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C의 시선
한국에서의 개봉 당시 “백만달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고 하는, 그리고 원제는 “백만 달러짜리 훔치는 법(How to Steal a Million)”쯤으로 번역되어야 옳을 고전 영화는, 거장 윌리엄 와일러(William Wyler) 감독이 연출을 맡고 전설적 대스타들인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과 피터 오툴(Peter O’Tool)이 남녀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1966년 작품입니다. 저희가 이 공간을 통해 다룬 영화들의 대부분이 ‘시간의 검증’을 거친 최신작 아닌 것들이기는 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이번에 다룰 “백만달러의 사랑”과 같은 1960년대 제작 영화는 아직 목록에 없을 만큼 무척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고전 중의 고전’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19세기에 활약하던 영국인 출판업자 조지 브래드쇼(George Bradshaw)의 원작 소설 “Venus Rising”을 영화화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는 작품이지요.
“벤허(Ben-Hur),”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s),” “우리 생애 최고의 해(The Best Years of Our Lives)” 등 글자 그대로 ‘주옥과 같은’ – 실제로 영화를 보지 못했더라도 그 제목만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 명작들을 연출한 윌리엄 와일러 감독은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명장이며, 그가 연출했던 “로마의 휴일”을 포함해 “티파니에서 아침을(Breakfast at Tiffany’s),” “셔레이드(Charade),” “마이 페어 레이디(My Fair Lady),” “어두워질 때까지(Wait Until Dark)” 등의 역시 주옥 같은 명작들에 출연했던 오드리 헵번과,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굿바이 미스터 칩스(Goodbye, Mr. Chips),”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트로이(Troy)” 등등 수많은 역작들에 등장했던 피터 오툴 또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배우들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이들을 흠모하고 그들의 작품을 사랑해 온 제 입장에서는 이번 글을 통해 이처럼 훌륭한 감독과 배우들에 대해 소개할 수 있는 것이 큰 기쁨이자 영광으로까지 느껴집니다.
영화의 여주인공 “니콜 보네(Nicole Bonnet)”의 아버지이며 파리의 저명한 예술품 수집가인 “찰스 보네(Charles Bonnet)”는 반 고흐나 폴 세잔의 그림 같은 희귀 소장품을 경매 시장에서 유통시키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젊은 시절 미술을 공부했고 남다른 예술적 재능도 타고난 그는 사실 유명 화가들의 그림을 위조해 그린 후 진품으로 속여서 파는 ‘사기성’ 농후한 인물입니다. 외동딸인 니콜의 아버지를 향한 염려와 호소에도 불구하고 위작을 만들어 파는 일을 취미이자 ‘오락’인 양 즐기고 있는 찰스는 딸의 노심초사에조차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이지요. 방 안의 옷장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 후 – C. S. 루이스의 소설 “나니아 연대기” 중 “사자와 마녀와 옷장”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 긴 계단을 올라가야 나오는 작업실에서 ‘모조품’ 그림을 그리고 있던 그를 유명 미술관 “끌레르 라파이에뜨 뮤지엄(Musée Kléber-Lafayette)”의 관장이 찾아오면서 소동에 가까운 이 영화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자신의 어머니를 모델로 아버지가 제작했던 가짜 조각품 “벤베누토 첼리니(Benvenuto Cellini)의 비너스” 조각상을 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겁없이 밝힌 찰스의 의사에 따라 그 ‘작품’을 인수하기 위해 찾아온 관장의 방문이었던 것이지요.
위조가 어느 정도 용이한 회화들과 달리 재질이나 제작 시기 등에 대해 정밀 검증이 가능한 조각품을 가지고 ‘장난’하는 것은 너무도 위험한 일임을 호소하는 딸 니콜의 설득을 무시한 찰스가, “100만 불에 판매하라는 제의도 거절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홀륭한 예술품을 감상할 기회를 주기로 한” 자신의 결단(!)을 되레 자찬하며 조각상을 건네주자, 그를 위대한 예술품 소장가로 확신하던 미술관장은 아무런 의심 없이 가짜 “첼리니의 비너스”를 미술관에 버젓이 전시합니다. 개막식이 열리던 날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아버지와 집사가 외출한 후 늦은 밤 홀로 집에 있던 니콜은 수상한 소리를 듣고 아래층에 내려갔다가 아버지가 위작한 고흐의 작품을 훔치려던 강도(?)를 목격하지요. 경찰에 신고하려다 아버지의 정체가 탄로날 것이 우려되어 조용히 강도를 돌려보내려던 그녀는 겨누고 있던 총을 치우다가 실수로 강도의 한쪽 팔에 가벼운 총상을 입히게 됩니다.
부상을 핑계로 자신을 거처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하는 – 실상은 니콜에게 이미 마음을 뺏긴 듯한 – 도둑 “사이먼 더모트(Simon Dermott)”를 그의 차로 운전해 바래다 주고 돌아온 니콜은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합니다. 분명 도둑이기는 하지만 훤칠한 키에 수려한 외모, 그리고 신사적 품격까지 갖춘 그가 자기도 싫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던 중 비너스 상에 관한 보험 서류에 아버지 찰스가 무심코 서명하면서 기부한 작품에 대해서는 진품 검증이 필요 없을 것으로 여겼던 예측과 달리 정밀 검증이 이루어질 것을 알게 된 그들 부녀는 심히 두렵고도 우려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범법자로 밝혀져 감옥에 갈 것이 분명한 아버지가 걱정되던 니콜은 생각 끝에 사이먼을 찾아가 그 비너스 상을 미술관에서 훔쳐 오도록 부탁하는데,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조르는 니콜의 요청을 사이먼이 수락하면서 흥미진진한 ‘보물 탈취’ 드라마가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요즘 같은 사이버 범죄 시대에 다시 봐도 상당히 기발하다고 여겨지는 여러 다양한 아날로그 식 기법을 통해 결국 그들은 소기의 목적을 이루고, 그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진한’ 사랑도 꽃피우게 되지요.
상당한 시대적 격차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 영화의 ‘해피엔딩’을 주도하는 반전은 도둑인 줄 알았던 사이먼이 사실은 미술품 절도 범죄를 다루는 사립 탐정이자 미술관 보안 담당이고 관련 분야 학위까지 소지한 ‘인텔리’로서, 그날 밤 니콜의 집에 잠입했던 것은 찰스가 소장한 작품들의 진위 여부를 은밀히 확인하려던 목적 때문이었음이 밝혀지는 부분입니다. 그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사랑하는 여성을 만났고 그 여성도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영화의 결말이야 완벽한 해피엔드일 수밖에 없겠지요. 물론 미래의 사위 앞에서 다시는 그런 위작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찰스가 니콜과 사이먼이 눈앞에서 사라지자마자 멋모르고 자신의 위조 작품을 사러 온 사람을 향해 다시 마수를 뻗는 ‘위태로운’ 장면으로 영화가 끝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코미디와 로맨스에 ‘강도 행각(heist)’까지 첨가한 유쾌하고 재치 있는 작품이기에 굳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으나, 역시 ‘세상적’ 삶의 행태를 비판적 입장으로 바라봐야 하는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따져 볼 때 영화의 내용 중 가장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는, 대가의 그림들을 위작해 판매하면서도 조금의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아버지 찰스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시의 유럽에서 예술적 식견을 갖춘 부모님 슬하에서 자라며 본인 또한 충분한 교육의 혜택을 누려 지금은 파리의 대저택에서 고급 자동차에 하인까지 두고 사는 사람이라면 분명 ‘특권층’에 속하는 위치임에도, 이런 지위의 사람에게 반드시 구비되어야 할 도덕성과 책임 의식이 -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고도 요약될 수 있을 - 전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문화적 소양이 없는 ‘무지한’ 계층에게 가짜로나마 그런 ‘고급’ 문화를 접하게 해 주면 좋은 것 아니냐는 식의 왜곡되고 일그러진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식이 드러나는 모습을 보다 보면 괜스레 화가 나기까지 하니까요.
이처럼 “사회 지도층 인사”로 분류될 만한 그가 어쩌다가 그런 위조 행위에 몸담게 되었는지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분석 가운데, 젊은 시절 미술을 공부하며 습득하고 싶어 하던 명장들의 비밀을 어느 순간 알게 되었고 – 다시 말해 “빛, 색깔, 그림자, 형체 등을 미묘하게 훔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 시간이 흐르면서 그에 대한 ‘집착’이 생겼을 것이라는 대사도 저의 뇌리에 깊숙이 남았습니다. 어쩌면 진짜와 가짜, 진실과 허위 사이에는 그처럼 ‘미묘한’ 차이만이 존재하며 진짜와 진실의 “빛, 색깔, 형체를 훔쳐 낸” 결과물이 바로 가짜와 허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과 함께 말이지요. 찰스가 “고흐를 그릴 때는 고흐가 되고 세잔을 그릴 때는 세잔이 된다”는 말 역시, 거짓을 반복해서 말하고 행하는 사람은 스스로가 그 자신을 속이는 가운데 본인도 어느 것이 진짜이고 어느 것이 가짜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이리란 암담한 생각까지 들게 합니다.
보험 가입으로 자신의 모든 작품이 검증될 위기에 놓이자 “우리는 믿음과 신뢰란 존재하지 않는 형편없는 상업주의 세상에 살고 있구나”라며 도리어 한탄하는 찰스의 “적반하장” 화법, “유체이탈” 화법을 듣고 있노라면 거짓과 몰염치로 한 나라를 뒤흔들고 있는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고, 미술관장에게 건네려는 ‘가짜’ 비너스를 실수를 가장해서라도 파손시켜 보려는 니콜과 달리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전해 주던 그의 모습을 통해서는 거짓에 찌들어 있는 사람들의 담대함과 ‘당당함’이 진실을 추구하는 이들의 그것보다 오히려 더 강고하다는 황당함까지 느끼게 됩니다.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가 무참히 혼재된 현실로 인해 청소년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겪지 않을까 우려될 정도의 현실에서, 적어도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은 자신을 되돌아보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정신을 바짝 차릴 수 있기를, 그리고 세태에 휩쓸려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일부 목회자들이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표준새번역, 새번역 (If the blind lead the blind, both will fall into a pit)”라는 주님의 준엄한 경고(마 15:14)를 상기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딸 J의 시선
지금까지의 포스팅을 통해 다룬 영화들 대부분이 내가 개인적으로도 좋아하는 작품들이긴 하지만, 윌리엄 와일러의 1966년 작 [How to Steal a Million]은 그중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특별히 애정하는 영화이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전혀 질리지 않는 데다 볼 때마다 기분이 유쾌해지는 작품이기도 한데, 대학 시절 이 영화를 본 뒤 한동안 ‘위작’이라는 주제에 꽃혀 유명 예술품 위조 사례들과 위작을 가려내는 감정 기술 등에 관해 열정적으로 탐구했던 기억도 있다(지금 생각해 보면 당장 급한 공부나 하지 뭔 한가한 짓이었나 싶긴 하지만……흠흠). 한국에선 [백만달러의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듯하지만 이렇게 깊은 애정을 가진 작품에게 그런 불명예를 다시 안겨 주고 싶지는 않은 관계로, 이 글에서는 [백만 달러를 훔치는 방법]이라는 - 원작과 같은 의미의 - 제목을 사용하려 한다.
파리의 상류 사회를 무대로 한 이 영화에서 주인공 "니콜"(오드리 헵번)은 부유한 귀족이자 유명한 예술품 수집가인 아버지 "찰스 보네"(휴 그리피스)와 평온한 나날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러나 사이좋은 이들 부녀는 한 가지 거대한 비밀을 숨기고 있는데, 대대로 쌓아 온 가문의 예술품 컬렉션("보네 컬렉션"이라고 불리는)을 거느리며 상류층 예술 애호가들의 선망을 받는 아버지 찰스가 사실은 뛰어난 '위작' 화가라는 사실이다. 엄청난 부와 명예를 가진 찰스는 굳이 위작을 그려 판매할 필요조차 없지만 자신의 그림을 반 고흐나 폴 세잔 같은 유명 화가들의 작품으로 둔갑시켜 감정사들을 감쪽같이 속여 넘기면서 본인의 뛰어난 ‘실력’을 확인하는 일에 자부심과 자기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대범한 범죄 행각에 전전긍긍하는 니콜과 달리 예술계의 큰손이라는 위상만을 즐기던 찰스는 벤베누토 첼리니(Cellini)의 작품으로 위장한 "비너스" 조각상을 파리의 대형 박물관에 무상으로 대여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귀중한' 조각품을 전시하게 된 것에 엄청난 책임감을 느낀 박물관 측에서 비너스 조각상에 대한 보험을 계약하며 찰스의 행보에 빨간불이 켜진다. 찰스가 별생각 없이 보험 가입을 승인한 후 이에 대한 마지막 절차로 위작 감별 분야의 전문가가 ‘비너스’ 조각상을 감정할 것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림과 달리 조각상의 경우에는 현존하는 여러 기술들을 통해 진품의 여부를 쉽게 가려낼 수 있음을 아는 찰스와 니콜은 충격에 빠지고, 특히 찰스는 비너스가 위작임이 드러날 경우 지금까지의 범행도 줄줄이 밝혀질 것을 예상하면서 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가문과 딸에게 미칠 피해와 불명예를 생각하며 괴로워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한 니콜은 전문가의 감정이 실행되기 전 비너스 조각상을 박물관에서 직접 훔치기로 결심한다. 마침 며칠 전 보네 가문의 값비싼 예술품을 노리고 저택에 숨어든 듯한 도둑 "사이먼"(피터 오툴)과 맞닥뜨렸던 니콜은 ‘절도 경험’이 풍부할 그를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이려 한다. 도둑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말쑥한 데다 니콜에게 ‘범행’ 현장을 들키고도 놀라기는 커녕 차의 운전을 부탁해 얻어 타고 가면서 능글맞은 작업(?)을 벌일 만큼 여유로운 사이먼에게 어딘가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긴 하지만 그런 그는 ‘다행히도’ 니콜의 의뢰를 받아들인다. 24시간 내내 경비원이 감시하는 박물관의 보안 체계와 조각상을 둘러싼 최첨단 장비들, 박물관 근처에 위치한 대통령 사저를 지키는 경찰 등 여러 난점을 극복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니콜은 자신의(정확히는 자기 가족 소유의) 물건을, 그것도 사실상 무가치한 가짜 작품을 스스로 훔친다는 전무후무한 "하이스트"(heist)에 오직 사이먼만을 믿고 뛰어들게 된다.
일단 이 영화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점을 꼽자면 작품이 주는 시각적 즐거움이 크다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고가의 예술품을 훔친다는 설정상 "하이스트"물로 분류되기는 함에도 상류층 사회에서의 ‘우아한’ 범죄 소동극으로 정의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한 이 영화 속에서, 두 주인공은 시종일관 그에 어울리는 세련되고 근사한 모습으로 등장하며 관객들에게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사브리나](1954)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등의 작품을 통해 이미 자신의 ‘패션’을 영화 속 조연의 위치 정도로 격상시켰던 오드리 헵번은 이 영화에서도 특유의 고급스런 스타일링과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니콜"이라는 인물을 완성해 간다. 신사와 한량 그 사이 어딘가에서 니콜과 관객을 현혹시키는 "사이먼" 역시 마찬가지인데, 개인적으로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약간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피터 오툴의 시리도록 푸른 눈이 이 역할에서는 완벽할 만큼 잘 들어맞는다. 보네 저택에 침입한 사이먼이 혼자 집에 있던 니콜과 마주치며 시작되는 둘의 티격태격 애증 관계는 로맨틱 코미디의 진부한 공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드라이한 위트를 감춘 통통 튀는 대사와 캐릭터들의 매력, 그리고 배우들 본연의 카리스마가 이 영화의 생동감과 참신함을 끝까지 유지시킨다.
이 영화를 특히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박물관에서 조각상을 훔치는 과정을 풀어 내는 ‘아날로그’적 방법으로, 앞서 말했듯 이 영화는 ‘소동극’, 그러니까 범죄를 진지하게 다루기보다 코믹하게 표현하는 "caper"’ 장르에 더 가깝다. 니콜은 물론 사이먼 또한 사실은 범죄와 거리가 먼 삶을 살아온 인물이기에, 이들 둘이 '생전 처음' 도둑질을 하며 툭탁이는 어설픈 모습들이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로 작용하게 된다. 다른 할리우드 ‘하이스트’ 무비에 등장하는 치밀한 작전과 화려한 첨단 기술 대신 사이먼은 자석과 부메랑, 밧줄과 테이프 같은 투박한 도구나 인간의 심리를 이용하는 등의 단순한 계획을 구상하지만, 이를 통해 영화의 창의성과 기발함이 오히려 더 두드러진다. 박물관 폐장 시간, 바닥에 동전을 떨어뜨려 주의를 분산하는 방법으로 비품 창고에 들키지 않고 숨는다거나 조각상을 보호하는 적외선에 부메랑을 던져 알람을 작동시키며 경비원들이 기계의 오작동을 의심하게 하고, 거듭 울리는 시끄러운 경보음에 허탕을 반복하던 경비 대장이 박물관에서의 소란으로 잠이 깼다는 대통령의 질책을 듣자 아예 스스로 알람 시스템을 꺼 버리게 만드는 그의 작전은 소박하고 평이한 만큼이나 정직(?)하고 ‘낭만적’인 측면도 함께 드러낸다.
사이먼과 니콜의 이 '성실하고도 지루한' 범행 과정은 어떤 면에서 아버지의 거짓을 바로잡으려는 니콜의 순수한 동기와 비슷한 결을 띈다. 이렇게 처음부터 대형 박물관이라는 어려운 도전을 할 게 아니라 ‘작은’ 절도부터 시작하자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신을 회유하려 드는 사이먼에게 "어떻게 내가 내 것 아닌 물건을 훔치겠느냐"고 대답하는 니콜의 대사도 여운을 남기고 말이다(이 장면에서 할 말을 잃은 피터 오툴의 표정이 압권이다). 몇 시간씩 좁은 창고에 갇혀 고생하며 조금씩 조금씩 계획을 실천해 나가는 이들의 ‘범행’은 사실 아버지의 거짓말과 사기가 불러들인 문제를 딸이 해결하려 애쓰는, 다시 말해 자신과 연관된 잘못을 ‘책임’지고 원 상태로 ‘복원’하려는 지난한 서사로도 이해할 수 있다.
위작, 그러니까 ‘가짜’를 만들어 내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들이는 아버지가 "반 고흐도 이렇게 열심히 하진 않았을 것"이라며 으스대자 "반 고흐는 반 고흐니까 그럴 필요가 없었다"고 니콜이 답하는 장면에서도 시사되듯, 진실은 그저 진실로 존재할 뿐인 반면 거짓을 만들어 내고 유지하는 데에는 엄청난 수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영화를 보는 동안 다시 곱씹게 되었다. 다만 그 거짓이 ‘진실’로 자리잡은 이후엔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며 - 가짜 ‘비너스’ 조각상을 보고 감동에 사로잡히는 박물관 관장과 그 조각상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부호 "리랜드"처럼 - 그 거짓을 영속시키는(perpetuate) 집단이 생겨난다는 비극이 여기에 부수된다. 그렇기에 그들이 비호하는 거짓과 가식을 되돌리고 무산시키기 위해서는, 사실상 ‘정의’의 편에 섰음에도 감옥행을 각오해야 했던 니콜과 사이먼의 경우처럼 몇 배의 노력과 희생이 요구되는 것일 테고 말이다.
여기에서 재미있는 점은 ‘눈이 가려진’, 혹은 스스로 눈을 가리고 있는 영화 속 대부분의 인물들과 달리 사이먼은 보네 가문이 아닌 외부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이먼과 투닥대던 적대적 관계에서 사랑하는 연인 사이로 발전하는 동안의 니콜은 그에 의해 두 가지 ‘반전’을 경험하는데, 첫 번째는 그가 비너스 조각상이 위작이라는 것, 즉 세간에 알려졌듯 ‘백만 달러’ 짜리 예술품이 아니라 아무런 가치 없는 가짜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영화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두 번째 반전에서는 사이먼이 실제론 도둑이 아니라 위작 감별을 전문으로 하는 사립 탐정이자 여러 대형 박물관의 보안 문제를 점검하는 고문이라는 사실도 드러난다.
이는 사이먼이 직업 윤리(?)에 반하면서까지 니콜을 도울 만큼 그녀를 사랑한다는 애정의 증거일 수도 있지만, 더 넓게는 그가 찰스의 사기 행각에 속지 않았다는, 그러니까 단 한 번도 비너스 조각상을 가짜 아닌 진짜로 보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각상의 얼굴을 자세히 보던 사이먼이 니콜과 닮았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니콜은 나중에 ‘비너스’가 사실 자신의 할머니를 모델로 남편인 할아버지가 조각한 위작임을 설명하면서 사이먼이 지금까지 그녀와 조각상이 비슷하게 생겼음을 깨달은 유일한 사람이라고 지적한다. 비너스 조각상을 국보 취급하며 애지중지했던 박물관 관장도, 조각상을 본 순간부터 갖고 싶어 잠도 이루지 못했다는 대부호 리랜드도 콩깍지가 씌인 눈으론 보지 못했던 부분을 사이먼은 ‘맑은 눈으로’ 간파할 수 있었던 셈이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니콜과 사이먼 사이에 피어난 사랑 또한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는 어떤 ‘연대’의 관계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믿고 싶은 것만을 믿는 무리들로 인해 진실은 점점 빛을 잃고 거짓이 각광 받는 상황이 전 세계적으로 번지고 있음을 우려하게 되는 요즘이다. 가짜와 거짓을 생산해 내는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식들, 그 어마어마한 파급력 사이에서 그저 그 자체로 성실하게 존재할 뿐인 진실이 초라하고 지루해만 보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의 무책임과 방관, 혹은 무언의 협조 속에 확산된 거짓과 잘못들을 바로잡고 고쳐 가는 그 길고 고단한 과정을 외면하는 일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의 눈을 가리지 않은 우리가 그 여정에 뛰어들기만 한다면 적어도 길 위에서 든든한 동반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모든 거짓과 비밀을 밝힐, 또렷한 시선으로 진실과 진심을 감별할 권한과 능력을 가지시고도 우리에게 스스로 진리를 복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는, 바로 그분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