인왕산 일대 개발로 이곳엔 아파트가 지어졌다가 정선의 그림을 보고 다시 복원시킨 것이 오늘의 수성동 계곡이라고 나의 도슨트(?) 친구는 설명한다.
아파트 조성으로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져 있던 다리는 다시 원위치인 이 계곡으로 돌아와 정선의 그림 속 모습대로 놓여진 거라고.
인왕산 자락 고즈넉한 숲 속에 아름답게 놓여 있으리라 생각한 다리는 기대했던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정선의 그림임을 설명하는 안내판과 함께 철제 울타리로 보호받고 있는 기린교다.
다리도 있고 계곡 물을 즐기는 사람들도 보이니 '그래. 여기가 그 자리가 맞구나. 300년이 흘렀는데 그대로 일리가 없겠지.' 하면서도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든다.
수성동 계곡에는 어찌 알고 찾아왔는지 외국 방문객들도 심심찮게 보이는데 기린교 앞에서 열심히 인증샷을 찍는 그들을 보는 마음이 뿌듯하다.
친구가 '겸재 정선 전'에서 '내연산 삼용추' 그림을 보고서 정선의 그림 솜씨에 감탄했었다는 이야기가 다시 생각난다.
그림에 큰 감동을 받아 실제로 내연산을 찾았었다는 친구.
실제 삼용추를 보고서야 그림이 주는 감동에 정선이 대가임을 다시 생각했다는 이야기 말이다.
그런데 반가운 마음도 잠시 바로 앞에 정차되어 있는 여러 대의 마을버스들이 보인다.
마을버스 종점이 바로 정선의 그림 속 '수성동' 계곡 입구였다.
머리 쓴다고 내리막길의 유혹에 빠져 1시간여의 산길을 걸었구나 생각하니 갑자기 다리의 힘이 주욱 빠지는 듯하다.
물론 그 덕에 말로만 듣던 인왕산 호랑이에 대한 안내판도 보았으니 산의 정기를 듬뿍 받는 산책이 되었을 것이라 믿어 본다.
가장 보고 싶었던 '수성동' 현장을 찾아봤으니 다음으로 찾을 곳은 정선이 말년을 보낸 자신의 집을 그린 '인곡유거' 현장이다.
안내판의 지도를 보고 찾아간 곳은 가히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장소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인곡유거'는 안내 지도에 '터'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찾아간 곳에는 현재 군인 아파트가 세워져 있었다.
아파트 안 어린이 놀이터 옆에 '인곡유거 터'라는 설명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초가 대문 대신엔 출입차단기가 세워져 있고 마당 안의 수양버들과 오동나무 대신엔 복잡한 전선줄과 은행나무 가로수가 시야를 막고 있었다.
거기서 바라본 인왕산은 작품 속 모습과는 달리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꼬마들은 지금 그들이 있는 이곳이 300년 전 시대를 대표하던 대 화가가 말년을 보내던 곳이란 걸 알고 있을까?
더 이상 '인곡유거(인왕산 계곡의 마을에서 떨어진 외진 곳에 있는 집)'가 아닌 '인곡유거 터'다.
'인곡유거' 안내판에는 정선의 '수성구지' 작품도 같이 설명되어 있는데 '수성구지'는 과거 궁에서 퇴궐한 후궁들의 거처인 자수궁터가 있었던 곳으로 이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은 정선의 흔치 않은 인물화인 '독서여가도'가 그려진 현장이다.
'독서여가도'가 그려진 곳은 정선의 생가로 현재 경복 고등학교 교내로 추정된다.
교정 안 커다란 바위에 동으로 부조 형태로 만들어진 작품 속에 '독서여가도'가 고스란히 들어가 있었다.
정선은 매일 그 앞을 지나다닐 학생들의 등하교길을 툇마루에 걸터앉아 여유롭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이번 '진경산수화 길' 산책은 시대를 대표하는 훌륭한 화가를 전시장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생애를 생각하며 그의 작품들을 하나씩 따라가 현장을 직접 보는 재미가 있는 나들이었다.
시작점이나 곳곳에 안내소가 있어 필요한 지도도 볼 수 있고 안내도 받을 수 있었다면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고흐의 자취를 찾아 프랑스 남부의 아를(Arles)을 여행했을 때 고흐의 동선을 따라가도록 보도블럭에 이젤을 멘 고흐의 형상을 새긴 동판을 설치해 놓아 안내 지도 한 장 들고 고흐 그림의 현장을 찾아보는 투어를 했던 기억이 난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만큼 그의 발자취를 좀 더 다듬고 정리해 우리에게 걸맞은 스토리텔링을 만들어 낸다면 더 큰 이야기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전시회에서 받은 감동이 커 큰 기대를 갖고 방문한 진경산수화 길.
푸른 숲사이 난 길을 힘들게(?) 오르내리며 자연도 만끽하고 대가의 발자취도 확인해 본 흥미 있는 탐방이었다.
산책을 마무리하고 서촌 입구의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들어오니 잠시 시간여행을 다녀온 듯하다.
보고 싶은 것을 보았고,
귀한 작품 속 배경이 된 실제 현장도 찾아보고 돌아오는 길.
변함없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선의 자취를 조금이나마 공감해 보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