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두 교황: 순수하고 진솔한 ‘두 노인’의 이야기

by Joanne

딸 J의 시선



몇 달 전, 프란치스코 교황의 선종 이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전 세계의 추기경들이 바티칸으로 모여드는 과정에서 영화 [콘클라베](Conclave)가 계속 언급되는 것을 흥미롭게 지켜본 일이 있다. 물론 새 교황을 정하기 위한 선거 절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뜨거운 이슈 거리임이 틀림없지만 이번 일은 영화의 흥행과도 시기적으로 맞물리며 특히 더 많은 관심이 쏠린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새로운 교황이 대중 앞에 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보다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영화는 [콘클라베]가 아니라(이 영화도 무척 재미있게 보기는 했다)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감독의 2019년 작 [두 교황](The Two Popes)이었다.


[두 교황]은 제목 그대로 두 명의 교황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 이례적 사건, 그러니까 2013년 스스로 교황 직에서 물러난 베네딕토 16세(Pope Benedict XVI)와 그의 뒤를 이은 프란치스코 교황(Pope Francis)의 실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직후 시점에서 시작하는 이 영화의 초반부, 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될 아르헨티나의 추기경 "베르골리오"(조나단 프라이스)는 콘클라베에 참여하기 위해 바티칸에 도착한 뒤 전 교황의 잠정적 후임자로 여겨지는 독일의 추기경 "라칭거"(안소니 홉킨스)와 만난다. 지나치게 전통적이며 고지식하다고 인식되는 라칭거의 대안을 찾던 몇몇 추기경들이 베르골리오를 대신 지지하면서 얼떨결에 교황 후보에 오른 그는 라칭거의 미묘한 견제 대상이 된다. 몇 번의 투표를 거쳐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지만 그(베네딕토 16세)에 대한 대중의 평가는 엇갈릴 뿐더러, 베르골리오와 같은 교회 내부 인사들마저 교황청의 방침과 방향성 등에 관해 꾸준한 비판을 제기한다.


SE-fe51c1d1-2ad9-4962-990e-e7f35b6c3185.jpg?type=w966


그렇게 시간이 흐른 2012년, 추기경 자리에서 물러나 평범한 신부로 돌아가기로 마음 먹은 베르골리오는 사임을 허락 받기 위해 교황을 알현한다. 둘은 오랜만에 교황의 여름 별장에서 재회하지만 눈엣가시인 베르골리오의 사임 의사를 반길 줄 알았던 라칭거(이제는 베네딕토 16세)는 베르골리오의 청을 딱 잘라서 거절한다. 자신에게 비판적인 것으로 유명한 베르골리오가 별다른 이유 없이 추기경 자리에서 내려온다면 누구라도 교황청의 부당한 압력의 결과라고 보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당황한 베르골리오는 평범한 성직자로 돌아가고 싶다는 자신의 심정을 거듭 설명하지만, 교황청의 심각한 비리 스캔들로 곤욕을 겪으며 극도로 예민해져 있는 라칭거는 베르골리오의 올곧은 성향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별장의 평온하고 목가적인 분위기가 무색하게도 이들의 대화에는 점점 날이 서고, 현재 가톨릭 교회가 직면한 문제들에 대한 둘의 상반되는 성향과 입장이 드러나며 그들 사이의 갈등은 더욱 고조된다.


하지만 그날 밤 “그냥 형제로서 시간을 보내자”는 라칭거의 요청으로 둘은 휴전하듯 함께 와인을 마시고, 라칭거의 피아노 연주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상대에게 자신의 진솔한 내면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날 함께 바티칸으로 돌아간 그들 둘은 훨씬 더 부드러워진 분위기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 가는데, 이때 라칭거는 교황직을 사임하겠다는 자신의 계획에 관해 처음으로 베르골리오에게 털어놓는다.


SE-9422b5b0-7df2-408c-9166-7935a94721df.jpg?type=w966


작품에 대해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이 영화가 무척 ‘재미있다’는 사실이다. 제목이나 주제로만 봤을 때는 다소 고루하거나 진지하기만 한 영화로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두 교황]은 다정하고 경쾌한, ‘코미디 드라마’로까지 정의되어도 좋을 만한 작품이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바티칸의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ABBA의 “Dancing Queen”을 흥얼거리는 장면이나 콘클라베의 특이한 과정들, 바티칸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배경 위로 편곡된 재즈와 팝송이 흐르는 연출에서 보이듯 이 작품은 교회의 전통과 역사를 존중하되 지나치게 숭배하지 않는다. 이 영화 속에서의 성직자는 결국 ‘인간’일 뿐이기도 하고 말이다.


안소니 홉킨스와 조나단 프라이스의 연기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것도 영화가 가진 커다란 매력 중 하나이다. 두 배우는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교황이라는 실존 인물들의 성격과 성향(정확하게는 대중들이 생각하는 두 교황의 ‘이미지’)을 그대로 구현해 낼 뿐 아니라 더욱 깊고 창의로운 해석을 부여하며 영화를 단순한 역사적 사실 재현 이상의 무언가로 승화시킨다. 조나단 프라이스는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자한 미소를 넘어 약간은 짖궂은 눈빛과 경이로운 친화력, 고통과 분노를 유머로 해소하는 성숙함을 사랑스럽게 표현해 낸다. 안소니 홉킨스 또한 고루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학자처럼 보이는 라칭거 속에 깊이 숨은 외로움과 순수함, 세상과 사람들을 향한 수줍은 그리움을 부드럽고 연민 가득한 모습으로 드러내 보인다.


SE-e458a11f-2a9f-487b-ba1e-0abdd5d822c3.jpg?type=w966


두 배우의 연기가 보여 주듯 이 영화의 의도는 2013년의 역사적 진실을 다큐멘터리 방식으로 똑같이 재현해 내는 작업보다는 당시의 상황에 대한 공백들을 상상으로 채우며 두 교황의 관계를 해석하고 탐험하는 일에 중점을 두고 있다. 영화의 서사는 극 초반까지만 해도 완벽한 상극으로 보이던 베르골리오와 라칭거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를 알아 가고 교감하는 과정을 통해 결국 ‘이해’에 이르는 흐름에 보다 집중한다. 그런 면에서는 이 작품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종교적’인 영화로서보다는 인간 대 인간으로 생성되는 관계의 본질을 다루는 “버디 무비”의 문법을 더 따른다고도 볼 수 있을 듯하다.


와인을 나누고 함께 음악을 듣던 밤, 베르골리오는 사제의 길을 걷기 전 자신의 삶과 사명을 깨달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라칭거는 자신이 좋아하는 TV쇼를 보여 주며 교황의 자리에서 느끼는 외로움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이를 계기로 그들 둘은 동일한 약점과 고통, 불안감 등을 지닌 불완전한 인간으로 살며 다른 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은 ‘형제’로서의 진실한 교감을 시작한다. 그 이후의 두 사람은 보이는 면들이 전부가 아닌 모순되고 복합적인 자신의 본모습을 상대에게 노출하는데, 재미있게도 이렇게 서로의 삶과 고통에 공감하며 서로를 ‘이해’할수록 두 주인공은 점차 상대방과 ‘섞이는’ 모습으로 변화한다. 한 인물의 대사가 이후 상대방을 통해 똑같이 반복되는 연출법이 자주 사용될 뿐 아니라 그 인물이 아예 상대와 입장을 바꾸며 평행적 구조를 이루기도 한다. 사임을 허락 받으려 바티칸에 왔던 베르골리오는 도리어 교황의 사직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 되고, 교회의 오랜 전통과 관습의 경직성을 비판하던 과거가 무색하게도 종신 교황 직의 관례를 들어 라칭거의 사임을 막으려 한다. 이와 정반대로 교회의 전통을 경시한다며 베르골리오를 못마땅해하던 라칭거는 스스로 교황직에서 물러나는 ‘혁신’을 논할 뿐더러 베르골리오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바란다는 소망까지 넌지시 내비친다. 각 인물을 규정하는 듯 보였던 성향과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며 상대방이 보이던 입장을 자신이 취하게 되는 모양새인 것이다.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열띈 논쟁을 벌이던 동안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상대방을 ‘이해’하고 ‘섞이는’ 동안 자연스럽게 일어난다는 영화의 전개가 보는 이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상대에 대한 ‘이해’를 통한 두 인물의 변화와 성장은 영화의 후반부 서로에게 자신의 죄를 고해하는 장면에서 극적으로 발현된다. 두 인물의 가장 진실된 모습이 이때 드러나는데,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혼잡한 거리에서 소외된 약자를 섬기고 세상을 따뜻하게 품으며 가장 이상적인 성직자의 삶을 산 듯 보이던 베르골리오는 예전 아르헨티나 독재 정권 아래에서 침묵했던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죄인’의 초라한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세상 모두에게 사랑과 은혜를 전하던 그가 막상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본질적인 모순과 고통이 드러나는 순간, 그를 감싸 안아 주는 것은 다름 아닌 라칭거이다. 하나님의 음성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며 괴로워하던 그는 그 순간 ‘성부(Holy Father)’의 정체성을 회복하며 의심할 수 없는 확신과 지혜를 담아 베르골리오에게 신의 사랑과 자비를 전한다. 이때 “너의 죄를 사한다”는 라칭거의 선언은 베르골리오와 라칭거 두 사람 모두를 위한 위로의 울림으로 느껴진다.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받는다는 것이 어쩌면 ‘구원’과 맥락을 같이 하는 일일 수 있다는 시사로도 느껴지고 말이다.


베르골리오와 라칭거가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한 이후에야 비로소 움직이고 성장하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주님의 이끄심을 따르는 삶이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만 온전해지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는 광야에서 힘겨워할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쩌면 상대의 고통과 외로움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선택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주님의 목소리가 되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애정 표현에 인색하던 라칭거가 마지막엔 베르골리오의 포옹을 그에게 돌려 주었듯, 우리 또한 언젠가는 우리의 모든 이웃과 어색하지만 다정한 우정을 회복할 수 있기 바란다.


SE-c5246a16-399a-4d09-a6af-b5ec6aac4ac9.jpg?type=w966


P.S.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난니 모레티 감독의 2011년 작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We Have a Pope)도 언젠가 다뤄 보고 싶다. 콘클라베를 위해 모인 추기경들 중 그 누구도 ‘교황’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원하지 않는다는 살짝 비틀린 설정이 재미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이 작품을 [콘클라베], [두 교황]과 함께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엄마 C의 시선



“콘클라베(conclave)”라고 불리는,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하던 교황 선출 방식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이와 관련된 영화들 역시 대중들로부터 적지 않은 관심을 받게 된 듯합니다. 그 가운데에도 비교적 최근(2019년)에 공개되었던 영화 “두 교황(The Two Popes)”은 얼마 전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이 등극하기 전 - 즉, 추기경 베르골리오(Bergoglio)로 불리던 당시 - 그 시기의 교황이던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와 나누는 대화와 토론, 때로는 격론에 가까운 논의들이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면서 평단과 대중들로부터 큰 반향을 얻었던 작품입니다. 작가이자 극본가인 엔서니 매카튼(Anthony McCarten)이 자신의 2017년 작 희곡 “교황(The Pope)”을 직접 각색해 만든 극본으로 영국, 미국, 이탈리아, 아르헨티나가 공동 제작해(넷플릭스 제작) 발표한 작품으로서, 2019년 8월 “텔류라이드 영화제(Telluride Film Festival)”를 통해 세계 최초로 상영된 바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 “시티 오브 갓(Cidade de Deus),” “콘스탄트 가드너(The Constant Gardener),” “눈먼 자들의 도시(Blindness)” 등을 연달아 발표했던 브라질 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Fernando Meirelles)가 연출을 맡은 이 영화에는, 명품 배우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와 조너선 프라이스(Jonathan Pryce)가 각각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골리오 추기경(프란치스코 교황)으로 ‘투톱’ 주인공을 맡으며 열연했습니다. 그의 이름을 들으면 저절로 떠오르는 영화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에서 주인공 “한니발 렉터”로 출연해 ‘15분 등장’으로 아카데미상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앤서니 홉킨스는 물론, “캐러비안의 해적(Pirates of the Caribbean)” 시리즈 1, 2, 3편에서 맡았던 “웨더비 스완 총독” 역으로 한국 관객들에게도 친숙할 조너선 프라이스 역시 과거 영화들에서 보여 온 이미지를 한순간에 불식시킬 만큼 완벽한 노사제의 모습을 구현해 냅니다. 두 사람 모두 “경(Sir)”이라는 작위를 받아 이름에 그 호칭이 붙여질 만큼의 큰 영예를 누리게 된 이유, 즉 자신들의 뛰어난 연기력을 이 작품에서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것이지요.



사건과 사건이 꼬리를 무는, 흥미진진한 스토리와 장대한 스펙터클로 이루어진 영상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내용을 설명하면 “재미 없겠다”거나 “지루하겠다”라는 대답이 곧바로 나오리라 짐작될 만큼 특별한 ‘줄거리’가 없는 작품이지만 – 현직 교황과 미래에 교황이 될 두 노인이 주고받는 대화가 중심 내용이기에 – 그렇다고 재미가 없다거나 지루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되는, 한번 보기 시작하면 끝까지 멈출 수 없게 만드는 ‘재미’와 ‘흥미’의 요소들을 고루 갖춘 훌륭한 영화입니다. 성향과 기질이 전혀 다른 두 인물이 처음에는 서로의 ‘다름’을 부각하며 대립하다가 진솔하고도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마음을 열어 가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 낸 이 작품은, 교황청 소유의 여름 별장인 카스텔간돌포(Castel Gandolfo)에서 시작하여, 로마로 함께 가는 길의 교황 전용 헬리콥터 안, 교황의 관저, 그리고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프레스코화가 천장에 그려져 있는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 등으로 장소를 옮겨 가며 두 사람의 개인적 고민과 갈등, 더 나아가 세계적으로 편만한 여러 문제들에 이르기까지의 다양한 주제에 관한 논의를 재미와 감동을 담아 관객들에게 선사합니다.


일반적으로 재임 교황의 선종에 의해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관례와 달리 베네딕토 16세는 건강상의 이유로 – ‘고령’을 이유로 들어 – 2013년 스스로 사임을 선언한 경우로서, 1294년 노령(당시 84세)에 비해 직무가 과중하다는 이유로 사임했던 첼레스티노 5세(Caelestinus V)와 1415년 서방 교회 대분열을 해결하려는 목적으로 사임했던 그레고리오 12세(Gregorius XII) 이후 600년 만에, 그리고 역사상 세 번째로 자진 사임한 교황으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베르골리오 추기경에게 차기 교황 직을 인계할 것을 염두에 두고 사임을 결정하려 하던 베네딕토 16세의 의중과는 달리, 당시 교황청의 이런저런 스캔들로 천주교 전체의 명성과 이미지에 큰 타격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추기경 직의 사임을 교황에게 요청하기 위해 로마에 갔던 베르골리오는 예기치 않은 그 같은 제안에 대해 완강히 거부하며 응하려 들지 않습니다.



2005년 4월 초,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교구의 대주교를 역임하고 있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이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선종 소식을 듣고 신임 교황 선출을 위해 바티칸으로 향하는 모습이 영화 초반 비춰지는데, 세 차례에 걸친 콘클라베 결과 독일인인 요제프 라칭거(Joseph Ratzinger) 추기경이 선출되어 베네딕토 16세로 등극할 당시, 득표수에서 2위를 차지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교황 선출식 이전부터 ‘강력한 라이벌’이던 입장에서 신임 교황에 의해 은근한 견제를 받는 위치에 놓입니다. 그로부터 7년 뒤인 2012년, 가톨릭 교회가 “바티리스크(바티칸 리크스 스캔들: Vatican leaks scandal)”라는 기밀문서 유출 사건에 휘말리면서 교황(베네딕토 16세)이 사건을 은폐했다는 의혹이 꾸준히 제기되는 가운데 교황청이 아동성추행 스캔들에 연루된 신부들을 관대하게 처분했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며 교황의 입지는 좁아지고 교회는 여론의 뭇매를 맞게 되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추기경 직을 사임하겠다는 요청서를 바티칸에 수차례 보내고도 답장을 받지 못하자 직접 로마로 가기 위해 비행기 티켓을 끊고 준비하던 베르골리오는 ‘때마침’ 바티칸으로부터 방문을 요청하는 서한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하여 마주한 교황의 여름 별장에서 베네딕토 16세와 베르골리오 추기경 사이에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되는 것인데, 가톨릭의 전통과 원칙을 중요시하는 베네딕토와 교회의 변화와 개혁을 추구하는 베르골리오(프란치스코)는 그 같은 서로의 근본적 차이점에 더해, 교황청이 처한 난국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베네딕토에게 베르골리오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감정, 그리고 이처럼 어려운 상황에서 추기경 직을 내려놓겠다고 나서는 베르골리오를 향해 베네딕토가 드러내는 못마땅한 감정까지 얹혀지면서, 둘 사이의 대화는 원만하게 진행되기 어려운 형국을 맞습니다.


SE-a8c415c0-4926-4b83-9b74-4579b73ba4fb.jpg?type=w966


추기경과의 접견에서도 서로의 복장에서 격식을 따질 만큼 원칙주의자인 베네딕토가 그런 식의 의례나 권위에 관해 자신과 정반대의 견해를 가지고 있는 – 사실은 그렇기에 교회 개혁의 적임자로 자신이 낙점한 – 베르골리오에게 본인의 사임 의사를 밝히며 그를 다음 교황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의중을 밝히자 베르골리오는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는 과거의 일들, 즉 “더러운 전쟁(Guerra Sucia)”으로 불리는 1970년대 아르헨티나의 군부독재 당시 정권에 일정 부분 협조했다는 오명을 얻으며 비판받았던, 또한 동료들과 함께 독재 정권에 맞서지 못했던 사건을 회상하며 자신은 교황이 될 자격이 없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교황은 그의 그런 행위가 동료 성직자와 신자들을 구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는 사실과, 이후 민주주의 회복 시기 교구에서 축출까지 당했던 그가 속죄의 마음으로 빈민들을 돌보며 살아온 지난 생애를 상기시키면서 간결한 한마디를 건네는데, 바로 “우리는 하나님 에 있지만 결코 그분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We live in God, but we are not of it)”라고 하는, 인간의 ‘영적 자만’에의 각성을 촉구하는 동시에 따뜻한 위로가 되기도 하는 일갈입니다.


시스티나 성당 본당에서의 베르골리오의 고해성사에 이어 옆방으로 자리를 옮긴 후의 베네딕토는 교회와 바티칸의 권위를 지키려 성추문 사건의 은폐를 시도한 본인의 행동에 대해 회개하며 자신 역시 죄를 고백하는 고해성사를 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으며 자기가 맡은 직에서도 그만 물러나고 싶다는 진솔한 고백이 여기에 덧붙여지지요. 인간인 사제가 다른 인간의 고해성사를 받고 죄를 용서한다고 선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늘 의문을 갖고 있었고 지금도 물론 그런 의문에는 변함이 없지만, 영화의 그 대목에서 베르골리오가 앞서 베네딕토에게 전했던 “고해성사가 죄인/가해자의 마음을 정화할 수는 있어도 피해자를 도울 수는 없다(Confession cleans the sinner’s soul; It does not help the victim)”라는 정직한 인식을 깊은 여운과 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며 한없이 낮아지는 그들의 모습 속에는 규율을 신봉하는 전통주의자, 개혁을 지지하는 진보주의자라는 식의 교황 베네딕토 16세와 추기경 베르골리오의 표면적 정체성이 아무런 의미도 없어짐을 느끼게 되는 장면이기도 했고 말이지요.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두 사제의 대화 가운데 기억하고 공유하고 싶은 내용들이 워낙 많아 모두 옮길 수는 없지만, 과거 의견이 서로 같았던 몇 가지 민감한 사안들에 대해 달라진 베르골리오의 입장을 지적하며 현실과 타협(compromise)했다고 비판하는 베네딕토에게 베르골리오가 자신은 변화(changed)한 것뿐이라고 대답하고, 이에 대해 베네딕토 교황이 “변화가 바로 타협(Change is compromise)”이라고 반박하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체가 변화의 과정”이라고 말한 베르골리오가 “하나님도 변화하고 움직이셔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라고 다시 반박하던 대화가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예전에는 확신이 있었던 일에도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고백하는 베네딕토에게 베르골리오가 “교황조차도 그렇다는 것인가”라고 묻자 “교황이어서 더 그런 것 같다”며 “영적인 보청기(a spiritual hearing aid)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다”라고 하던 대사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교황이든 평범한 신자이든 그저 겸손과 순종이라는 한 가지 자세밖에는 취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말들이었습니다.


로마에 처음 도착했을 때 공항에 마중 나온 운전자가 짐을 대신 들어 주겠다는 것도 사양하고 차에 탈 때도 운전석 옆 자리에 앉을 만큼 권위를 세우는 일과는 거리가 먼 베르골리오는, 여름 별장에 도착해 교황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정원사와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누고, 이혼한 이들처럼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성만찬을 베푸는 자신의 행위를 지적했던 베네딕토에게 “성만찬은 도덕군자에게 내리는 이 아니라 굶주린 사람을 위한 음식(Communion is not a reward for the virtuous, but food for the starving)”이라고 말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낮은 곳을 향하는 일이 몸에 밴 인물입니다. “자비는 벽을 허무는 다이나마이트(Mercy is the dynamite that blows down walls)”라거나 “는 치유되어야 할 상처이지 주홍글씨 같은 낙인이 아니다(Sin is a wound, not a stain)”라고 하는 주옥 같은 말들 역시 평소 그런 신념으로 무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저절로 나오기 어려웠을, 깊은 사랑과 진리를 담고 있는 명언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영화를 보며 제가 더욱 감명을 받은 인물은 사실 후에 교황(프란치스코)이 되는 베르골리오가 아니라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교황(베네딕토 16세)의 자리를 그에게 넘겨 주는 라칭거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의 성자”로 불리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인품과 사역에 대해서는 익히 듣던 바가 있었던 데 반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베네딕토 교황의 인간적 면모를 이 영화에서 처음 접하게 되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당시의 가톨릭 교회가 직면했던 위기와 변화에의 요구를 자신보다 더 잘 감당할 수 있을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성향의 베르골리오의 본인보다 뛰어난 부분들을 인정하고 그에게 교황 직을 넘기겠다는 결단을 내린 용기와 인품에 대해 받은 감명이 보다 큰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누구나 숨기고 싶을 자신의 허물과 부족함을 끄집어내 보이면서 그에 대해 철저히 회개하는 자세처럼 숭고하고 존경스러운 인간의 모습은 달리 없으리라는 생각으로 여러 번 마음이 먹먹해지기도 했고 말이지요.


늘 별 맛도 없을 독일 음식으로 혼자 식사를 하던 베네딕토가 베르골리오와 가까워지면서 피자와 탄산음료를 함께 즐기는 모습, 그리고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시 콘클라베를 위해 만났을 때만 해도 그룹 “아바(ABBA)”의 “댄싱 퀸(Dancing Queen)”을 휘파람으로 흥얼거리는 베르골리오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베네딕토가 깊은 대화를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 후 “비틀즈(Beatles)”를 좋아하는 그에게 그들의 음악 CD를 선물하는 장면 등은 마음이 따뜻하다 못해 눈시울이 뜨거워지게까지 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의 말에 귀기울임으로써 서로 다른 ‘주의’나 ‘사상’ 등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관계, 프란치스코 교황이 즐겨 사용한 말로 알려진 – 저희도 예전에 올렸던 “더 테러 라이브”에서 언급한 바 있던 – ‘벽’이 아닌 ‘다리’를 세우는(Build bridges, not walls) 관계가 우리 사는 세상의 여기저기에 형성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실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해 주는 영화였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완득이: 숨어 있는 그들도 ‘꽃’으로 피어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