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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o Feb 15. 2020

늑대, 성자 그리고 모두, '행복한 라짜로'

알리체 로르바허 (Lazzaro Felice, 2017)

*정말로 오랜만에 글을 올립니다. 개인적인 일로 너무 바빠서 브런치를 소홀히 했었네요. 일단은 조금이나마 써 두었던 작년 영화들에 대한 글을 먼저 올리려 합니다. '미드소마' 그리고 '미안해요, 리키'에 대한 글을 올리려 분주히 써내려가고 있습니다.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순수한 동화가 타락한 현실을 만날 때, 이는 가닿기 힘든 아스라한 꿈과도 같은 이야기가 된다. 알리체 로르바허의 신작 ‘행복한 라짜로’는 그렇기 때문에, 타락한 세상 속에서 순수한 환상을 꿈꾸는 것만 같은 처연한 감정을 선사한다. 아무리 보아도 동화에 가까운 비현실적인 플롯을 지닌 이야기이지만, 그 층위를 한 겹만 벗겨내면 어디서 보아도 현실에 깊숙히 뿌리내린 이야기가 된다. 이 영화를 수식하는 데 사용되곤 한 ‘마술적 네오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이야말로 이를 간결하게 보여준다 할 수 있겠다. 서정적인 정서를 통해 도식적인 상황을 풀어내는 데 능숙한 ‘행복한 라짜로’는, 동화와 현실을 기묘하게 섞어내는 지점에서 아이러니로 가득한 세상을 훌륭하게 환기한다.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성경 속 존재 나사로를 직접적으로 플롯에 차용한 데서부터 알 수 있듯, ‘행복한 라짜로’가 사용하고 있는 상징적인 작법이란 우화적인 요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은유의 방식이다. 극중 인물에 의해 읊조려지고, 인물들이 흉내낼 뿐더러 직접 등장하기까지 하는 것처럼, ‘행복한 라짜로’는 성자와 늑대의 이야기로 치환해서 바라볼 수 있다. 극 전체에서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라는 캐릭터가 마치 비현실적으로 부유하는 존재처럼 느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행복한 라짜로’의 핵심일 것이다. 일종의 초월적 존재로 여겨지는 라짜로가 시간을 넘어 극 후반부에 마주한 현실의 벽은, 그래서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기묘한 통찰을 담아내고 있다. ‘행복한 라짜로(Lazzaro Felice)’라는 제목의 이 영화는 라짜로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라짜로의 행복을 가로막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에 더 가까워보이지만, 종국에는 마치 동화처럼 어렴풋한 희망을 품어낸다.


*


인비올라타Inviolata.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외딴 마을 인비올라타에는 하루하루 고된 노동으로 살아가는 주민들이 있다. 그리고 주인공 라짜로는 첫 등장부터 ‘마을에서 가장 부지런하고 일 잘 하는’ 인물로 소개된다. 사람들은 라짜로를 쉴 새 없이 불러대며 그의 도움을 바라지만, 라짜로는 불평이라고는 없이 묵묵히 제 할 일을 해낸다. 영화는 소작농들이 서로의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으로 시작되지만, 함께하게 된 소작농들이 마을을 떠날 의사를 밝히자 마을 사람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인다. 그 이유가 궁금해질 무렵, 정기적으로 마을 사람들의 작업을 독촉하는 니콜라(안토니오 살리네스)가 마을을 찾아오고, 이윽고 실질적인 주민들의 지배자 마르체자(니콜레타 브라시) 그리고 그 아들 탄크레디(루카 치코바니)가 인비올라타를 방문한다.


마을을 방문한 탄크레디에게 선의로 커피를 대접하던 라짜로는, 이유없는 반항을 꿈꾸는 탄크레디의 치기어린 유괴 자작극에 휘말린다. 거짓으로 꾸며낸 몸값 편지에 핏자국을 대신 찍어주거나 ‘무기(라고 명명된 새총)’를 선물하는 등, (라짜로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느새 가까워진 그들은 형제애를 나눈다. 한편 유괴 자작극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전화를 걸어 긴박한 상황을 꾸며내려던 탄크레디의 계획과 달리 탄크레디의 실종은 경찰에 알려지고, 인비올라타를 방문한 경찰들에 의해서 이 마을은 고용주에 의한 착취로 꾸려져가던 마을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 와중에 열병에 걸린 상태로 탄크레디에게 향하던 라짜로는 순간 발을 헛디뎌 절벽에서 떨어지고 만다. 이야기의 중요한 변곡점이 되는 이 두 사건은 병렬적으로 묘사되는데, 마을의 정체가 탄로난 뒤 마을 사람들이 인비올라타를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행복한 라짜로’는 영화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동시에 안토니아(아녜세 그라치아니)의 나레이션으로 일종의 막간을 대신한다.


그 나레이션 속에서 안토니아가 성자와 늑대의 이야기를 읊조리자, 비로소 ‘행복한 라짜로’의 맥락이 짚이기 시작한다. 떠올려보면, 극중 라짜로는 마치 늑대와도 같이 묘사된 적이 있었다. 탄크레디가 절벽에 서서 늑대 흉내를 낼 때, 라짜로는 그 옆에서 탄크레디를 그대로 따라하며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소리를 실제 늑대의 울음소리로 착각한다.) 안토니아가 읊조리는 이야기의 초반에 늑대는 늙고 병들어 마을을 약탈하는 존재로, 그리고 성자는 그런 늑대를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 그려지지만, 이러한 이야기의 맥은 인비올라타를 방문한 경찰이 마을 주민들을 구출하는 장면 직후에는 사라진 성자를 찾아다니는 늑대의 이야기로 변주된다. 그리고 곧바로 영화 속에 실제 늑대가 등장한다. 산 속의 풀숲을 배회하던 늑대가 추락한 라짜로를 발견하자, 라짜로는 그 순간 시간을 뛰어넘어 예전 모습 그대로 다시 부활한다. 라짜로는 늑대가 있었기에 성자가 될 수 있었고, 늑대와 성자의 이야기를 그렇게 변주한 것은 (그러니까 라짜로를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안토니아였다.


*


도시Città.


‘행복한 라짜로’의 후반부에서, 부활한 라짜로는 탄크레디를 찾아 이제는 아무도 살지 않아 버려진 인비올라타로 돌아가고 빈 대저택을 털러 온 도둑 일행과 맞닥뜨린다. 엉겁결에 이들을 따라가게 된 라짜로는, 이제는 어른이 된 안토니아(알바 로르바허)와 재회하게 된다. 이미 성인이 된 안토니아는 나이를 전혀 먹지 않은 라짜로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한다. 인비올라타를 떠나고도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마을 사람들의 사정은 전혀 나아진 것 같지 않아 보인다. 여전히 생활고에 시달리는 예전 인비올라타의 주민들은 도시의 삭막한 풍경을 벗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도시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여서, 심지어 라짜로가 도시에 도착해 처음 찾아간 직업경매소에서, 사람들은 본인의 임금을 낮춰가며 고군분투하고 있다.) 기찻길 한 켠에 마련한 거처에서, 한때 인비올라타에서 착취당하던 이들은 좀도둑질 혹은 장물 사기를 통해 간신히 생활을 이어간다.


그건 얼핏 인비올라타의 지배층으로 묘사되었던 이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여서, 탄크레디는 몰락한 귀족과도 같은 생활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고, 니콜라는 직업 경매소에서 인물들을 통솔하는 역할을 맡기에 급급하다. 라짜로가 나이를 먹은 탄크레디(토마소 라뇨)를 만난 것을 계기로 탄크레디는 안토니아 일행이 머물고 있는 곳을 방문한다.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라짜로와 탄크레디가 늑대 흉내를 내자, 그 순간 그 공간에 있던 인물들이 인비올라타에 살던 시점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마법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시간을 거슬러 인비올라타에서의 (착취당하는 것을 모른 채 그저 순박했던) 순간들이 살아나는가 싶었던 것도 잠시, 영화는 곧바로 현실에 맞닥뜨린다. 이야기 속의 성자 라짜로는 시간을 뛰어넘어 예전 모습 그대로 부활할 수 있었지만, (안토니아를 비롯한 인물들이 성자 라짜로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는 없었다. 전등이 점멸하고, 잠시 옛 모습의 추억에 박제되는가 싶던 인비올라타의 인물들은 차가운 도시의 현실로 돌아온다.


이윽고 탄크레디에게 초대받은 안토니아 일행은 소위 탄크레디의 저택을 방문하지만, 그들이 맞닥뜨린 것은 생활고에 시달리는 초췌한 모습 뿐이었다. 그날 밤 안토니아 일행으로부터 이탈한 라짜로는 달을 보며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은 영화의 첫 장면 닭장을 지키던 라짜로의 모습과 대비되며 서글픈 감정을 자아낸다. 어쩌면 라짜로는 오히려 (탄크레디 그리고 그의 가족이 지배하던) 인비올라타에서의 삶이 행복했다고 생각했던 걸까. 그래서인지 라짜로는 다음 날 은행을 찾아간다. 귀족이 지배하던 인비올라타 사회와 정확히 대치되는 도시의 은행이라는 장소는, 자본이 지배하는 현대 도시의 사회를 포괄적으로 은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은행 안 사람들은 라짜로의 순수함을 오해하고 (탄크레디가 선물한 새총을 무기로만 알고 있던) 라짜로를 구타하기 시작한다. 결국 쓰러진 라짜로 곁에, 다시 한 번 늑대가 등장한다. 늑대는 라짜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대로 은행을 빠져나가 도로를 달리기 시작한다. 늑대는 떠나고 라짜로만이 은행에 남겨진다. 영화의 막간, 인비올라타에서 절벽으로부터 떨어진 라짜로는 늑대가 그를 찾아낸 순간 부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 도시의 은행에서는 늑대가 라짜로를 찾아냈음에도 그는 부활할 수 없을 것 같다. (은행의 누군가가 라짜로의 맥박을 짚지만, 그는 마치 죽은 것처럼 고요하다.) 시간을 뛰어넘어 부활한 성자 라짜로마저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공고한 체제의 잔인함이야말로, ‘행복한 라짜로’라는 아이러니한 영화의 제목을 떠받치고 있는 무게에 다름없다.


*


그러니까 인비올라타에서도 도시에서도,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인비올라타에서의 행복 역시, 굳이 말하자면 무지에서 기인한 상대적인 성질의 행복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행복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이상에 대한 아스라한 희망이다. 다시 성자와 늑대의 도식으로 돌아가보자. 흥미롭게도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포장된 도로를 달리고 있는 늑대를 비추는 쇼트이다. 앞서 안토니아가 읊조린 이야기 속에서, 사실 늑대는 악한 존재로만 묘사되지는 않았다. 변주된 이야기 속에서 늙고 병든 늑대의 역할이 있다면, 추위에 지쳐 쓰러진 성자를 찾아내 그를 부활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성자 라짜로는 인비올라타에서는 동화처럼 시간을 초월해 부활했지만, 도시에서는 현실의 벽을 결국 넘지 못한다. (영화의 마지막, 늑대의 힘으로도 부활하지 못한 라짜로라는 성자는 눈을 뜬 채 그의 역할을 마무리한다.) 앞서 라짜로가 부활한 직후 영화는 (늑대가 아닌) 라짜로만을 비추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라짜로 대신) 늑대를 따라간다. 라짜로가 늑대 흉내를 냈던 것과 연결지어보면, 마치 선한 성자의 역할을 늑대가 이어받는 것처럼 보인다. 엔딩 크레딧에서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는 ‘달려라 라짜로Lazzaro Corri’이지만, 달리고 있는 것은 라짜로가 아닌 늑대였다. 모두가 함께 부르는 노래를 통해서, 이 영화는 성자와 늑대를 결국 동치한다.



그렇다면 마지막 모두의 노래에 담겨있는 것은 작은 희망이어야 할 것이다. 결국 ‘행복한 라짜로’는 성자와 늑대의 이야기이지만, 그들 외에도 이 영화 속에는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영화 초반, 탄크레디가 마을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마을 사람들은 갑작스런 바람을 일으키는 힘이 있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영화 후반, 성당을 찾은 라짜로가 떠나자 음악 역시 라짜로를 따라 떠나는 것 같았지만, 이때 라짜로는 안토니아 일행과 함께였다. 그들에게는 바람을 일으킬 힘이 있고 음악을 가져올 힘이 있다. ‘행복한 라짜로’에 어렴풋한 긍정의 구절이 있다면, 그건 늑대 그리고 성자를 넘어선 모든 사람들의 힘을 믿을 수 있다는 아스라한 희망이다. 인비올라타에서도, 도시에서도 현실은 가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랫말 속에 이 아스라한 희망을 간절히 품고, 늑대는, 그리고 성자 라짜로는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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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라짜로 / Happy as Lazzaro (Lazzaro Felice, 2017)

dir. 알리체 로르바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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