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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inejwk Apr 06. 2019

애정결핍 남자의 판타지

<버팔로'66> 1998.

버팔로' 66 Buffalo' 66

감독     빈센트 갈로

출연     빈센트 갈로, 크리스티나 리치



잔뜩 흐린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날리고, 삭막한 잿빛의 교도소에서 한 남자(빈센트 갈로)가 나온다. 이제 막 출소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에겐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누구도 없는 것일까? 한껏 몸을 움츠린 채 홀로 버스를 기다리던 남자는 갑자기 교도소 입구를 향해 걸어간다. 화장실을 좀 쓰고 싶다는 그의 부탁을, 간수는 날씨만큼이나 차가운 얼굴로, 단호하게 거절한다.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 없어 보이는데, 어느 벽에라도 돌아서서 노상방뇨를 한다고 해서 체포될 것 같지도 않는데, 남자는 참는다. 버스를 타고 시내 터미널에 도착해 화장실로 급히 뛰어가는 남자. 하지만 그의 인내를 조롱이라도 하듯 화장실은 청소 중이라는 이유로 막혀있고, 화장실을 찾아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남자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하다. 


소변 한 번 보는 일마저 만만치 않은 이 남자의 이름은 빌리 브라운이다. 5년 전, 1만 달러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그 빚을 청산하는 조건으로 다른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쓰고 지난 5년을 감옥에서 보낸 그는 출소한 첫 날, 자신이 내기에 질 수밖에 없게끔 원인 제공을 한 전직 풋볼 선수 스콧 우즈를 찾아가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을 계획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전에 부모를 만나 자신의 안녕을 알려야 한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외국에서 일을 하고 있으며 웬디라는 여자와 결혼도 했다고 거짓말을 해 놓은 상태다. 


빌리는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건물에서 탭댄스 수업을 받고 나오던 라일라(크리스티나 리치)를 납치한다. 그리고 오늘 하루 자신의 아내가 되어 줄 것을 협박한다. 그가 험악한 말로 협박을 하기는 했지만 그의 협박은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고, 그녀에겐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음에도, 그녀는 빌리의 말도 안 되는 요구에 순순히 응한다.


“나를 사랑하고, 아끼고, 존경하는 연기를 하면 돼. 내가 없으면 못 살 것처럼 말이야.”


수년 동안 아들을 보지 못했음에도 빌리의 부모는 과연 친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시큰둥하게 아들을 맞이한다. 풋볼 팀 버팔로 빌스의 광팬인 엄마(안젤리카 휴스턴)는 아들에게 초콜릿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모를 만큼 아들에게 무심하고, 버팔로의 마지막 우승이 하필 빌리가 태어나던 날이었다며 차라리 빌리를 낳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라고까지 (심지어 빌리의 면전에서) 말한다. 아빠(벤 가자라)는 무심을 넘어 아들에게 적대적이지만 처음 본 라일라에게는 아낌없는 애정과 관심을 표현하는데, 그 정도가 얼마나 과장되고 노골적인지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다. 

엄마, 아빠, 빌리, 라일라, 이들 네 명이 사각 테이블에 둘러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4개의 앵글로 담아 낸 시퀀스는 과연 이들이 같은 시공간에 있는 게 맞나 싶을 만큼 이질감이 든다. 4개의 다른 앵글에 담긴 4개의 벽면은 각기 다른 무대로서 전혀 다른 4개의 느낌을 전달하고, 함께 있음이 결코 함께 있음이 아님을, 빌리가 평생 동안 느껴왔을 외로움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자신에게 관심이 없는 부모에게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으로 대응하는 빌리. 그리고 그의 이런 태도는 라일라에게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빌리가 요구한대로 라일라는 그의 부인 역할을 완벽하게 연기한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똑똑하고 잘생긴 남자이고, 그런 그를 만나 얼마나 행복한지 모른다고. 하지만 빌리는 그녀가 모든 것을 망쳐버렸다며 오히려 화를 내는데, 그의 이런 신경질적인 태도가 실은 누군가의 사랑과 관심을 얼마나 갈구하는지에 대한 반증으로 보여 그가 더욱 안타깝다.

라일라는 빌리의 예민한 투정을 모두 받아준다. 그를 따라 볼링장에도 가고, 사진도 찍고, 카페에도 가고. 납치로 시작된 그와의 이상한 하루가 끝나갈 때 쯤 그녀는 진짜 사랑에 빠져버린다. 애정결핍에 대한 연민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 그가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그와의 인연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모텔 침대위에 나란히 누워 손을 잡는 두 사람의 모습은 그 어떤 애정 씬 보다 애틋하고 다정하다. 빌리는 엄마 뱃속의 태아처럼 몸을 웅크리고, 라일라는 그런 빌리를 감싸 안는다. 드디어 빌리에게도 사랑이 왔구나! 그가 이 사랑을 마음껏 누리기를 관객은 바라게 된다. 하지만 그는 권총을 들고 자신의 처음 계획대로 스콧 우즈를 찾아간다. 스트립 클럽에서 벌거벗은 여인들을 끌어안고 있는 전직 풋볼 선수의 살찌고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빌리는 자신의 죽음 후를 상상한다. 자신의 무덤 앞에서 툴툴거리는 아빠와 라디오로 풋볼 경기 중계를 듣고 있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때 빌리는 정신을 차리고 클럽을 빠져나가 도넛가게로 달려간다. 모텔 방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라일라를 생각하면서 상기된 얼굴로(영화가 시작되고 처음 보이는 미소다.) 여자 친구에게 줄 선물을 고르듯 도넛을 고른다. 


1966년 버팔로에서 태어난 빌리 브라운의 마지막 하루가 될 수도 있었던 하루는 이렇게 해피 엔딩으로 끝이 난다.

이 영화는 애정결핍에 걸린 남자의 판타지 드라마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빌리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 수 있지만 그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라일라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나이도, 직업도, 콤플렉스도, 욕망도, 이름 말고는(아! 탭댄스를 출줄 안다는 것도 빼고) 아무것도 모른다. 그녀는 마치 그가 평생을 원했던 사랑을 주러 온 천사처럼, 그가 끊임없이 그녀를 밀어내는데도 그녀는 지치지 않고 그에게 다가간다. 


1998년에 개봉한 이 영화는 199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영화 자체가 보여주는 스타일은 1960년대를 연상시킨다. 빌리가 태어나고, 버팔로 빌스가 마지막 우승을 거두었던 그 해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영화 속 텔레비전은 흑백텔레비전이고, 라일라의 화장과 의상 역시 60년대를 연상시킨다. 거친 필름의 질감, 강렬한 색감과 대비 또한 그 시대의 영화들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에서 사용 된 음악들도 60-70년대에 나온 음악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플래시백을 표현한 방식인데, 콜라주(한 화면에 여러 화면들이 덧대어지고)와 만화적 기법(인물의 머리에서 작은 화면이 대화풍선처럼 떠오르고 그 화면 안에 회상 장면이 보이는)을 사용하고 있다.  

<버팔로’66>은 빌리를 연기한 빈센트 갈로의 감독 데뷔작으로 그가 직접 대본을 쓰고 음악 감독까지 맡았다. 이 영화를 통해 그는 자신이 얼마나 다재다능한지 증명해보였고, 또 한명의 걸출한 감독이 탄생했다고, 영화 팬들은 그의 다음 연출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의 차기작 <브라운 버니>(2004)는 선정성 논란과 함께 혹평을 피하지 못했으며(이 혹평은 그에게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그의 세 번째 연출작 <물에 쓰인 약속>(2010)은 개봉도 하지 못했다. 감각적인 스타일과 단순한 플롯에서 끌어내는 감동, 배우들의 강렬한 연기, 그리고 영상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음악까지. <버팔로’66>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아쉬울 수밖에 없는 행보이다.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음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세상에 오직 나 홀로 인 것 같은 날, 이 영화를 보는 건 어떨까? 현실에 라일라 같은 사람은 없을지도 모르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그녀에게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빌리를 보며 함께 위로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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