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의 탄생과 몰락: 사무엘상
안녕하세요, 말씀 여행자 여러분! 룻기의 따뜻한 이야기를 뒤로하고 사무엘상을 펼치면, 우리는 이스라엘 역사의 대전환점을 목격하게 돼요. 사사 시대가 끝나고 왕정이 시작되는 격동의 시기죠.
사무엘, 사울, 다윗... 세 사람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펼쳐지는 드라마 속에는 영적 세계에 관한 이야기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의문들, 고대 풍습들이 등장해요. 오늘은 사무엘상에서 가장 헷갈리는 질문들을 시원하게 함께 나눠보아요!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께 무서운 메시지를 들었어요.
엘리의 집안에 대한 심판 선언이었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너무나 악했고, 엘리가 그들을 제대로 책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사무엘이 떨면서 엘리에게 이 메시지를 전했을 때, 엘리가 뭐라고 했을까요?
그는 여호와시니 선하게 여기시는 대로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삼상 3:18)
이게 뭐가 문제예요? 겸손하고 순종적인 반응 아닌가요?
겉으로는 경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문제가 있어요.
우선 회개가 없어요.
엘리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용서해 주세요" 용서를 구하지 않아요. 잘못을 알지 못하니 용서를 구하지 못하는 게 당연!
"아들들을 바로잡겠습니다" 훈계하고 바른 길로 돌이키겠다는 노력이 없어요.
그냥 "하나님 하시는 대로~" 하며 체념했어요. 이건 순종이 아니라 무기력이에요.
책임을 회피했어요.
엘리는 대제사장이었어요! 그의 직분은 백성을 가르치고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의무였지요.
하지만 그는 아들들이 제물을 강탈하고(삼상 2:13-17), 성전에서 여자들과 동침하는데도(삼상 2:22) 제대로 막지 않았어요.
"너희 아버지의 집을 내 아들들보다 더 중히 여기느냐?"(삼상 2:29)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식을 택했어요.
그리고 이건 믿음이 아니라 운명론적 태도였어요.
"하나님이 하실 거니까 뭐... 내가 할 건 없네" 이건 진짜 신앙이 아니에요.
진짜 신앙은 하나님의 경고를 듣고 → 회개하고 → 변화를 구하는 거예요!
니느웨 같은 이방 나라도 요나를 통해 하나님이 심판을 선포하자, 왕부터 백성까지 회개했고, 그 변화를 보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어요.(욘 3:10)
엘리도 그랬어야 했어요. 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그리고 이건 반복되는 패턴이었어요.
엘리의 이런 태도는 이번이 처음 한 번이 아니었어요.
아들들이 악한 짓을 한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너희 소문이 좋지 않구나" 하고 가볍게 책망했어요. (삼상 2:23-24) 그래도 아들들은 계속 악행을 멈추지 않았고, 그대로 방치했어요. 그러다 하나님의 경고를 들었음에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 하실 대로 하시겠지~" 이렇게 수수방관한 거예요.
그 결과는 무엇이었을까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들들 둘 다 죽고, 법궤는 빼앗기고, 엘리 자신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었어요(삼상 4:18). 너무나 비참한 결말이죠.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들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고,
직분을 충실히 수행하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바로잡겠습니다.
아들들을 파면하고,
성전을 정화하겠습니다.
제게 회개할 기회를 주세요!"
이렇게 반응했어야 했어요.
"하나님 뜻대로 하실 거야~"라는 말이 회개와 변화 없는 체념이 되면 안 돼요.
겉보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는 듯해 보이지만, 자신의 책임을 모두 하나님에게 떠넘기는 속내랍니다.
약속 시간에 늦어놓고 "인샬라(Inshallah: 신의 뜻이야)"라고 말하는 무슬림 친구.
물론 이 문화가 처음에는 '인간은 신의 뜻 가운데 살게 되니, 이 세상 너무 팍팍하게 나만 생각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자!'는 순기능의 개념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는 책임을 회피하는 변명으로 모호하게 사용되고 있죠. 엘리 제사장처럼요.
진짜 믿음은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랍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빼앗아 그들이 믿고 있는 다곤 신전에 갖다 놓았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 다곤 신상이 얼굴을 땅에 대고 넘어져 있었어요.
다시 세워놓았죠.
또 다음날, 다곤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려서 문지방에 있었어요.
그러므로 다곤의 제사장들이나 다곤의 신전에 들어가는 자는 오늘까지 아스돗에 있는 다곤의 문지방을 밟지 아니하더라 (삼상 5:5)
이게 한국의 문지방 안 밟는 미신이랑 연결되나요?
다곤 신전의 문지방은 이 특정 사건에 대한 반응이에요.
다곤 신의 머리와 손이 문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경외심으로 그 문지방을 밟지 않기로 한 거죠.
한국의 문지방 미신은 오래된 민속 신앙이에요.
샤머니즘적 기원으로 모든 문지방에 가신(家神)이 산다고 믿었대요.
문지방은 안과 밖의 경계이자, 영적으로 중요한 공간이라 밟으면 가신이 노해서 집안에 불행이 온다는 미신에서 생겨났어요.
왜 이런 미신이 생겨났을까 추측해 보면 옛날 한옥의 문지방은 높고 약했어요. 아이들 걸려 넘어질 수도 있고, 밟으면 부러질 수 있었죠. 그래서 그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실용적 이유 때문이라고도 해요.
그래서 한국의 “문지방 밟으면 복 나간다, 재수 없다”는 속담이 다곤 신전에서 직접 온 금기 전통이라고 보기는 어려워요. 다만 “경계(문턱)를 신성하게 여기고 조심한다”는 패턴은 고대 가나안·이스라엘 주변 문화에도 있었고, 인간의 보편적인 종교 감각이 비슷하게 나타나는 정도라고 이해하면 좋겠어요.
블레셋의 신 다곤도, 한국의 가신도 아무 힘없는 우상일 뿐이죠!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 때문에 재앙(독한 종기)을 겪고 있었어요. 제사장들과 점쟁이들이 모여서 "이게 우연이야, 아니면 이스라엘 하나님이 하신 거야?" 논쟁했죠.
그들의 실험 방법은 이랬어요.
새끼 딸린 암소 두 마리를 법궤 수레에 매고
그 송아지들은 집에 가둬놓고
소들이 이스라엘 벳세메스로 가면, 하나님이 하신 일!
소들이 송아지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우연!
결과는, 그 소들이 울면서 벳세메스를 향해 곧장 나아갔고 길에서 벗어나지 않았어요. (삼상 6:12)
왜 이게 하나님이 하신 증거가 될까요?
이건 엄마 소의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이었어요!
일반적인 경우라면, 새끼 낳은 엄마 소는 새끼한테 가려고 필사적이에요.
누가 강제로 끌어도 저항해요.
낯선 곳으로 가는 건 절대 안 해요.
그런데, 이 엄마 소들은 벳세메스로 직진했어요.
송아지들은 집에 갇혀 있는데도요. (반대 방향!)
그런데 소들이 울면서도 (송아지 그리워하면서도)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갔어요.
이건 자연스러운 행동이 아니에요!
블레셋 사람들의 상황도 모르는 동물이 본능을 거스르는 행동을 한 건 하나님의 직접적 개입이라고 봤어요.
그래서 그들은 "이건 우연이 아니야. 이스라엘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셔!"라고 고백했어요.
자동차가 GPS도 없이, 운전자도 없이, 알아서 정확한 목적지로 갔다면? 이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죠!
소들이 본능을 거스르고 정확히 이스라엘로 넘어간 것, 이건 하나님의 손길이었어요.
드디어 법궤가 이스라엘 벳세메스로 돌아왔어요! 사람들이 기뻐하며 법궤를 맞이했죠.
그런데...
여호와께서 벳세메스 사람들을 치셨으니...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삼상 6:19)
왜요? 법궤가 돌아온 게 좋은 일 아니었어요?
그들이 뭘 잘못했냐면...
"법궤 안을 들여다봤기 때문"이에요.
그들은 잠시라도 들어가서 성소를 보아서는 안 되나니 죽을까 하노라 (민수기 4:20)
법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
만나 담은 항아리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어요.
이건 지성소의 물건이에요. 대제사장만 1년에 1번, 속죄일에만 볼 수 있었어요.
벳세메스 사람들은 "와, 법궤다! 안에 뭐가 있는지 볼까?" 호기심으로 봤을 수 있어요. 아니 법궤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면 "법궤에 있을 물건들이 다 있나? 빠진 건 없나?" 챙겨 본 걸 수도 있겠지요.
호기심이라면 하나님의 거룩함을 가볍게 여긴 셈이에요.
백배 양보해서 챙겨보는 좋은 의도였다고 해도 법궤는 제사장도 아닌 평민들이 함부로 만지고 열어볼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었어요. 무지했던 거죠.
그렇다고 이렇게 가혹하게?
50,070명이든 70명이든 이게 죽을죄인가요?
몰랐는대요?
이 부분이 중요해요!!
이스라엘은 40년간 블레셋에게 법궤를 빼앗겼어요. 그동안 하나님의 거룩함을 잊었죠.
블레셋 사람들도 법궤를 함부로 다뤘다가 재앙을 받았어요(종기).
그 이방인들도 법궤를 두려워하게 됐죠.
그런데 정작 하나님의 백성이 법궤를 더 함부로 대했어요!
하나님은 "내 거룩함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주신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거룩함을 교육하시는 중이었어요.
('거룩함'이 '세상과 다름'이라는 건 앞에서 이미 말씀드렸죠?)
"누가 능히 이 거룩하신 여호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으랴?" (삼상 6:20)
나중에 다윗 시대에 웃사도 법궤를 만졌다가 즉사했어요.(삼하 6:6-7).
이유는요?
법궤가 기울어서 떨어질까 봐 손으로 잡았기 때문이었어요.
법궤를 보호하려는 동기는 좋았지만, 방법이 잘못됐어요.
법궤는 레위인이 채로 메야했거든요(민 4:15).
현대에 적용해 볼까요?
법이 있는데, 그 법에 대해 모르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법을 어겨도 괜찮은 건 아니지요.
그리고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고(좋은 동기) 도둑질(잘못된 방법)을 했다고 해서 무죄를 선언해 줄 판사는 없을 거예요.
사무엘상 15장은 정말 헷갈리는 장이에요.
내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노니...(삼상 15:11)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후회가 없으시니라(삼상 15:29)
"뭐야, 후회하시는 거야 안 하시는 거야?"
두 가지 다 맞아요!
히브리어 단어가 달라요.
11절 "나캄" (nacham)은 "슬퍼하다, 유감스러워하다, 마음이 아프다"는 뜻이고요.
29절은 "샤카르" (shaqar - 거짓말하다) "하나님은 거짓말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아니라서 변덕스럽게 마음을 바꾸지 않으신다"는 뜻이에요.
"나캄"의 '후회'는 인간의 선택에 대해 슬프고 아픈 감정적 반응을 표현하는 말이고요.
"네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지만, 그래도 슬프다"
"샤카르 하지 않다"의 '후회가 없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은 변하지 않음을 말해요.
"내 기준은 변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부모님이 자녀에게 "너, 공부 안 하면 휴대폰 압수할 거야"라고 했어요.
그런데 자녀가 공부 안 하면 부모님은 휴대폰을 압수해야 하잖아요.
그때 부모님의 마음이 꼭 이럴 거예요.
"내가 압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니 슬프다" (나캄)
하지만 "내가 한 말은 바꾸지 않는다. 원칙이니까" (샤카르 안 함)
사울이 불순종하니까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걸 슬퍼하셨어요.
그렇다고 "불순종하면 왕위를 빼앗는다"는 원칙을 바꾸지는 않셨어요.
성경에서 또 다른 예를 찾아볼까요?
1) 사람 만드신 것을 후회하셨어요. (창 6:6) → 인간의 죄 때문에 마음이 아프셨다는 뜻이에요.
2) 재앙 내리기로 하셨다가 뜻을 돌이키셨어요. (출 32:14, 욘 3:10)
어? 하나님이 맘 바꾸셨네요?
하나님의 조건부 약속은 인간의 반응에 따라 달라져요.
"회개하면 용서" → 회개 안 하면 심판
"불순종하면 심판" → 회개하면 용서
단, 이건 절대 안 바뀌어요!
사랑, 공의, 자비, 거룩함 같은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무조건적 약속 (아브라함 언약, 다윗 언약, 메시아 보내실 약속)
히스기야의 경우도 맘을 바꾸셨어요. (이사야 38장)
"너는 죽을 것이다"라고 하셨다가 히스기야가 통곡하며 기도하니까 "15년 더 살게 해주겠다"고 하셨잖아요.
이게 변덕일까요?
하나님의 원칙은 "겸손히 구하면 은혜를 베푼다!!!"
이 원칙은 한 번도 안 바뀌었어요!
좀 복잡한가요?
총정리해 볼게요.
하나님의 감정은 우리 행동에 반응해요. (기뻐하심, 슬퍼하심)
하나님의 성품과 원칙은 절대 불변이에요!
조건부 약속은 우리 반응에 따라 결과가 달라져요.
무조건적 약속은 절대 안 바뀌어요!
여호와의 영은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그를 번뇌하게 하였으므로 (삼상 16:14)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이 부분,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에요.
먼저, "악령"(루아흐 라아)이 뭘까요?
히브리어 "루아흐 라아"는 evil spirit 또는 distressing spirit으로 가능한 의미는 이래요.
1) 악마/귀신
2) 정신적 고통을 주는 영
3) 심리적 질병 (우울증, 조울증)
그럼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은 뭘 의미할까요?
첫째, 하나님이 허락하신 악령이라고 해석할 수 있어요.
사울이 불순종했어요
하나님의 영이 떠났어요
영적 보호막이 사라지자
악령이 들어올 틈이 생겼어요.
욥기 1-2장처럼 사탄이 욥을 치려 할 때 하나님의 허락 아래에서만 가능했어요.
둘째, 하나님의 심판으로 오는 정신적 고통으로 해석할 수 있어요.
극심한 우울증
피해망상
분노 조절 장애
살인 충동
이런 증상이 하나님이 떠나신 결과로 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악령"이란 실제 귀신이 아니라 심리적 증상이라는 견해예요.
셋째, 하나님의 주권적 허용을 말해요.
고대 히브리 세계관에서 하나님은 유일한 주권자이시고, 모든 일이 하나님의 허락 아래 일어나요.
그러니까 직접 하시지 않아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표기하는 히브리어 표현 방식이에요.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출 9:12)는 대목도 실제로는 바로 스스로 강퍅해졌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일어날 수 없기에 "하나님이 강퍅하게 하셨다"고 표현했어요.
그럼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사울에 대한 심판이었어요.
제사를 멋대로 드렸고 (삼상 13장)
아말렉을 완전히 멸하라는 명령을 어겼고 (삼상 15장)
자기 고집과 교만을 선택했어요
하나님의 가장 큰 심판은 하나님이 떠나시는 거예요.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며(시편 51:11)
그래서 다윗도 이걸 가장 두려워했어요.
이 이야기를 현대의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의 영이 떠나면 위험해요!
영적 보호가 사라지면 온갖 문제가 들어올 수 있어요.
2) 불순종의 결과는 무서워요!
사울처럼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이 손을 떼실 수 있어요.
3) 정신 건강도 영적 상태와 연결돼요!
모든 정신 질환이 영적 문제는 아니지만, 영적 건강이 정신 건강에 영향을 줘요.
4) 회개하고 돌아와야 해요!
사울의 비극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은 것이에요.
사무엘상 28장은 성경에서 가장 오싹한 장면 중 하나예요.
사무엘이 죽자 사울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앞두고 극도로 불안해졌어요.
하나님께 물어도 응답이 없어요.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도.
급기야 사울은 사무엘을 영을 불러내려고 무당을 찾아가요.
"진짜 사무엘의 영혼이 온 거예요?"
신학자들 사이에 세 가지 견해가 있어요.
견해 1) 진짜 사무엘이었다 (전통적 견해)
성경이 "사무엘"이라고 명확히 말해요 (28:15, 16, 20)
무당도 놀랐어요 (평소엔 사기였는데, 이번엔 진짜가 나타나니까 기겁했어요.)
예언이 정확히 이뤄졌어요 (사울과 아들들이 다음날 죽음)
하지만 무당이 불러낸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사무엘을 보내신 거예요!
무당이 능력 있고 용해서가 아니라 사울에게 최종 심판 선고를 하시려고요.
하나님의 말씀을 확정하기 위해서 무당은 도구로 쓰였을 뿐, 진짜 일하신 건 하나님이셨어요.
견해 2) 귀신이 사무엘을 사칭했다 (개신교 일부)
죽은 자의 영혼은 하나님께 있어요 (전 12:7)
무당이 진짜로 죽은 자를 부를 수 없어요
사탄도 빛의 천사로 가장할 수 있어요 (고후 11:14)
악령이 사무엘처럼 보이게 했고, 예언은 우연히 맞거나, 악령도 어느 정도 미래를 예측할 수 있으니까요.
견해 3) 환상이나 환각이었다 (자유주의)
무당과 사울의 공동 환각이었다는 의견이에요.
"그럼 무당한테 가도 돼요?"
절대 안 돼요!
"신접한 자와 박수를 믿지 말며 그들을 추종하여 스스로 더럽히지 말라" (레위기 19:31)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술사나 무당이나 주술사나...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느니라" (신명기 18:10-12)
사울도 원래는 무당을 추방했었어요. (삼상 28:3)
그런데 궁지에 몰리고 절망하니까 자기가 금지한 것을 스스로 어긴 거예요.
사울은 시작은 화려했지만, 실패한 왕이에요. 사울을 통해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어요.
1) 하나님께 응답이 없다고 죽은 자와 교통하려는 영매술같은 시도는 금지예요!
무당이나 점쟁이 찾을 시간에 회개하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해요.
2) 영적 세계는 실재해요.
하지만 어떤 초자연적 현상이 있더라도 말씀과 복음에 비추어 분별해야 해요.
3)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해야 해요.
사울처럼 하나님 떠나면 삶은 비참한 결과만 남아요.
그렇네요.
비슷하게 요셉도 막내인데, 요셉은 집 근처에서 양을 치거나 형들과 함께 치게 했어요.(창 37:2)
멀리로는 형들을 보냈고요(창 37:13-14).
다윗의 경우는 혼자 멀리 나가서 양을 쳤어요(삼상 16:11, 17:15, 17:20).
왜 달랐을까요?
우선, 가족 안에서 관계가 달랐어요.
요셉은 야곱이 편애했어요. 특별히 따로 채색 옷 입힌 걸 보면 귀여운 막내로 보호받았어요.
그래서 형들과 함께 다니거나, 형들 감시하러(?) 보내거나 했죠.
다윗도 8남 중 막내이긴 하지만 귀염둥이 막내보다는 눈에 안 띄는 존재였어요.
이새가 사무엘에게 아들들 소개할 때 다윗은 빼먹었어요. (삼상 16:11)
또 다윗이 쓴 시편 51편, 69편, 27편 등에서 출생이 다른 형제들과 달리 비정상적일 가능성을 유추할 수 있어요. 서자이거나 이복 아들이거나 어쨌든 집안에서 소외됐을 가능성이 높아요.
다윗을 대하는 형들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어요.
군 복무 중인 형들에게 특식 도시락 전해주러 위험한 전쟁터에 갔는데, 그 막내를 보고 고마워하거나 위험한 곳에 와서 걱정하는 게 아니라 전쟁 구경 왔냐며 혼내잖아요(삼상 17:28).
하지만 이 모든 일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훈련의 과정이었어요.
다윗은 혼자 있으면서
1)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할 수 있었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라....(시편 23편)
외로운 광야에서 시편을 쓰고 수금을 타고 하나님과 깊은 시간을 보냈어요.
양을 치며 하나님을 목자로 경험했지요!
2) 용기의 훈련 시간이었어요.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삼상 17:34-36)
혼자 양을 치며 사자, 곰과 싸워야 했어요.
생사를 건 실전 경험 때문에 골리앗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죠!
3) 리더십의 준비 기간이었어요.
양 떼를 돌보는 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연습이었어요.
다윗은 나중에 선한 목자 왕이 되었어요!
4) 겸손의 학교였어요.
사랑받지도 못하고, 가정에서 무시당하고, 혼자 외롭게 양을 치며 다윗은 겸손을 배웠어요.
하나님은 교만한 사울 대신 겸손한 다윗을 택하셨어요.
5) 하나님의 타이밍을 기다린 시간이었어요.
요셉이 17세에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고 감옥에서 보낸 시간은 총리로 준비되는 시간이었어요. 30세가 되어야 총리가 될 수 있었거든요.
그처럼 다윗도 양치기 소년 시절, 기름부음 받았지만 곧바로 왕이 된 게 아니에요.
양치기에서 → 사울의 음악가 → 도망자 시절을 거쳐 → 왕이 되었어요.
둘 다 긴 준비 기간이 필요했어요!
우리에게 혼자 있는 시간이 낭비가 아니에요!
하나님은 우리를 광야로 부르셔서
하나님과 깊은 관계 맺게 하시고
성품을 다듬으시고
사명을 준비시키세요!
혹시 혼자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계세요?
그건 하나님이 독자님을 특별하게 준비시키시는 때일 수 있어요!
사무엘상을 여행하며 왕을 세우는 건 하나님임을 깨달아요.
사람들이 아니었어요.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를 택하셨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진짜 왕이시죠!"
사무엘상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누가 너의 왕인가? 사울(겉모습, 조건)인가, 다윗(속마음)인가?"
완벽하게 이해할 순 없어요.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지혜를 초월하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요.
하나님은 연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
양치는 막내 다윗이 왕이 되고, 그 다윗의 후손으로 만왕의 왕 예수님이 오셨어요!
이번 주도 진짜 왕이신 예수님을 따라 사는 멋진 한 주 되세요!
Pe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