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목을 자르거나, 불에 다 태우거나

<푼돈 도박꾼의 노래>

by CINEKOON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 옛날, 아귀는 말했다. 도박꾼은 자기 손목 못 자른다고. 그 말인즉, 손목을 자르지 않는 이상 도박꾼은 도박 못 끊는단 소리. 과연 아귀의 이 말에 마카오에서 지내는 도일 경은 무어라 답할까. 아니, 라일리는 무어라 답할까. 아니, 그냥 과일로라 불러야 하나?


촬영이 좋다. 감독과는 이미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함께 촬영하며 당해 오스카 촬영상을 거머쥔 바 있는 제임스 프렌드의 촬영이 정말로 멋지다. 어떻게 보면 흔하디 흔한 소악인의 개과천선 스토리인데, 이 영화가 그저그런 평범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로 남지 않게 된데엔 촬영의 공이 정말로 크다. 서구권의 감독들이 으레 그렇듯, 이 영화도 마카오란 아시아내 도시를 담아내며 특히 그 휘황찬란한 네온사인들에 구두점을 찍었다. 어떻게 보면 <블레이드 러너>부터 내려온 전통 아닌 전통일진대, 뻔하지만 영화가 정말로 그걸 멋지게 담아내 할 말이 없어졌다. 미국의 라스베가스와 더불어 마카오가 도박과 환락의 도시이기도 하니, 그 휘황함이 영화의 주제 및 분위기와 잘 맞아떨어져 더 할 말 없었고. 그냥 겉치레로만 쓴 요소였다면 지겨웠을 텐데, 그토록 화려한 도시에서 자꾸만 어딘가를 배회하는 주인공이 정말로 과일로처럼 느껴져 촬영과 주제가 정말로 잘 맞아떨어졌단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극중 이야기로 넘어가서. 허튼 소리지만, 왠지 나는 이 영화의 결말을 보기도 전에 이미 알 것만 같았다. 2020년대에 제작된 영화에서 도박을 권장하는 결말로 끝날리가 만무. 그러니 아마도 주인공은 스스로의 욕망에 못 이겨 끝까지 꼬라박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리라. 그러면서 영화도 도박 지양의 깃발을 올리리라. 정말로 그럴 줄 알았다. 근데 영화를 끝까지 다 보니 그 예상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더라. 갑자기 어디서 솟아난 운인지, 주인공 라일리는 갑자기 내리 승리를 하고 심지어 모든 걸 건 마지막 한 방에서조차 최후의 승리를 맛본다. 심지어 그 대결 상대는 라일리를 엿먹인 적 있던 다른 도박꾼이었는데도 말이다. 어라? 흔한 이야기 구조상 분명 여기서 라일리가 패배하고 인생 다 꼬라박아야하는데? 왜 이겼지? 대체 영화는 어디로 가려는 거지?


영화 중간에 그런 말이 나온다. 도박꾼이 계속해 승리하는 곳은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라고. 이러다 언제 패배할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그럼에도 계속되는 승리의 짜릿함이 중첩된 상태. 그래서 더더욱 그만두지 못하는 상태. <푼돈 도박꾼의 노래>가 말하는 바에 따르면 바로 그 상태야말로 천국과 지옥이 중첩된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지옥일 뿐인 상태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은 라일리를 그런 지옥으로 가두는 듯 싶어 보인다. 그런데...


갑자기 영화가 또 꺾더라. 한 판 더 하자는 다른 이의 유혹에 라일리는 굴복하지 않는다. 심지어 10:1 배팅이었는데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 라일리의 도박중독은 치료된 것인가? 이제 그는 딴 돈 모두를 가지고 그저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단 말인가? 어림도 없지, 영화는 라일리에게 그를 도왔던 다오밍의 죽음을 선사한다. 실상 라일리가 다시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다오밍의 시드머니 덕분 아니었나. 하지만 또 그 때문에 다오밍은 스스로 물에 몸을 던졌다. 모든 걸 다 이룬 뒤 함께 행복하게 살려던 여자의 죽음. 거기서 라일리는 반쯤 미쳐버려 정말로 과일로에 이르고 만다. 기껏 딴 돈도 다 걸신들린 불에 태워버리고 말이지.


그 때 김첨지가 떠올랐다. 오늘따라 운이 꽤 좋다 싶었는데, 왜 너는 내가 사온 설렁탕을 먹질 못하니. 도일 경 아니, 라일리 아니, 과일로가 딱 그 꼴이었다. 오늘따라 운이 꽤 좋다 싶었는데, 왜 다오밍 너는 내가 따온 돈을 함께 누리질 못하니. 거기서 허무해졌고, 영화가 너무 무서워졌다. 도박꾼들에겐 전재산 다 꼬라박고 빌딩에서 투신하는 게 지옥이 아니다. 심지어 계속 승리하기만 해 도박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큰 지옥은 아닐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큰 최후의 지옥은, 그렇게 얻어낸 부와 행운을 다른 그 어디에도 쓸 수 없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영화가 그걸 노래하는 것 같아 몸서리 쳐졌다. 나도 몇 해 전에 강원랜드 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 슬롯머신에서 만 원으로 12만 원 따고 제겁에 질려 그만둔 적이 있었지. 아귀 말마따나 나는 내 손목 자를 용기도 없고, 과일로처럼 기껏 딴 돈 다 불태울 패기 또한 없으니 그냥 도박을 멀리한채 살아야 하겠다. 


tempImageEI4GE6.heic <푼돈 도박꾼의 노래> / 에드바르트 베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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