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2005년 작 [신데렐라맨]을 본 뒤 한동안 러셀 크로우에게 빠져 있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정확하게는 그가 연기한 "짐 브래독(James J. Braddock)"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이지만 말이다. 브래독이 실존했던 인물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영화 속에 그려진 ‘브래독’의 이미지가 혹시라도 손상될까 두려워 그의 실제 삶에 대해서는 여태껏 찾아 보려 하지 않았을 정도이다. 영화를 처음 봤을 당시엔 그런 생각까지는 못했지만 돌이켜 보면 영화 속 "브래독"이 제시한 남성성, 혹은 대안적인 ‘가장’의 모습에서 많은 위로를 받았기 때문인 듯하다.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으로, 주인공인 짐 브래독(러셀 크로우)은 한때 팬들의 환호를 받으며 세계 챔피언의 타이틀을 노렸던 스타 복서 시절의 과거가 무색하게, 경제 대공황 시기를 겪는 동안 가난에 허덕이는 수많은 미국인 중 한 명으로 전락하게 된다. 근사한 저택에 살던 예전과 달리 작은 방 하나에 불과한 누추한 집에서 아내 메이(르네 젤위거)와 함께 세 아이를 키우는 그는 매일 새벽 부둣가에서 일용직 자리라도 얻으려고 애써 보지만, 생각처럼 벌이는 여의치 않고 집에는 미납 고지서만 한없이 쌓여 간다. 연이은 부상과 참패로 관중들의 외면을 받던 그는 모처럼 기회를 얻은 복싱 시합에서 심각한 오른손 부상으로 시합을 망칠 뿐만 아니라 분노한 복싱 협회에 의해 면허가 취소되며 권투를 할 ‘자격’마저 잃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오래 밀린 전기세 때문에 집에 전기가 끊기며 어린 세 아이들이 추위와 어둠 속에서 건강이 악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짐과 메이는 형편이 나은 친척들에게 자녀들을 맡기는 문제의 이견으로 갈등을 겪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충실한 친구이자 전 매니저인 조 굴드(폴 지아마티)의 도움 덕분에 짐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링 위에 오를 기회를 얻는데, 원래 참가하려던 선수의 갑작스런 부재를 수습하기 위한 ‘대타’ 역을 맡은 셈이었던 그가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시합에서 승리하면서 짐의 인생은 다시 한 번 방향을 바꾼다. 매니저 조의 전폭적 지지와 지도하에 이어진 시합들에서도 계속 승리를 거두면서 그의 ‘재기’의 서사가 새로운 장을 맞는 것이다. 이미 전성기를 지난 나이와 잦은 부상으로 망가진 몸을 가지고도 열정과 끈기로 ‘두 번째 기회’를 만들어 내는 짐은 끔찍한 불황 속 가난과 고통, 불운에 짓눌려 있던 사람들에게 점차 희망과 위로의 상징이 되고, 과거 그의 몰락을 조롱했던 언론은 그에게 "신데렐라 맨"이라는 별칭을 붙여 그를 칭송한다. 그렇게 해서 짐은 현 세계 챔피언 "맥스 베어"와의 결전까지 치루게 되는데, 베어는 이미 시합 도중 두 명의 선수를 사망에 이르게 한 전적이 있는 잔인하고 오만한 인물이다. 자신이 시합 상대를 "죽이게 될 것"이라는 선포를 공공연히 하고 다니는 베어 때문에 메이는 불안에 떨지만, 짐은 말 그대로 ‘죽음을 각오’한 채 링 위에 오르며 그를 응원하기 위해 찾아온 수많은 관중들의 환호를 불러 낸다.
뒤에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이 작품이 복싱이라는 스포츠 세계를 배경으로 둔 것과는 별개로 복싱 영화, 다시 말해 ‘스포츠’ 영화로 정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며 든 생각 중 짧게나마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점은 복싱이라는 스포츠에 내재된 잔혹성으로, [록키], [크리드], [밀리언 달러 베이비], [태양은 없다], [완득이] 등 국내외의 여러 작품에서, 또 사회 전반에 소위 ‘헝그리 복서’라는 비유와 정형화된 이미지(trope)가 존재한다는 사실에서 그 방증을 찾을 수 있다. ‘귀족의 문화’로 여겨지고 실제로도 부자가 아니라면 시작조차 어려울 승마나 폴로 등은 차치하고라도, 다양한 장비와 거대한 경기장, 함께 팀을 이룰 동료 선수들이 필요한 축구, 농구, 야구 등의 구기 종목과 달리 복싱은 선수 개인이 ‘자신의 몸’ 하나만을 가지고도 할 수 있는 스포츠인 셈이다. 그렇기에 돈도, 별다른 지지나 도움도 없는 청년들이 복싱을(또는 요즘 떠오르는 MMA같은 종목을) 통해 자신의 몸과 건강,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삶’을 상품화하는 방법으로 가난에서 벗어나려 노력해야만 하는 현실이 무척이나 서글프다. 이 영화 안에서도 자신의 ‘몸’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짐이 가족을 위해 돈을 벌려면 링 위에서 그 ‘몸’을 혹사해야 한다는 사실은, 선수의 부상쯤엔 관심도 없이 폭력을 즐기는 관중들을 위해 피 튀기는 ‘쇼’를 보여 줄 것을 요구하는 협회 사람들의 냉혈성으로 인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영화 전반이 따뜻하고 훈훈한 톤을 띄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선수의 상처와 물리적 고통이 판정의 기준이 되고 관중들의 관전 포인트가 되는 경기 속에서, 스스로의 안전과 건강, 나아가서는 ‘삶’을 담보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줘야 하는 짐의 모습에서는 러셀 크로우가 마찬가지로 주연을 맡았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장면들이 연상되기도 한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복싱 영화’로 불리기에 어려운 측면들이 있다. 물론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가 스포츠 자체보다 그를 통한 주인공의 성장과 삶의 이야기에 집중하곤 하지만 이 작품의 경우 그런 특성이 더욱 두드러지는데, 이 영화가 짐의 복싱 실력이나 선수로서의 성장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대표적 예로, 짐의 약점이던 ‘왼손 펀치’가 어느 날 갑자기(재기의 시작이 된 경기 때부터) 완벽해지고 이를 본 매니저 조가 놀라자 짐이 "일용직 작업에서 다친 오른손 대신 왼손을 많이 쓰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같다" 정도로 설명을 끝내는 연출을 들 수 있겠다. 짐이 예전에 맞붙었다가 참패를 당했던 선수를 상대로 승기를 잡자 당황한 그 선수가 자신의 코치에게 "예전의 그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장면도 비슷한 느낌인데, 물론 짐의 서사 속에서는 무척 감동적인 대목임에도 사실 지난 몇 년간 복싱을 계속할 여건이 되지 못했던 그가 갑자기 전성기 때만큼의 - 혹은 그때보다 더 훌륭한 - 실력을 되찾은 상황의 설명치고는 너무 "건너 뛰었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다. 다른 여러 복싱 영화들처럼 이 작품에도 주인공이 경기를 위해 훈련하는 ‘training montage’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거의 구색 맞추기 수준으로 짧고 간단하게 끝나 버리는 것 또한 마찬가지 경우이다. [록키] 시리즈, 특히 첫 편에서 주인공이 필라델피아 거리를 달리며 훈련하는 장면과 그 장면의 배경음악이 유명해지면서 영화를 대표하는 요소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과는 전혀 상반되는 연출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복싱이라는 스포츠보다, 심지어 ‘복싱 선수’인 짐의 실력이나 그가 어려운 상대를 이기며 얻는 성취감보다 ‘승리’ 그 자체에 더 관심을 두는데, 이것은 아마도 '주인공'으로서 짐이 보이는 특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대체로 한 주인공의 여정을 비추는 ‘영웅적 서사(heroic epic)'에서의 갈등은 내부적 요인(internal forces)과 외부적 요인(external forces)으로 갈리는데, 내면의 부족함이나 갈등, 혹은 트라우마 등을 지닌 인물이 여러 가지 경험과 난관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를 다루는 전자의 경우가 "자아 실현(self-realization)"이라는 ‘주관적’ 성취를 목표로 하는 것과 달리, 후자의 경우는 이미 ‘완성형’에 가까운 인물이 외부의 시험을 통과하고 고난을 견뎌 내며 실제적인 목표나 보상을 획득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짐의 서사는 확실히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고 말이다.
실제로 짐 브래독은 ‘완성형’을 넘어 믿기 어려울 만큼 이상적인 인물이다. 물론 그는 가족을 위해 충분한 돈을 벌지 못하고 있고, 과거의 잘못된 투자로 많은 재산을 손실했음이 암시될 만큼 물질적 안정의 제공자라는 전통적 ‘가장’의 역할은 잘 해내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가 가장의 권위, 더 정확하게는 가장의 ‘자격’을 잃는 순간이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 그렇게 힘들어지는 상황에서도 이 가족의 초라한 집은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메이는 일거리를 찾으러 새벽부터 나가는 남편을 위해 양말을 오븐 안에 넣어 따뜻하게 데워 주고, 짐은 배가 고픈 딸을 위해 꿈 속에서 포식을 해 아직도 배가 부르다는 거짓말을 하며 아침을 양보한 채 일을 나간다. 복싱 면허가 취소되고 오른손의 부상이 악화되어 일을 찾기가 더욱 어려워진 상황에서 짐이 메이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하자 아내는 그 사과를 거부한 채 남편을 꼭 끌어안는다. 잠결에 깨어난 딸의 눈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은 가난에 지쳐 싸우는 부부가 아니라 고통 속에서 더욱 사랑과 신뢰를 확인하며 서로에게 기대고 있는 연인이다. 생활이 궁핍할지언정 이런 부모가 아이를 ‘제대로’ 양육하지 못한다고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이 가족의 사랑과 화목을 지탱하는 것은 분명 짐의 내면에서 나오는 힘인 듯하다. 큰 아들이 식료품점에서 음식을 훔쳐 온 것을 본 짐은 아이를 직접 가게로 데려가 사과하도록 가르치면서, 악화되는 집안 형편 때문에 자기도 친척 집에 보내질까 봐 두려워서 그랬다는 아들을 품에 안고 절대 너희들을 다른 곳에 보내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결국 전기마저 끊기고 아이가 아프기 시작하자 그 모습을 견디지 못한 메이가 남편 몰래 아이들을 이모 집으로 보냈을 때,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없다면 이 모든 것에 의미가 없다"며 절망하는 그는 객관적으론 인생의 ‘바닥’을 찍은 사람처럼도 보인다. 최대한 피하려고 했던 정부 보조금을 받고, 한때 스타 복싱 선수로 활동하며 함께 일했던 동료와 상사들이 있는 Madison Square Garden의 클럽으로 가서 도움을 청한다. 연이은 패배와 부상에 퇴물 취급을 하며 복싱 면허까지 빼앗은, 자신에게 가장 큰 치욕을 안겨 준 장소에서 모든 자존심을 내려놓은 채 ‘구걸’을 -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 하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자신의 전 매니저 조와 마주친 그가 미안하다며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는 장면에선 정말로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처럼 절망적인 상황까지 가게 된 짐이 추하거나 볼품없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그의 그런 행동이 가족을 위해, 자녀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릎을 꿇을 수 있는 ‘다정한’ 단단함과 용기에 기인했기 때문일 것이다. 짐은 그렇게 구해 온 돈으로 밀린 전기세를 내고 아이들을 다시 집으로 데려오며 그들과의 ‘약속’을 지키게 된다.
짐의 이런 모습과 대비되는 인물이 있는데, 부둣가에서 일을 하면서 알게 되는 친구 "마이크 윌슨"이다. 대체로 ‘순종적’이며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본인의 부족함과 잘못된 판단으로 돌리곤 하는 짐과 달리, 한때 증권 브로커였던 마이크는 어려움에 처한 국민을 제대로 돕지 않는 국가에 분노하며 정부 반대 시위와 노동조합 결성의 필요성을 부르짖는 인물이다. 물론 그의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며 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정부나 불충분한 사회 안전망에 대한 규탄과 책임론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마이크는 이 끔찍한 상황에 대한 책임과 원인을 모두 외부로 돌림에 의해 자신의 무력과 울분, 가족들에 대한 죄책감에서 ‘도망’치는 것으로도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마이크가 사회를 향해 진보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반면 전통적인 ‘가장’의 정체성, 그러니까 생계를 책임지는 ‘능력’에 집착하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과 달리, 정부에 순응하고 ‘고지식’한 편인 짐은 도리어 아내와 모든 일을 의논하고 가족의 물질적 부족을 사랑으로 채워 넣는 방식으로 ‘능력’과 ‘권위’에만 치중한 가부장적 사고에서 탈피한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둘의 이런 차이는 자녀의 생일을 축하할 형편이 되지 않는 부모들을 위해 동네 성당이 주최한 아이들의 공동 생일 파티에서 가장 크게 드러나는데, 파티에 참석해 생일 축하 노래를 함께 부르고 아들을 껴안으며 사랑과 애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짐과 달리 마이크는 ‘가장’으로서 자신의 무능력함을 부각하는 듯한 이 파티에 차마 어울리지 못하고 술에 취한 채 성당의 건너편 거리에서 아내와 싸움을 벌인다. 짐에게 그 무엇보다 자신의 가족,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면 마이크에겐 여전히 본인의 자존심, 그러니까 생계비를 벌어 오는 ‘능력’에 기반하는 ‘가장’으로서의 정체성이 더 중요한 것이다. 꾸준한 일자리가 있는 마이크가 여러 면에서 짐보다 훨씬 나은 여건에 있다고 할 수 있음에도, 결국 그는 '내면'의 갈등과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사고로 죽음을 맞이한다. 오히려 대놓고 목숨을 건 채 도박한다고 할 복싱 선수인 짐은 모든 ‘외부적’ 시험과 고난을 이기면서 자신과 가족의 온전함을 지켜 내는데 말이다.
그런 면에서 짐이 권투 선수로 재기하고 예전의 영광을 되찾는 과정은 단지 그가 ‘자존심’을 회복하는 여정, 개인의 무력함과 과거의 실패를 뛰어넘는 노력만으로 보이지 않는다. 짐이 선수로서의 암흑기를 겪는 시간과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전통적 ‘가장’으로서 힘을 잃는 시기는 병행으로 진행되지만, 선수로서의 짐은 비록 암흑기를 겪었을지언정 가족을 사랑하고 책임지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그는 단 한 번도 부족하거나 초라해진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짐이 복서로 ‘부활’하는 과정, 그가 치루는 복싱 경기들은 그에게 내면의 변화와 성장을 가져다 준다기보다 지금까지 ‘옳은 길’을 걸어온 그에게 ‘승리’라는 합당한 보상을 내리기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보는 것이 정확할 듯하다.
짐의 이런 ‘완벽’에 가까운 이상적 면모는 "미국의 희망"이라는 부담스런 타이들을 안게 된 그를 관객들이 전적으로, 아무 거리낌 없이 응원할 수 있게 해 주는 연출적 도구이리라 생각되지만, 동시에 가부장적 사고로 굳어진 남성성과 ‘가장’의 모습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준다고도 여겨진다. 생계를 꾸리는 일, 즉 '돈을 벌어 오는' 것을 자신의 유일한 책임이자 권위의 원천으로 착각한 많은 ‘가장’들이 가족들을 찍어 누르며 가족들과의 사랑과 소통의 ‘관계’에는 소홀했던 시절의 폐해가 우리 사회에 남아 있음을 느낄 때가 많다. 이제는 한 사람이 생계를 책임지는 가정이 점차 줄면서 다양한 가족의 형태가 목격되기도 하지만, 여전히 일하는 여성들이 육아와 가사 노동의 많은 부분을 담당한다는 연구 결과를 볼 때마다 ‘가장’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완전히 바뀌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돈을 벌어 오는 것이 책임의 전부일 수는 없으며 가족을 이끌고 보호할 자격이 경제적, 사회적 ‘능력’에서 비롯되는 것일 수도 없다. 힘과 권위, 능력을 확인 받지 못하면 ‘자존심’ 상하는 일이 가정 안에서만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능력이 아니라 관계를 최우선에 두는, 가족과 그 사랑 안에서 ‘함께함’을 위해서라면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을 수 있는 내면의 용기와 단단함을 지닌 이들이 이루어 낸 가족이야말로, 사랑의 공동체로 형성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애초에 의도하신 가족의 모습일 테니까.
엄마 C의 시선
영화 “신데렐라 맨(Cinderella Man)”은 감독이면서 배우로도 활동하는 론 하워드(Ron Howard)가 연출을 맡고, 한국 관객들에게도 잘 알려졌을 러셀 크로우(Russell Crowe)와 르네 젤 위거(Renée Zellweger)가 남녀 주인공으로 열연한, 2005년 발표된 복싱 영화입니다. 그보다 4년 앞서 개봉되었던 “뷰티풀 마인드(A Beautiful Mind)”에서도 감독과 주연 배우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는 론 하워드와 러셀 크로우는, 미국의 가장 극심한 경제 불황기였던 1930년대 초 “대공황(Great Depression)” 당시의 실재 인물인 권투 선수 제임스 브래독(James J. Braddock)의 실화를 다룬 이 영화에서 서로의 의중을 잘 파악한 연출과 연기로 아름다운 스토리를 엮어 냅니다. 브래독의 삶에 흥미를 느낀 크로우가 감독 하워드에게 영화화를 제안하여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그럼에도 촬영 도중 어깨 탈골 등 수많은 부상을 겪은 그가 “글래디에이터(Gladiator)” 촬영 때보다 다섯 배는 더 힘들다고 토로했다는 뒷 이야기가 있는 이 영화가, 드라마틱한 소재라는 ‘겉면’에 따뜻한 내용이라는 ‘알맹이’까지 가지고도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과, 작품성에 대한 많은 호평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 3개 부문(남우조연상, 편집상, 분장상) 수상으로 만족해야 했다는 점은 안타깝게 여겨지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신데렐라 맨”은 여러 면에서 예전에 저희가 다루었던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와 닮은 점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영화인데, 두 작품 모두 실존 인물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엮어진 내용이라는 것이 가장 대표적 측면이겠지만, 그보다 더 뚜렷이 느껴지는 공통점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극한에 이른 암울한 상황에서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초인적’ 능력을 - 글자 그대로 - 발휘하며 그처럼 극심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주인공들의 삶의 이야기를 들 수 있을 듯합니다. 두 영화에서 그려지는 현실, 즉 자녀들에게 당장 먹일 음식이 없고 편히 잠을 재울 집이 없으며 최소한의 안전감마저 제공할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 처절하고 절박한 현실은, 부모의 입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가장 큰 두려움으로 상상할 만한 최악의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배가 고프다는 아이에게 아내 “메이(Mae)”가 반도 채 남지 않은 우유병을 수돗물로 가득 채워 건네는 장면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던, 압권(!)이라고 불릴 만한 대목이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극한의 어려움 가운데 자녀에 대한 사랑이라는 가장 강력한 ‘동력’을 통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내는 두 아버지의 모습은, 부모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역시 울림이 큰 위로와 격려로 받아들일 만한 요소라고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내와 세 아이들(두 아들과 막내딸)이 함께하는 완벽한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던 권투 선수 “제임스(아내와 친구들이 “짐”이라고 부르는)”는 상대적으로 왜소하다고 할 만한 체격에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훨씬 큰 상대와 악착같이 싸우는 불굴의 투지로 “버건의 불독(the bulldog of Bergen)”이라는 - 그가 살던 뉴저지 지역의 지명을 따서 - 별명이 붙을 만큼 전도가 양양한 때도 있었으나, 최악의 경기 침체와 더불어 지나치게 몸을 혹사하면서 빚어진 여러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선수로서의 생명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늘 곁에서 그를 돕던 매니저 “조 굴드(Joe Gould)”가 가까스로 주선해 온 경기에서도 오른손 부상의 여파인 볼품없는 경기로 선수 자격 박탈까지 당하게 된 그는, 집에 먹을 것이 떨어지자 정육점에서 소시지를 훔친, 게다가 난방과 전기가 끊기며 밤새 기침하는 아이들을 보고는 ‘천재일우’로 기회가 주어진 경기에서 놀라운 투혼을 발휘하며 승리를 거둡니다. 이 일을 계기로 헤비급 세계 챔피언인 “맥스 베어(Max Baer)”와의 경기까지 성사되면서, “늙은 개”라고 그를 놀리던 주위의 비아냥이 “신데렐라 맨”이라는 새로운 별명으로 급변하게 되지요.
갑자기 신분이 바뀌는 동화 속 “신데렐라”처럼 한순간 챔피언과 겨룰 정도의 성공한 위치까지 올라갔다는 의미에서 스포츠 전문기자 데이먼 런욘(Damon Runyon)이 붙여 주었다는 이 호칭이, 그러나 브래독에게 적절한 별명이라고는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오랜 공백과 부실한 영양 상태로 - 맥스에 앞서 경기를 벌인 랭킹 2위 “콘 그리핀(Corn Griffin)”과의 시합 당일에도 종일 굶고 링에 올라가야 했을 만큼 - 상대 선수를 두 명이나 사망에 이르게 한 ‘핵 주먹’인, 그래서 모두들 브래독이 2라운드쯤 KO패 하리라고 예상했던 맥스와의 경기에서 15라운드까지 버티며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이라는 승리의 신화를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을 위해 싸우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우유를 위해서(for milk)”라고 대답했던 - 다른 이들은 그 속뜻을 알지 못했을 - 절박한 이유에 따른 초인적 투지 때문이었으며, 끊긴 가스와 전기를 다시 공급 받으려면 마련해야 하는 $37.38이 공공구호기관에서 받은 보조금 $19불로는 반밖에 충당되지 않았을 때 나머지 $18.38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과거 몸담았던 복싱 협회 간부들의 모임 장소(사교 클럽)로 찾아가 사정을 말하며 돈을 얻어야 했던 가슴 아픈 기억 때문이기도 했을 테니 말입니다.
이곳 “브런치”에서 한 이웃이 올린 글을 읽고 답답한 마음이 들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인이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요소”에 대한 연구 결과를 소개했던 그 글에서의, 한국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가치 중 1위로 꼽은 것은 “돈”으로, 조사 대상 국가 중 “가족”을 1위로 꼽지 않은 나라는 3개국(스페인, 대만, 한국)뿐이지만 스페인의 경우 “건강”이 “가족”보다 조금 높은 수치였고 대만인들은 “사회”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들어서 그런 결과가 나왔다는 – 결국 그 연구에서 “돈”을 1위로 꼽은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는 – 결과는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다른 나라들의 경우 2위를 차지한 요소가 대부분 “직업”이었으나 한국인들 가운데 “직업”을 둘째로 꼽은 사람은 6%에 지나지 않으며, 고소득자와 저소득자를 불문하고 “일”이 단지 “돈 버는 수단”이라는 반응을 보인 나라로도 한국이 유일했다고 합니다. 더욱이 18-29세의 청년층에서 “가족”의 가치를 1위로 든 사람은 전체의 3%에 불과했으며 배우자나 연인이 있어서 행복하다고 답한 사람도 전체 응답자의 1%뿐이었다니 가히 충격적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짐 브래독이나 “행복을 찾아서”의 크리스 가드너, 역시 저희가 다루었던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의 에린처럼 평범한 이들의 성공 스토리에 열광하는 것은, 즉 태어날 때부터 남다른 특권을 가지고 출발선부터 우위에 있던 사람들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삶을 산 - 때로는 ‘평범 이하’의 삶으로까지 전락한 적이 있는 - 사람들을 보며 환호하는 것은, “저 사람이 할 수 있었다면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도전과 자극을 느끼기 때문일 듯합니다. 그러나 골리앗 앞에 선 다윗처럼 연약하기만 하던 이들이 그럼에도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동력’이 되어 준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고 그들의 성실함을 인정한 주변의 이웃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함께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점점 더 어려워지는 상황에서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며”라고 기도하는 아내 메이를 향해 짐은 “기도하는 일에도 이젠 지쳤어”라며 모든 것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보이지만, 맥스와의 경기에 남편을 보내고 곧장 성당으로 갔던 메이가 그곳에 먼저 와 기도하고 있던 이웃들을 보면서 다시 용기를 얻고, 그렇게 얻은 용기를 경기 전의 남편에게 전달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포기’한 짐과 달리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것이니까요.
짐 브래독을 묘사함에서 “신데렐라”의 개념을 차용한 것이 반드시 틀렸다고만 할 수 없을 측면도 사실상 존재합니다. 전세계 여러 곳에서 다양하게 변형된 신데렐라 이야기 중에도 “그림 형제”판에서 옷과 구두를 신데렐라에게 주며 그녀를 변신시키는 존재는 어머니 무덤 옆에서 자란 “개암나무”인데, 장을 보러 나서던 아버지가 신데렐라와 계모의 두 딸에게 필요한 물건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아름다운 옷이나 보석을 원하던 두 언니와 달리 신데렐라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 모자에 닿는 첫 번째 나뭇가지를 꺾어 달라고 부탁했고, 그 말대로 아버지가 꺾어다 준 나뭇가지를 어머니 무덤 옆에 심었더니 금세 자라 난 개암나무와 그 근처에 있는 하얀 새(초자연적인 원조자들)가 그녀를 도와 줌으로써 파티에 참석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격언과 같이 눈에 보이는 물질에 큰 가치를 두지 않고 부당한 대우에도 착한 마음을 지킨 신데렐라의 품성이 그녀가 왕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의 발판이 되었듯, 돈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우위에 두며 자신의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는 브래독의 선한 심성이 매니저였던 조로 하여금 그의 일에 발벗고 나서 새로운 기회를 찾을 도움을 주도록 했을 뿐더러, 주위 사람들 역시 그를 인정하고 응원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경기의 수익금으로 평소 만져 보지 못한 금액이 손에 들어왔을 때 브래독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공공구호기관에 찾아가 그동안 빌려 쓴 돈을 갚는 일이었고, 끊긴 가스와 전기를 복구해 이모 집에 보내진 아이들을 다시 데려오고자 자신의 자존심 정도는 헌신짝처럼 내버릴 수 있었던 것도 아들과 한 약속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성공이 단순한 행운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또 다른 증거입니다. 큰 아들 “제이(Jay)”가 소시지를 훔쳐 온 것이 집에 양식이 떨어진 자기 친구가 친척 집으로 보내졌다는 말을 듣고 자신도 그런 입장이 될까 두려워 스스로 그 상황을 ‘막겠다’는 생각으로 한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그런 아들에게 “어떤 경우에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일은 안 된다”며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시킨 브래독은, 자신 또한 “어떤 경우에도 너를 다른 집으로 보내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는 약속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절대로 어겨선 안 될 ‘원칙’이 반드시 있어야 하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그 원칙을 어기지 않겠다는 확고한 ‘결단’으로 배수진을 치지 않는 한 저항하기 어려운 현실이 닥쳐올 때 조금씩 무너지는 타협과 합리화의 유혹을 피하기 어렵게 됩니다. 계모와 이복 언니들의 구박 속에 부엌 아궁이 앞에서 재(cinder)를 뒤집어 쓰고 일한다 하여 붙여진 “신데렐라(Cinderella)”라는 이름이 본래 “재 투성이”를 의미하는 말인 것처럼, 본시 재 투성이였을 뿐인 우리도 그분께서 제시하시는 ‘원칙’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고수하겠다는 ‘결단’을 통해 지금의 새로운 이름(identity)을 얻게 된 것이라고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