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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anne Sep 05. 2024

수상한 고객들: 우리의 눈길이 가닿아야 할 이웃들

엄마 C의 시선



“수상한 고객들”이라는 ‘수상한’ 제목을 갖고 있는 이 작품은 CF와 뮤직비디오 등의 영상 분야에서 국내 최고 전문가로 인정 받던 조진모 감독이 연출을 맡고 연기력에서 – 특히 코미디 연기에서 –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류승범, 성동일, 박철민 등의 배우가 출연해 2011년 개봉되었던 한국 영화입니다. 제목에서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듯 영화의 중심 내용은 생명보험에 함께 가입한 고객 네 명의 ‘수상한’ 행태와 관련된 것으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고객들’ 모두는 빈곤층의 삶을 살며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서민들인 데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시도했던 경력까지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이들이 단체로 생명보험에 가입하려 한다는 사실 자체가 충분히 수상하고 의심스러운 행위임에도 오로지 실적 향상을 위해 그런 의도를 모른 척하고 가입을 허용했던 직원의 좌충우돌이 이 영화의 중심 내용이지요. 여기까지로만 보면 상당히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였을 영화의 분위기를 감독은 코미디라는 장르를 사용해 풀어 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코미디” 영화라기보다 “코믹한 드라마”로 분류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전직 야구 선수 출신의 “배병우”는 유력 금융회사로부터 스카웃 제의를 받을 만큼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30대 초반의 보험회사 직원입니다. 침대에 누우면 눈앞에 바로 보이는 위치의 천장에 “연봉 10억! 못 하면 넌 짐승 XX!”라는 ‘표어’를 붙여 놓고 밤에 잠자리 들 때와 아침에 눈뜰 때마다 다짐하곤 하는 그에겐 사회적 성공과 물질적 풍요가 삶의 최고 목표입니다. 스카웃을 제의한 상대 회사의 대표가 건넸던 “앞으론 대한민국 상위 0.1% 만 상대하는 겁니다”라는 말에 흥분하여 과거 야구를 함께 한, 그리고 자신이 지금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선배와의 인연도 미련없이 뒤로하며 남은 업무를 정리하던 그는, 생명보험에 가입했던 자신의 고객 한 명이 목숨을 끊는 불의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그의 자살을 조장, 방조했다는 혐의로 유가족에게 고소를 당하는 긴박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이 일을 계기로 불법적 보험 유치를 통해 “챔피언 타이틀”을 얻었던 2년 전의 일을 떠올리게 된 병우는 같은 일의 재발을 막고자 당시 보험에 가입했던 사람들을 찾아 동분서주하기 시작합니다. 자살 시도 경력이 있는 데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이유도 뻔해 보이던 그들에게 가입 후 24개월이 경과하는 보름 뒤면 “면책기간”의 경과(자살로도 사망보험금을 받을 수 있는)가 도래하기 때문입니다.  





병우를 통해 함께 생명보험에 가입한 이들은 우연히 벌어진 불행한 사건에서 서로 얽히고설키게 된 사람들로, 병우처럼 보험사에서 간부로 일하다 해고된 “오상열,” 가수가 꿈이지만 실제 삶에서는 술집에서 취객을 상대로 노래를 부르며 생계를 이어 가는 “안소연,” 아이 넷을 키우면서 환경미화원 남편과 어렵게 살아가는 “최복순,” 몸이 아픈 누나와 어린 조카를 돌보며 자신은 노숙을 하고 있는 “김영탁” 등이 그들입니다. 노래를 부르고 사례비로 받은 돈을 길에서 세어 보던 소연이 그 돈을 날치기 당하는데, 돈을 훔친 남성, 즉 영탁의 매형은 뒤쫓는 그녀를 피해 달아나다 쓰레기 수거차에 치어 사망하고, 그 차의 발판 위에 매달려 있다가 충격으로 떨어져 역시 사망하는 환경미화원이 복순의 남편입니다. 쓰레기 수거차가 급정거하는 바람에 심하게 추돌한 뒷차에서 내리는 이는 하필 그날 해고를 당한 상열이고 말이지요. 등장인물끼리 서로 얽히는 스토리로 인해 예전에 저희가 다룬 “가족의 탄생”이나 그 글에서 함께 소개했던 “펄프 픽션(Pulp Fiction),” “스내치(Snatch),”, “록, 스탁 앤 투 스모킹 배럴즈(Lock, Stock and Two Smoking Barrels)” 등의 작품들이 연상되기도 합니다.


병우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은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복순의 집으로, 늘 삐딱하고 엄마와 사이도 좋지 않은 고교생 큰딸에 더해 나이 차가 많은 세 명의 어린 자녀까지 혼자 키우고 있는 복순은 남편 사망 후 미화원의 자리를 물려 받아 임시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처음 그녀의 집을 찾아 숨을 헐떡이며 걸어 올라갔을 때만 해도 “아직도 이런 동네가 있네. 여기 싹 다 밀려면 한참 걸리겠구만”이라는 어이없는 말을 하던 병우는, 가입했던 생명보험을 ‘연금보험’으로 바꾸도록 만들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로 설득해 봐도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는 복순 대신, 가난한 환경과 늘 허덕이며 사는 엄마로 인해 마음 안에 화가 가득 차 있는 그녀의 큰딸을 ‘공략’하고자 어린 그녀에게 갖은 아첨을 다하기도 합니다.   





두 번째로 찾아간 고객은 소연으로, 자신이 노래하는 곳까지 찾아간 병우를 빚쟁이로 오인해 무턱대고 도망부터 갈 만큼 끊임없는 빚독촉에 시달리고 있는 그녀는 한강변에 버려진 낡은 버스 안에서 십대의 남동생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녀 역시 연금보험으로 바꾸라는 병우의 말에 “내가 죽으면 돈이 얼마나 나오느냐”며 복순이 했던 것과 똑같은 질문을 건네지요. 다음으로 찾아간 사람은 상열인데, 자신이 보험에 가입하려는 이유를 짐작하고도 남을 병우 대신 다른 직원을 통해 생명보험에 든 그는 딸을 아내와 함께 해외로 유학 보낸 후 대리 운전 등을 하며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자기 회사의 생명보험에 자신도 모르게 가입했음을 뒤늦게 알게 되면서 더욱 화가 난 병우는 왜 그런 사람들과 연결시켜 자기를 곤란하게 만들었느냐고 따지지만, 실직 이후 문을 열었던 제과점까지 폐업한 뒤 가족들에게 어려운 사정을 숨기며 고시원에서 혼자 살고 있는 그를 더 이상 몰아대지도 못합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가 만나는 사람은 영탁인데 역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과일 바구니를 – ‘고객’을 찾아갈 때마다 병우가 늘 들고 가는 – 가지고 그가 노숙하고 있다는 지하철역으로 그를 찾는 병우의 모습이 사뭇 우스꽝스럽습니다. 잠자리를 찾아 모여드는 노숙자들을 보며 “야, 진짜 이렇게 노숙들을 하는구나,” “젊었을 때 열심히 살아야지”라는 말로 경멸감을 드러내던 그가 막상 영탁을 만나서는 말끝마다 “고객님,” “고객님”하면서 생명보험을 해지시키기 위해 비위를 맞추려 애씁니다. 이 영화의 설정이 꽤 적절했다고 생각되는 부분은, 애초 그런 동기가 아니었다면 하루하루가 고통의 연속인 극빈층의 삶을 알 수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병우가 선택의 여지 없는 상황 때문에 그들의 일상을 직접 ‘체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스토리라인입니다. 영탁을 설득하며 따라다니는 동안 노숙자 배식소에서 그와 함께 밥을 먹고, 복순이 아프다는 연락을 아이들에게서 받고 새벽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는 그녀의 해고를 막기 위해 대신 일을 하러 나가게 되는 – 그러다 음식쓰레기 봉투가 터져 오물을 뒤집어 쓰는 일도 벌어지고 – 등의 경험을 직접 해 보게 되는 것이니까요. 





단지 게으르거나 능력이 부족해서 그처럼 ‘한심한’ 인생을 살고 있는 것이라 단정하던 사람들의 삶 속에 직접 뛰어 드는 경험을 통해 병우는 그들 삶의 여러 이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틱장애로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욕이 튀어나오곤 하는 영탁이 손바닥만한 낡은 수첩에 몽당연필로 하루 세 가지 감사한 일을 기록하는 모습이나, 빚쟁이들이 무서워 학교도 가지 못하는 소연의 남동생 “혁”이 혼자 익힌 기타 실력으로 자신의 꿈을 펼치고 싶어 한다는 것, 엄마를 싫어하고 무시하는 줄만 알았던 복순의 큰딸 “진희”가 실은 자신들을 남겨 두고 자살 기도를 한 적이 있는 엄마에 대한 원망과 함께 다시 또 그런 일이 벌어질까 봐 느끼는 극도의 두려움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 마음속으로는 엄마를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 사실 등을 말이지요.  


소설 “왕자와 거지(The Prince and the Pauper)” 류의 클리셰처럼 느껴지는 뻔한 줄거리와 결말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었더라도 자신과 전혀 다른 처지인 이들의 삶 속에 직접 들어가 겪은 체험 덕분에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는 누군가의 이야기는 늘 저를 감동시킵니다. 건방지고 거만하다 못해 ‘재수 없어’ 보이던 병우가 그러했듯, 체험의 당사자인 누군가가 ‘변화’한다는 것은 그가 본래 그럴 수 있는 잠재력이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의 방증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묻던 여자친구로부터 “왜 그렇게 천박하게 변했느냐”는 힐난까지 들어야 했던 그이지만, 연봉 10억만이 목표이던 영화 시작 부분의 그가 되뇌이는 “고객님의 꿈이 곧 저의 꿈입니다”라는 말에서 진심이란 전혀 없는 립서비스임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면, 마지막 장면 오상열을 향해 건네는 그의 같은 말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신뢰감을 줄 만큼의 충분한 진정성을 담아 내게 됩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지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며 주님께서 주신 교훈(마 19:24; 막 10:25; 눅 18:25)은 그저 ‘돈이 많다’는 사실 때문에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장애가 발생한다는 뜻으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이 소유자의 눈을 가려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바라보지 못하도록 만들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에 근거한 말씀인 것이니까요. “주 안에서 자비하라”라는 43편의 글에서 소개했던 “가난한 사람들은 유리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며 살지만 돈이 많은 사람들은 거울로 자기 자신만을 되비춰 보기” 때문에 “부자보다 가난한 이들이 주변의 어려운 이웃들을 더 쉽게 도와 줄 수 있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기도 합니다. 처음부터 남달리 교만하거나 이기적인 상태로 세상에 태어나는 사람은 아마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지 그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떠한 경험을 하게 되는가에 따라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자기와 다른 처지의 사람들에게도 사랑과 관심을 베풀 수 있게 되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가 결정되는 것일 테지요.    


삶을 포기할 만큼 절망에 빠진 이들이라도 단 하나 희망의 끈을 찾고 싶은 갈망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이 영화가 전해 주는 또 하나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삶을 포기하고 싶던 차에 “엄마가 없으면 좋겠다”는 큰딸의 말에 자살을 결행하려던 복순이 자신을 찾아 헤매던 딸을 만나 부둥켜 안으며 마음을 돌리는 장면이나, 빚 독촉에 시달리며 여러 번 자살 충동을 느꼈지만 기타에 재능을 보이는 동생의 연주를 들으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소연의 모습, 역시 극단적 선택을 하려던 순간 딸에게서 걸려 온 전화와 “아빠, 사랑해”라는 한마디에 다시 희망의 끈을 부여잡는 상열의 표정에서 확인하게 되듯 말이지요. 영화의 이런 극적 반전이 설득력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그는 세상 어느 누구이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을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 위안이 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단 한 사람으로도 인간은 살아갈 힘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리라 생각합니다.  





생명보험에 가입한 의도를 따져 묻는 병우에게 당시 해고 직후의 상태였던 상열은 “2년 후면 상황이 변할 줄 알았다”라고 답하고 그 대답을 들은 병우는 “2년이란 시간 동안 삶이 희망적으로 바뀔 수 있는 건 군대 계급장밖에 없다”고 매몰차게 말을 받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은 그의 이런 단언이 틀렸음을, 그리고 그 자신도 결국 자기 말이 틀렸다는 걸 깨달았음을 암시하면서 마무리되지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노숙을 하는 영탁이 안쓰럽다 못해 화가 치밀던 병우가 “물건이라도 떼어 팔아 보라”며 쥐어 준 얼마의 돈에서 느낀 따뜻함 때문인지 결국 삶 쪽으로 마음을 돌린 영탁을 보며 병우가 혼잣말로 중얼대던 “살아 줘서 감사하다”는 독백이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며 유난히 마음을 울렸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살아 남을 이유”로서의 희망이 되고, 그런 희망으로 버텨 준 그들을 보며 “살아 줘서 고맙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웃이 되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의 삶을 함께 꾸려 갈 수 있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딸 J의 시선



삶을 대하는 시선과 방향에 뚜렷한 영향을 끼치며 나의 문화적, 정서적 정체성의 일부분으로 자리매김한 영화들이 있는 반면, 별 흔적을 남기지 않았음에도 가끔 어렴풋이 떠오르는 작품들도 있는데, 후자에 속하는 영화 중의 하나가 조진모 감독의 2011년 작 [수상한 고객들]이다. 고백하자면 사실 이 작품을 어떻게 처음 접하게 되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가 내세우는 주인공은 류승범 배우가 연기한 "배병우"로, 한때 프로야구 선수였던 그가 지금은 뻔뻔한 입담 덕에 탄탄한 실적을 쌓아 올린 보험 설계사로 살고 있다. "보험왕" 타이틀을 거머쥐며 실력을 인정 받은 병우는 대한민국의 최상위층만 상대한다는 자산관리 업체에 스카우트까지 되고, 비싼 외제차를 뽑아 연인을 만나러 가며 "연봉 10억"의 목표를 매일 되새기는 소위 ‘잘 나가는’ 인생을 사는 중이다. 하지만 승승장구하는 ‘외적’ 삶과 달리 그의 가치관과 태도는 점점 속물적으로 변해 가고, 이에 실망한 연인 "혜인"(서지혜)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늦은 밤 고객 "황우철"의 전화를 받고 달려 나갔던 병우는, 스스로 삶을 포기하더라도 보험금이 지급될 수 있는 조건이 있겠느냐는 질문을 그로부터 받고 난감해하다 결국 몇 마디의 ‘조언’을 건넨다. 이후 병우가 언급한 방식 그대로 황우철이 사망하자 그의 유족은 자살방조혐의로 병우를 고소하고, 회사에서 팀의 내사까지 결정하며 탄탄대로만 펼쳐질 듯하던 병우의 인생에 제동이 걸리게 된다.




생각지도 못한 위기에 처해 불안해하던 병우는 한때 보험 업계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 "오상열"(박철민) 부장의 부탁으로 2년 전 보험 계약을 맺은 ‘찜찜한’ 고객들을 떠올리게 된다. 모두 자살 시도 경력이 있던 ‘요주의 인물’이었음에도 실적에 대한 욕심 때문에 그대로 생명보험 계약을 마쳤던 그는 그제서야 이들이 스스로 생을 마감할 경우 자신에게 튈 불똥을 걱정하기 시작하고, 어떻게든 그들이 보험을 해약하도록 만들기 위해 고객들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극단적 상황에 몰린 그의 고객들 - 어린 남동생을 건사하며 가장 역할을 하면서도 가수의 꿈을 위해 노력하는 "소연"(윤하)과 틱장애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곤 하는 노숙 청년 "영탁"(임주환), 아이 넷을 혼자 키우고 있는 과부 "복순"(정선경) - 등은 병우가 건네는 입에 발린 회유에도 시큰둥하게 반응하고, 어떻게든 이 고객들을 설득해 보험 계약을 해지시키려 고군분투하던 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삶에 조금씩 녹아들게 된다.





다른 이야기를 하기 전에 먼저 약간의 ‘딴지’를 걸며 양해를 구할 부분이 있는데, 이 영화를 크게 뛰어난 작품까진 아니더라도 나름 괜찮게 기억했던 이전과 달리 이번에 다시 보는 동안 그…뭐랄까…부족한 점들이 눈에 띄었다는 것이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연출과 대사 등에 손발이 구깃해지는 설정들이 꽤 있다. 영화의 초반이 ‘자살방지’라는 약간 생소한 주제를 다루는 코미디 영화로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는 것과 달리 ‘감동’으로 넘어가는 중후반부터는 이 오글거림이 특히 두드러지는 편이다(사실 보편적인 한국형 코미디 영화가 갖는 공통된 단점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전하려는 메시지, 그러니까 삶의 중요성, 힘들고 괴로워도 어떻게든 살아 내야 한다는 인생의 ‘의무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여러 장면들에서 엿보이는 지나치게 교과서적이고 상투적인 표현들에 많은 아쉬움이 남는 것은 사실이다. 어떤 면에서는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에만 치중하느라 그 의도를 ‘어떻게’ 전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과 노력이 충분하지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비슷한 맥락에서 한 가지만 더 짚어 보면 이 영화가 ‘수상한’ 고객들의 어려운 상황과 가난을 그려 내는 방식에도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 사실 대다수 대중매체가 사회의 불편한 부분, 말하자면 소외된 취약 계층이 겪는 현실과 일상을 적나라하게 표현하는 대신 어느 정도 미화하고 ‘낭만적으로’ 묘사하는(romanticize) 경향을 보이듯 이 작품에도 그런 면이 드러난다. 역에서 혼자 노숙하는 영탁이나 달동네 꼭대기의 옥탑방에서 네 명의 자녀와 사는 복순, 남동생과 한강 다리 옆 버려진 버스 안에서 어렵게 지내는 소연의 삶은 그들의 고통을 보여 주는 듯하지만 관객들이 지나치게 불편해 하지 않을 수준, 어느 정도 ‘소화하기 쉬운’ 단계에서 멈추게 된다. 물론 ‘힐링’을 목표로 둔(듯한) 코미디 영화에 가난과 소외의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그려 낼 의무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폐차 직전의 차들로 가득한 소연 주변의 환경을 마치 캠핑장처럼 보이도록 밝혀 주는 오렌지색 전구과 모닥불빛을 보고 있자면 어딘가 ‘낭만화’된 결핍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어쩌면 그런 느낌은 이 영화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정형적’이고 ‘미디어화’된 빈곤의 이미지를 여전히 통용시키며 지나친 죄책감이나 긴급성을 일깨우지 않는, 사회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수준에서만 소외된 약자의 상황을 서술적 장치로 이용하는 현실에 대한 전반적 안타까움일 수도 있겠다.





몇 가지 부족한 부분들을 먼저 서술하긴 했지만 이 작품에 장점이 없는 것은 물론 아닌데, 그 첫 번째로 ‘믿고 보는’ 류승범 배우의 코믹 연기를 들 수 있다. 다른 영화들에 비해 배우 특유의 톤과 텐션이 낮춰진 편이기는 함에도, ‘잘 나가던’ 초반의 허세 가득한 떵떵거림이나 문제적 고객들을 찾아다니며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기다가도 결국 짜증을 감추지 못하는 그의 표정과 궁시렁거리는 대사들은 언제나처럼 맛깔스럽다.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던 병우의 심적 변화가 배우의 외양을 통해 나타나는 연출 방식도 재미있는데, 뭔가 재수 없어 보이는 정장과 안경 차림이었던 병우가 고객들과 가까워지며 까탈스러운 듯 정이 많은 ‘본모습’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캐릭터의 복장과 머리 스타일이 훨씬 더 자연스러워(심지어 더 ‘멋있어’)지는 것이다. 설정이나 서사의 여러 부족한 부분들에도 불구하고 "병우"라는 인물이 결국 고객들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그들이 삶을 포기하지 않길 바라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지는 이유 또한 류승범 배우의 연기가 불어넣는 개연성 덕분이다.





또한 작위적이거나 상투적인 대사가 영화에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로 여러 생각을 할 수 있는 화두를 던지는 대사들도 발견된다는 점 역시 평가할 만하다.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본 후 특히 기억에 남는 대사가 두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황우철의 자살을 방조한 혐의로 병우를 고소한 유가족이 경찰서에서 그와 싸우는 대목에 등장한다. 자살을 암시하는 황우철의 질문을 듣고도 말리지 않은 것에 대한 비난을 듣던 병우는 자신이 “신도 아니고 사람인데” 어떻게 그가 죽을 줄 알았겠느냐고 화를 내지만, 그의 딸은 “사람이니까” 말렸어야 했다고 울부짖는다. 따뜻한 말 한마디만 있었어도 아버지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그녀의 외침에 의해 “사람이라면” 해야 하는 일이 있다는, 하나님이 아닌 이상 타인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수는 없을지라도 “사람으로서” 손을 내미는 것 정도는 마땅히 했어야 할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 일깨워진다. 


이 대사는 영화의 후반부, 고객들을 진심으로 염려하게 된 병우가 그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황에서 애틋한 방식으로 재현되는데, 절박한 마음으로 자신을 찾아온 황우철을 병우가 위로하며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는, 실제 일어나지 않았던 과거의 순간이 병우의 회한처럼 펼쳐지는 장면에서이다. 물론 그런 병우의 행동을 통해 황우철이 궁극적으로 삶을 택할 수 있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만, 병우가 “사람으로서” 충분히 베풀 수 있었을 사랑의 한 조각을 나누었다면 적어도 그가 그 순간을 후회할 일이 없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다행히도 그 실패를 통해 병우는 자신의 ‘수상한’ 고객들에게만큼은 “사람이니까” 할 수 있는 일들, 마음과 진심을 주고 관심과 위로를 나누는 일에 성공하게 되고, 마침내 그들은 병우의 직접적 개입 없이도 스스로 삶을 선택하게 된다.





또 하나의 대사는 병우의 연인인 혜인의 입을 빌어 전달되는데, 지금껏 쌓여 오던 실망감을 황우철의 유족을 냉소적으로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보며 폭발기키는 그녀가 병우에게 “너 왜 이렇게 천박하게 변했니?”라고 묻는 대목에서다. 사실 요즘 들어 ‘돈이 많은’, 정확하게는 부와 권력을 쌓은 소위 ‘기득권’들을 보며 ‘천박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게 되던 터라 이 대사가 좀 반가웠더랬다. 영화의 초반, 병우는 자신이 이제 상위층 고객들을 상대하며 그들의 자산을 굴리는, 그러니까 어떤 ‘특권층’에 속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젖은 채, 카페의 어린 종업원에게 언행을 함부로 하거나 보험 고객이 사는 달동네에 가서도 “이거 싹 다 밀려면 오래 걸리겠네…” 정도의 말밖에 하지 못할 정도로 세상을 ‘생산력’과 ‘물질적 가치’의 잣대로만 판단한다.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포기했다는 충격적이고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보험금 지급 문제나 본인에게 닥칠 손해와 불편만 걱정할 만큼 자신의 경제적, 사회적 우위에 취해 ‘인간됨’은 잊고 만 셈이다. 한 인간의 목숨을 저울에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하며 소외되고 약한 자들을 무시하고 피해자를 도리어 탓하는 잔혹하고 비인간적인 탐욕의 세계관은 아무리 부와 권력으로 고상하게 덧칠되더라도 그 ‘천박함’을 결코 감출 수 없다는 경고로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창조자의 마음을 닮아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석구석의 그림자 속에서 신음하는 약자들을 약탈과 축적밖에 모르는 세력의 천박한 시선으로부터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권고로도 여겨지고 말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이기지 못할 듯 보였던 ‘수상한’ 고객들은 결국 모두 자신만의 평안과 희망을 찾아 가고, 영화는 지금의 세상에서 가장 필요할 아름다운 동화처럼 해피엔딩을 이루며 그 끝을 맺는다. 주요 메시지와 어둠 속의 희망을 강하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오히려 완성도를 낮춘 것이 아닌가 하는 아이러니한 아쉬움은 남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기반하고 있는 마음 자체가 무척 따뜻하고 다정한 것임만은 분명해 보인다. 10여 년 전 이 영화를 처음 본 이후 내용 대부분은 잊어 버렸지만 작품에 대한 기억은 아스라이 남게 된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록처럼 짧게 붙어 있을 뿐이지만 가끔 떠올랐던 장면을 언급하며 마무리하려고 한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면서도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소연이 병우의 도움으로 자신의 남동생 "혁"(정성하)이 천재적 기타 연주 실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한 뒤, 어려운 시간을 통과한 듯한 그녀가 공연장에서 연주되는 동생의 음악을 듣는 대목이다("혁"을 연기한 정성하는 실제 내가 좋아하는 기타리스트인데, 이 영화에 출연한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있다). 경제적 결핍으로 힘겨워하던 이 남매의 ‘고생’이 끝났다는 안도감보다는 소연이 원했던 ‘음악’의 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그러니까 남동생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설정과 그럼에도 그녀가 아쉬움이나 슬픔 없이 눈을 빛내며 동생의 연주를 듣던 모습이 더욱 인상적이었다. 고통과 어려움에서 벗어날 길을 스스로 찾아내려 애써 봤지만 결국은 생각지도 못한 때에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길을 터 주시는 은혜를 직접 경험해 본 사람으로 이 장면을 다시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지금은 어둠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을지라도 손을 내밀어 이끄시는 그 사랑을 통하여 아무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모두가 고난을 헤쳐 나오게 될 것임을 믿는다.  


** 어려움 속에서도 빛을 포기하는 대신 모두 함께 살아 내 주기를 기도합니다. 

24시간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

보건복지상담센터 129

한국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상담 1388 (모바일 상담센터 ‘다들어줄개’ 1661-5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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