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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Nov 02. 2024

행복을 찾아서: 우리에게 주어진 천부의 권리

딸 J의 시선



고등학교 재학 시절, 꽤 오랫동안 기독교 단체에서 운영하는 노숙인 무료 급식소에서 봉사 활동을 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살던 곳은 그닥 부유한 지역이 아니었으며, 우리 가족 또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간을 지나던 때였던 데다, 심지어 급식을 받으러 온 사람들 중에서 중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 아이를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그곳에서 목격한 가난과 결핍은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숙자들과 빈곤층에 관련된 사회적 문제들은 나에게 개인적인 고통과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그런 이유에서 [행복을 찾아서(The Pursuit of Happyness)]는 예나 지금이나 내게는 무척 ‘보기 힘들게’ 느껴지는 영화들 중 하나이다. 이 글을 준비하며 오랜만에 영화를 다시 보는 동안 영상을 잠시 멈추고 숨을 돌려야 했던 순간들이 몇 번 있었을 정도로 말이다.


이 영화는 크리스 가드너(Chris Gardner)라는 실존 인물의 삶과 이른바 ‘성공 신화’를 각색한 내용으로, 주인공 "크리스" 역을 배우 윌 스미스가 맡은 것과 더불어 크리스의 아들 "크리스토퍼" 역을 윌 스미스의 실제 아들 제이든 스미스가 연기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1981년을 배경으로 5살짜리 아들과 아내 "린다(탠디 뉴튼 분)"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서 살고 있는 의료 기기 세일즈맨 크리스를 소개하며 시작된다. 크리스는 병원을 전전하며 의사들에게 의료 기기를 소개하는 바쁜 일상 속에서도 아들인 크리스토퍼에게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지금껏 저축해 둔 돈 전부를 들여 구입한 그 기계(골밀도를 측정하는 스캐너)가 생각보다 잘 팔리지 않고, 호텔에서 메이드로 일하고 있는 린다가 무리해서 근무를 해 봐도 월세는 계속해서 밀리는 형편이다. 이런 현실적 어려움에 점점 지쳐 가는 린다로 인해 부부의 관계는 계속해서 어긋난다.





그러던 중 크리스는 우연히 빨간 페라리를 모는 증권 중개인(stockbroker)을 목격하고, 가난과 불행을 벗어나 '행복'에 이를 수 있는 방편으로 자신도 그 직업을 꿈꾸게 된다. 번뜩이는 재치와 열정으로 관련 경험이 없는 고졸임에도 “Dean Witter Reynolds”라는 증권 회사의 인턴으로 선발되지만, 인턴십이 무보수라는 사실을 알고 난 크리스는 실망한다. 그에 더해 결국 한계에 다다른 린다와 헤어지며 아들 크리스토퍼를 혼자 도맡게 된 그는 밀린 집세 때문에 집주인에게 쫓겨나기까지 한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homeless’ 상태의 크리스가 아들을 돌보는 동시에 어떻게든 인턴십 과정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정직원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발버둥’ 그 자체이다. 낮 동안 미친 듯이 일한 그는 밤이면 아들과 함께 노숙자 쉼터나 숙소들을 전전한다. 그나마 노숙자 숙소에서 방을 얻는 날은 다행이지만, 찾아갔던 숙소에 남는 침대가 없다는 말에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어린 아들과 잠을 청하기도 한다. 화장실 벽에 기대앉은 채 아들을 재우던 크리스가 밖에서 화장실 문을 열려는 기척에 발을 뻗어 문을 막는 모습은 이 영화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 ‘고행’으로 표현해야 적절할 크리스의 노력들은 그를 결국 ‘정직원’으로 만들어 주고, 한걸음에 아들에게 달려간 그는 아이를 꼭 껴안으며 드디어 ‘행복’을 음미한다. 사실 그 마지막 장면에서 울컥하지 않기는 힘들다. 그때까지 꼼꼼히 쌓여 온 부자의 고통과 감정적 서사가 크리스의 ‘성공’이란 대목에서 관객들에게 엄청난 카타르시스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영화가 실제 이야기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감동을 배가시키는 요소로 작용한다. 물론 실제 이야기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현실보다 과장하거나 바꾼 부분들은 있지만(예를 들어 실제 크리스 가드너는 인턴 시절이 아닌, 증권 중개인으로서 ‘정직원’이 된 이후 1년여간 아들과 함께 노숙 생활을 했다고 한다) 크리스가 뼈를 깎는 노력으로 놀라운 인생 역전을 이루어 낸 것은 어쨌든 사실이니 말이다. 현재 그는 크게 성공한 비즈니스맨이 되어 기부와 봉사 활동, 특히 노숙자와 실업자들을 위한 구호 활동을 활발히 한다고 한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다만 이번에 영화를 다시 감상하며 나는 크리스 가드너의 성공이 영화적 소재로서는 완벽할지 모르나 -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 ‘현실’에 적용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와 비슷한 상황에 놓인 다른 많은 이들 중 이렇게 혼자만의 힘과 노력으로 자신을, 또 자신의 자녀를 가난과 결핍, 불행에서 '스스로' 건져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영화 속 크리스는 사실 보통 사람이 아니다. 변변찮아 보이는 의료 기기 세일즈맨이었을 때부터 그가 실은 굉장히 ‘명석한’ 사람이라는 암시가 넘쳐나고, 인턴십 원서를 제출한 증권 회사의 파트너를 몇 번이고 무작정 찾아갈 만큼의 끈기와 적극성을 보이기도 한다. 결국 크리스는 그 파트너와 함께 탄 택시 안에서 루빅 큐브를 놀랄 만큼 빠른 시간 안에 맞춤으로써 그의 호감을 얻어 인턴 자리를 따내게 되는데, 말하자면 그의 ‘천재성’과 ‘배포’, 그러니까 그의 ‘비범함’을 통해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마찬가지로 인턴이 되고 난 후의 그의 행보 또한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매일 저녁 아들을 돌봄방에서 데려와 늦지 않게 노숙자 숙소에 도착해야 하는 크리스는 다른 인턴들과 달리 늦게까지 사무실에 남아서 일을 할 수 없지만, 그것에 절망하거나 포기하는 대신 남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방법으로 효율성을 높인다. 아이를 혼자의 힘으로 키워야 하며 매일 밤 돌아갈 안정적인 집이 없다는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크리스가 노숙자 숙소의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새벽빛을 이용해 공부하는 장면은 "형설지공"의 서구식 해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크리스 가드너 같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하루 아침에 집에서 쫓겨난 상태에서 어린 아이까지 돌봐야 하는 처지가 되었을 때 이를 악물고 ‘노력’함으로 몇 년만에 성공한 기업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 것이다. 크리스의 이야기가 비슷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와 도전이 되었다면 좋은 일이겠지만 동시에 이런 작품들이 ‘개인’의 노력을 통해 성공이, 가난에서의 탈출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식의 메시지를 생산하는 수단으로 쓰이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가난이나 결핍, 차별 등의 사회경제적 문제의 해결을 ‘개인’의 책임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봉사 활동을 하고 관련 문제들에 대한 공부를 하며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아직까지도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문제를 그들 '자신'의 탓, 그러니까 그들의 개인적 실패와 부족함에 기인하는 양 여기는 인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노숙자나 실업자가 ‘게을러서’, 혹은 무언가를 잘못해서 - 흔한 예로 공부를, 혹은 노력을 하지 않아서 - 그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는 식의 관점을 우리 모두가 어떤 식으로든 접해 봤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영화에서도 표현되듯, ‘개인’의 가난과 결핍은 사실 ‘구조적’인 문제들에 묶여 있을 가능성이 크다. 크리스는 주차 위반 스티커가 자동차 창문에 쌓일 만큼 부지런히 병원을 돌며 의료 기기 판매를 위해 노력하지만, 레이건 대통령이 TV에 나와 직접 시인할 정도의 암울한 경제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사실상 영화 내내 정부와 공권력은 크리스를 ‘방해’하는 가장 큰 걸림돌로 표현되기도 한다. 크리스는 ‘자력’을 통한 각고의 노력 끝에 증권사의 인턴 프로그램 면접을 볼 수 있게 되지만, 주차 위반 벌금이 연체되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잡혀 가 구치소에 갇히게 된다. 여기에서 ‘공권력’을 대표하는 경찰관은 크리스에게 돌봐야 할 어린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또 그가 다음날 아침 일찍 면접이 있다는 사실을 듣고도 그를 풀어 주지도, 다른 합리적 도움을 주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살던 집에서 쫓겨난 뒤 모텔방에서 아들과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나날을 이어가던 크리스를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것은 세금이 밀렸다는 이유로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압류하는 미국 국세청(IRS)이다. 빈털터리 신세가 된 크리스가 아이와 함께 노숙자 숙소들을 전전하게 된 것도 바로 이 조치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크리스에게 조금이나마 한숨 돌릴 틈을 주는 것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노숙자 숙소라는 것 역시 조금 씁쓸한 사실이다. 물론 신앙 공동체에서 이런 구호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또 주님의 마음에 합당한 일이지만, 국민의 보호 의무를 지는 국가에서 실패한(혹은 포기한) 복지의 공백을 교회 같은 ‘사적’ 단체에서 메워야 한다는 것이 궁극적으로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리라고 본다. 영화에서 크리스는 “the pursuit of happiness"(영화 제목은 일부러 “happyness”라는 오자를 이용하지만)라는 표현을 여러 번 사용한다. 제목에서는 “행복을 찾아서”로 번역되었으나 더 정확하게는 ‘행복의 추구’가 맞을 듯 싶다. 이 표현은 미국의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의 서문에 사용된 문구이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인다. 즉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창조되었고, 창조주는 그들에게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몇 가지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들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





영화 속에서 크리스는 증권 중개인이라는 직업으로 대표되는 ‘성공’을, 더 정확히 말하면 물질적, 사회적 ‘안정’과 ‘여유’를 ‘행복’이라고 전제한다. 그러니까 증권 중개인이 되기 위해, 그에 따른 안정과 여유를 얻기 위해 그가 견뎌야 하는 모든 고통은 행복의 '추구’, 즉 행복을 '쫓는 과정'인 셈이다. 하지만 안정과 여유 자체가 행복이 되는 것이, 행복의 추구가 그토록 괴롭고 힘들어야 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 일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안정과 여유를 갖추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위치에 다다를 최소한의 필요 조건으로 보아야 옳지 않을까? 물질적, 경제적 ‘성공’이 곧 ‘행복’을 뜻하지 않음을 알고 있는 믿는 이들에게는 더더욱 그래야 하리라고 본다.


가난과 결핍에 허덕이는 이웃에게 당장의 필요만 채워 주는 단기적 구호 활동을 넘어, 우리 모두에게 행복을 '쫓을’ 수 있을 만큼의 사회적, 경제적 여유와 안정이 보장되는 사회를 일궈 내는 것이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소명이자 장기적 사역 과제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고통 받는 이웃들이 ‘알아서’ 혹은 ‘자력으로’ 일어서기만을 기다리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우리야말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니 말이다.  




엄마 C의 시선



“행복을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의역된, 그러나 원제는 “행복추구권 / 행복을 추구할 권리(The Pursuit of Happyness)”로 직역될 수 있는 이 영화는, 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고 매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동시에 제가 윌 스미스(Will Smith)라는 배우를 – 액션과 코미디 장르 전문 배우로만 생각하던 – 새롭게 바라보도록 해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제목에 적힌 “happyness”는 주인공인 “크리스 가드너(Chris Gardner)”가 아침마다 자신의 아들을 맡기던 탁아 시설(daycare) 벽에 낙서된 “행복(happiness)”이라는 단어의 오기(誤記)를 그대로 빌려 와 제목으로 사용한 것인데, “행복을 찾아서”라는 말이 막연히 장밋빛 꿈을 찾아 떠나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여정’을 연상시키는 어구인 반면, 영화의 제목이 실제로 의미하는 바는 1776년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이 제창했던 미국 “독립선언서(Declaration of Independence)”에 명시된 인간의 “천부권(天賦權)“ 가운데 하나, “행복추구권”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되어 2006년 개봉된 이 영화는 삶의 낭떠러지까지 이르렀던 미국의 전설적 흑인 기업가 크리스 가드너의 실제 삶을 그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미국 ABC TV의 시사 프로그램인 “20 / 20”에 출연했던 그의 기적 같은 이야기가 뜨거운 반향을 일으키자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도 그를 섭외해 출연시켰고 결국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아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번 리뷰를 위해 다시 보며 생각하니 저희가 예전에 다루었던 “에린 브로코비치(Erin Brockovich)”와 공통점이 많은 영화로 느껴질 수 있겠다 – 실화를 바탕으로 한 데다가 ‘인생 역전’을 이룬 주인공들의 삶을 소재로 한다는 점에서 – 싶기도 하지만, 예전 글에서의 “에린”이 ‘타인’을 그리고 ‘공익’을 위해 자기 개인의 삶(자녀 돌보기를 포함한)을 철저히 포기해야 했던 것과 달리, 이번 편의 주인공 “크리스”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끝까지 지켜 내며 벼랑 끝까지 몰렸던 ‘자신’의 삶을 희망과 축복의 길로 방향 전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본질적 차이점을 갖는 영화들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휴대용 골밀도 검사기(Portable Bone-density Scanner)”라는 이름도 생소한 의료 기기를 늘 들고 다니며 파는 세일즈맨 크리스는 아내 린다(Linda), 아들 크리스토퍼(Christopher)를 부양하는 가장으로, 가진 돈을 모두 투자해 그 기계들을 처음 사들일 때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했었지만 실상 그것이 가격만 비쌀 뿐 의사들도 구입을 꺼리는 별 쓸모없는 물건임이 곧 밝혀졌을 만큼, 한 달에 두 대를 팔아야 집세와 아들의 탁아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그들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매달의 판매 실적은 그다지 신통치 못합니다. 하지만 세금과 공과금, 집세 등이 계속 밀리는 힘겨운 생활 때문에 늘 짜증스런 표정인 아내 린다의 푸념을 들으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아들을 향한 사랑에 한결같기만한 크리스는, 차이나타운 안에 위치한 아들의 데이케어 건물 벽에 낙서된 욕설을 지우는 일과 “happyness“라는 글자의 철자 고치는 것까지 신경을 쓸 만큼 자녀 교육에도 열성적인 아빠입니다. 


도무지 나아지지 않을 듯한 경제 사정으로 고민이 깊던 즈음 한 건물 앞에 고급차를 주차하는 사람이 주식 중개인(stockbroker)인 것을 알게 된 크리스가 자신도 그가 다니는 회사에 지원하기로 결심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지원서를 구하기 위해 회사에 들어갈 때 건물 앞에서 기타 치며 노래 부르던 집시 여인에게 '생명줄'과 마찬가지인 기계를 별 의심 없이 맡겼다가 도둑 맞은 일을 시작으로, 주차 위반금 미납 때문에 인터뷰 날 아침까지 구치소에 갇혀 있기도 하고, 남아 있던 의료 기기를 겨우겨우 다 판 후 통장에 입금해 둔 돈 전액이 밀린 세금의 환수로 정부에 차압 당하는 등의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가 그렇게 동분서주하는 사이 아내 린다는 그의 곁을 떠나 버리고, 밀린 집세조차 낼 수 없게 된 그는 자신이 키우겠다고 스스로 맡은 아들 크리스토퍼와 허름한 모텔로, 결국엔 노숙자 쉼터로까지 내몰리는 처지가 됩니다.  





오후 5시 전에 도착해야 간신히 잠자리를 얻을 수 있는 노숙자 쉼터에서 하룻밤을 보내거나 그마저도 안 되는 날은 아들과 밤새 지하철을 타고 돌며 잠을 청하면서 매일 옷과 짐을 모두 싸들고 출근하는 그의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을 착잡하게 합니다. 특히 모텔에서 쫓겨나 갈 곳이 없어진 첫날 밤, 충격과 막막함으로 지하철 의자에 넋을 놓고 앉아 있던 크리스가 문득 생각난 '아이디어'로 아들에게 그 의료 기기가 ‘타임머신’이고 자신들은 원시시대로 돌아갔다면서 공룡이 나타났으니 동굴을 찾아 피해야 한다는 말로 아이를 지하철 안 공중화장실로 데려가 바닥에 휴지를 깔고 재우는 모습은 똑바로 응시하기 힘들 정도의 '고통'까지도 느껴지게 합니다. 역시 저희가 포스팅했던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La vita è bella: Life Is Beautiful)”에서 나치 수용소에 갇힌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두려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현실이 게임 속 상황인 것처럼 꾸며 이야기하던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이 부분에서, 화장실 문을 밖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아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아이의 귀를 막은 채 조용히 눈물을 삼키는 크리스의 얼굴을 응시하고 있다 보면, 자녀를 가진 사람 누구나 그 얼굴 위에 자신의 얼굴이 포개지는 경험을 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일에는 아들과 함께 예배에 참석하여 아이를 가슴에 꼭 안고 찬양을 할 만큼 신실함을 잃지 않는 크리스는, 아이 돌보기와 잠자리 확보 등의 문제로 주식 중개인의 수습 과정인 인턴 기간 중 남들이 9시간 동안 할 일을 6시간 안에 마치기 위해 고객과의 통화 사이에 수화기도 내려 놓지 않으며 시간을 절약하고, 그가 흑인이기에 부당한 대우를 하는 것이 분명한 직속 상사의 커피와 도넛 심부름까지 도맡으면서도 뛰어난 숫자 감각과 원만한 대인 관계, 특유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20명의 지원자 가운데 1명만을 뽑는 최종 인력으로 선발됩니다. 영화에서는 끝부분에 자막으로만 간략히 설명되지만 처음 입사했던 그 회사(Dean Witter Reynolds)에서 익힌 경험을 바탕으로 1987년 자신의 투자사(Gardner Rich & Co)를 설립한 그가 2006년에는 아들의 이름을 딴 대기업(Christopher Gardner International Holdings)의 CEO 자리에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의료 기기는 도난 당하고 가진 돈은 전혀 없는 처참한 상황에서 아내의 떠나겠다는 일방적 통보를 공중전화로 듣게 된 크리스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이 “행복추구권”은, “... 우리는 이 진리들이 자명한(self-evident) 것이라고 믿는바,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결코 양도할 수 없는 권리(unalienable Rights)를 창조주로부터 부여 받았는데(endowed by their Creator), 그 권리 가운데 생명권(Life), 자유권(Liberty), 그리고 행복 추구권(the Pursuit of Happiness) 등이 포함된다”라고 하는, 1776년 7월 4일 선포된 독립선언문에 명시되어 있는 항목입니다. 미국 독립선언서의 내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되는 존 로크(John Locke)의 “통치론(Two Treatises of Government)”에 인간의 자연적 권리가 “생명,” “자유,” “재산”으로 규정된 것과 달리 제퍼슨이 독립선언서에 “재산권” 대신 “행복추구권”을 포함시키면서 ‘조명’을 받게 된 이 천부 인권은, 다른 조항들이 그것 '자체'로서 권리로 선언된 데에 반해 ‘추구할 수 있는’ 권리라는 차별적 특성을 갖습니다. 영화에서도 주인공인 크리스의 독백 가운데 “행복이란 우리가 추구만 할 수 있는 것(something we can only pursue)일 뿐, 실제로는 결코 가질 수 없는 것(we can actually never have it)“이라는 대사가 등장하지요. 


역시 영화에서는 28세에 처음으로 친부를 만났다고만 간단히 언급되어 있는 것에 비해, 실제 삶에서의 크리스 가드너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고 양부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 집에 불을 지른 어머니가 감옥에 간 후 위탁 가정에서 성장했다고 합니다. “사회경제적 지위(SES: Socioeconomic Status)”라는 개념이 한마디로 대변하듯,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의 가정에서 태어난 자녀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다시 낮은 사회적 지위와 어려운 경제 상황에 처하는 악순환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을 생각하면, 크리스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그런 무한 루프 같은 순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확률은 한 자리수조차 되지 못할지 모릅니다. 크리스의 삶에 많은 이들이 환호했던 배경에는 인간 심리의 기저에 위치한 “수퍼맨 증후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는바, 만화나 SF 영화에 등장하는 수퍼 히어로의 초능력에 열광하는 심리의 바탕에 깔린, 인간 가능성의 한계를 초월하는 '힘'과 '강함'에 대한 환상이 그의 입지전적 성공 신화에 투사된 결과가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크리스 가드너와 같은 “수퍼맨“이 될 수는 없으며 또 그럴 필요도 없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실오가리 같은 확률을 뚫고 그가 그러한 기적을 이루어낼 수 있던 데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이웃을 위한 배려,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믿음 등이 모여 세 겹의 줄이 되었기 때문(전 4:12)이리라 짐작하지만, 그가 경험한 '극적' 반전은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정말로 '극적인(dramatic)' 것이기에 쉽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는 일이겠지요. 기적이 작용해야만 자신이 처한 끔찍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세상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며 계획하셨던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특정 계층만 수준 높은 교육의 혜택을 누리고 특정 국가나 지역의 사람들만 부를 과점(寡占)하며 특정 부류의 사람들만 상류 문화를  독점하는 세상 말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마 6:25, 31; 눅 12:22, 29)“는 말씀이 기본적 인권과 품위 유지를 위한 물질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라면, 그 반대편의 권면이라고 할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 알라(딤전 6:8)“는 교훈을 “저를 가난하게도 부하게도 하지 마시고(잠 30:8)“라는 기도로 연결함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양편의 극단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리고 원하시는 우리 삶의 모습이 아닐 테니까요.     


크리스 가드너의 이야기가 에린 브로코비치의 이야기보다 더욱 '수퍼맨' 스토리처럼 느껴지는 데에는 그들의 삶을 둘러싼 주변인들과의 관계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에린의 경우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여러 번의 이혼을 거치는 등 형편과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음에도 자신을 믿고 지지했던 “에드“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인내해 준 “조지“가 있었던 데 반해, 크리스의 경우 아내는 그를 끝까지 기다려 주지 못했고 가까운 친구도 그가 가장 힘들 때 오래전 빌려 갔던 푼돈조차 갚지 않은 채 외면했으니 말이지요. 우리 각자의 삶에서 BC와 AD가 갈릴 만큼의 크고 작은 기적을 경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께서 어려운 형편에 놓인 이들의 일상을 늘 돌아보고 계신다는 믿음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저의 생각이 그저 ‘천진난만한’ 망상으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즉 현실적 어려움에 처한 모든 이들이 희망을 품고 견디며 기다려 마침내 AD의 시점에 이르게 될 때까지, 주님의 팔과 다리의 역할을 할 주위의 돌봄과 사랑이 반드시 병행되어야만 합니다. 행복이 - 그것이 정확히 무엇이든 - 단지 “추구(pursue)“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모든 인간이 실제로 “가지고(have)“ 누릴 수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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