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J의 시선
짐 자무쉬 감독의 2013년 영화 [Only Lovers Left Alive]가 한국에서 개봉됐을 때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라고 붙여진 제목을 보며 흥미롭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 원제의 의미를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연인들]이라는 뜻으로 이해했었기 때문인데, 내가 생각했던 의미보다 훨씬 아름답게 붙여진 이 제목을 영화 자체보다 더 자주 떠올리게 된다. 그 영화와 전혀 관련 없는 내용과 배경임에도 [왕과 사는 남자]를 본 이후 후유증처럼 남아 있는 감정을 곱씹고 추스르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문장이었다.
저희의 영화평에서는 개봉 후 어느 정도 세월이 흘러 시간의 ‘검증’을 통과한 작품들을 주로 다루겠다는 것이 엄마와 나의 공통된 신념(?)이지만, 지침 없이 기록적 성과와 호응을 지켜 내고 있는 [왕과 사는 남자]는 현시대 관객들에게 여러 감정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기적절한 ‘기록’을 남기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물론 아주 좋고 사랑스러운 것을 발견했을 때 당장이라도 친구들과 그에 대해 수다 떨고 싶은 마음과 비슷한 감정도 없지는 않다. 여전히 극장에서 상영 중인 영화이기에 줄거리나 실제 장면들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것은 삼가해야겠지만 -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하는 작품에서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운운하는 것이 조금 우습기는 하나 - 영화관을 나올 당시 온몸에서 넘쳐 흐르는 듯하던 벅찬 감정만큼은 이 글에 잘 담겨지길 바란다.
앞서 말했듯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하는 데다 워낙 대대적 흥행을 하며 여러 곳에서 소개된 작품이다 보니 영화의 줄거리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기에 기본적인 내용만 짧게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즉위 1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이름뿐인 ‘상왕’의 자리마저 빼앗긴 후 강원도 영월로 유배된 “노산군 이홍위”가 유배지 청령포에서 보냈던 짧은 시간을 다루고 있다. 세조라는 인물과 계유정난이라는 사건을 소재로 한 다른 작품들과 달리 “비운의 왕”으로 불리는 단종이 주인공일 뿐 아니라 제목 그대로 “왕과 사는 남자”, 즉 유배 온 이홍위를 보호하는 동시에 감시하는 보수주인(保授主人) “엄흥도”에게 조명을 비춘다는 점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진다.
약간 ‘산통을 깨는’ 소리를 먼저 하고 넘어가자면 이 영화는 사실 연출력과 서사의 전개가 정교하거나 세련된 작품은 아니다. 역사물(사극)이라는 장르를 상당히 좋아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2017년 작 [남한산성]과 같이 파르스름하게 날이 서 있는, 감정보다는 이성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작품을 특히 좋아하는 개인적 취향과 동떨어져 있기도 하고 말이다. 회상 장면을 자주 사용하고 컷 사이의 전환이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연출 방식이나 약간은 ‘오버액션’의 경지로 기울 때가 있는 유머 코드 등에서 엿보이듯, 엄밀히 말한다면 이 영화는 그 투박함을 곳곳에서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영화의 궁극적 기반이 되는 이홍위와 엄흥도의 관계성 또한 치밀하게 쌓인 서사보다는 유해진과 박지훈이라는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과 케미에서 설득력을 이끌어 내는 측면이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작품이 연출을 소홀히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약간 경박한(그러나 사랑스러운) 이미지의 장항준 감독을 “역시 감독은 감독이구나” 생각하게 만드는 장면과 설정들도 영화 안에서 자주 만날 수 있다. 영화의 유일한 악역 “한명회”가 모습을 드러내는 몇몇 장면은 “수양대군”이라는 인물의 현대적 이미지를 창조했다고 할 2013년 작 [관상]의 유명한 등장 씬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듯하고, 이홍위의 처지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 주는 참담한 첫 장면이나 자신에게 충성하다 목숨을 잃은 대신들에 대한 죄책감으로 뒤척이는 이홍위의 악몽 씬(여기에선 정말 이 감독이 김은희 작가의 남편답다는 생각이 든다) 등은 연출적으로 상당히 뛰어나다. 어린 조카를 복위시키기 위한 “금성대군”의 거사에 참여하러 떠나는 이홍위를 만류하던 엄흥도가 결국 그를 돕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사 또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부분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장점은 – 적어도 개인적 의견으론 - 모든 단점과 어색함들을 눈감아 주게 하는, 혹은 아예 의식조차 않게 만드는 매력 혹은 자력이 아닐까 싶다. 어줍잖게나마 영화를 평론하는 입장에서 직무유기(?)가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낱낱히 해부하고 평하기보다 그저 관객을 이끄는 대로 휩쓸리며 설득 당하고 싶게 만드는 영화를 참 오랜만에 만난다 싶다. 미슐랭 스타를 자랑하는 고급 식당에서 식사를 대접 받는 것도 물론 좋지만 속을 뜨끈하게 데워 주는 골목 국밥집의 위로도 때론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그 많은 관객들이 울고 웃으며 기꺼이 작품이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도록 만든 것은 장항준 감독을 포함한 모든 제작진이 이홍위와 엄흥도를 향해, 정확하게는 ‘인간’을 향해 보내는 따뜻한 애정과 연민 어린 시선이 영화 구석구석에 배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YMCA 야구단]과 [밀정] 같은 작품들을 이 공간에서 다루었을 때도 언급했지만 나는 인간에게 ‘정의’와 ‘정도’를 지키게 하는, 특히 주군이나 조국을 향한 ‘충의’를 잃지 않도록 만드는 힘이 무엇일지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밀어내면서는 왕위에 대한 욕심을 숨길 나름의 명분(자신이 국가의 통치에 보다 적합한 인물이라는)이 있었을 것이듯, ‘대의’란 그를 논하는 입장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변질될 수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태어난 나라도, 혈연인 가족도 팔 수 있는 것이 인간이란 존재임을 생각하면, 참혹한 실패와 죽음을 각오하면서도 ‘옳은 일’을 하도록 만드는 힘, 이미 실각한 어린 왕을 위해 군사를 모으거나 저주와 다름없는 칙령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하는 용기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궁금할 뿐이다. 어쩌면 나 자신이 내면에 품은 이상과 신념에 비해 겁이 많고 비겁한 사람이기 때문에 갖게 되는 아주 사적인 호기심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질문에 상당히 설득력 있는 해답 하나를 제공한다. [왕과 사는 남자]에서의 이홍위는 여타의 영화들이 내세우던 강하고 이상적인 ‘군주’와 전혀 다른 리더십을 제시하는데, 이홍위와 유배지 마을의 사람들이 호랑이와 맞닥뜨리는 장면에서 그런 모습이 뚜렷하게 예시된다. 그때까지 엄흥도와 마을 사람들은 한양에서 귀양 온 어린 ‘나으리’가 다름아닌 전 ‘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식겁하지만, 첩첩산골에서 당장의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미 폐위되어 무력해진 권력자에 대한 세심한 이해나 존중을 기대하기는 힘들다. 실제로 엄흥도는 이홍위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오인한 상황에서 그동안 전전긍긍하며 쌓아 두었던 불만과 분노를 터뜨리며 불경하게 이홍위의 멱살을 잡기까지 한다. 그처럼 이들에겐 먼 한양의 궁궐에서 살던, 원래대로라면 얼굴조차 볼 일 없었을 임금보다는 당장 자신들의 생계와 생명에 위협을 주는 호랑이가 더욱 두려울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그 호랑이가 마을 사람들을 위협할 때 진짜 ‘왕’을 앞에 둔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향해 “왕이다!”라며 소리 지르는 것이다.
그 순간 이홍위가 호통을 치며 호랑이에게 대적하는 장면에서 온몸에 소름이 돋았더랬다. 후에 “단종”으로 추서된 노산군이 자신의 백성들을 위협하는 실질적 ‘왕’에게 맞선다는 설정은 그가 지금 왕좌에 있는 수양대군에, 다시 말해 자신을 밀어낸 숙부에 대한 공포와 분노에 직면하는 행위로 해석될 수도, 또는 한때 왕이었으나 백성을 지킬 힘을 잃고 무력해진 스스로에 대한 자기 혐오를 극복하는 순간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론 백성들에게 두려움만 주고 폭력적 권력으로 그들을 착취하는 권력자의 존재를 없앰으로써 진정한 ‘왕’의 위치에 다시 선다는 상징성을 가진 장면으로도 여겨졌기 때문이다. 백성들의 뒤로 숨어 버리는 대신 그들이 직면한 위험의 앞을 막아서는, 사랑과 희생에 기반한 리더의 역할을 자임한 이후 무기력하던 이홍위는 변화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엄흥도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은 단순한 존경심 이상의 애정과 사랑으로 이홍위에게 답례한다. 없는 살림이지만 정성스레 밥을 지어 보내고 식사를 마쳤다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하면서 그를 방문해 함께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단순한 경외감이나 존경심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쌓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고 글을 가르치며 행복하게 웃는 이홍위를 보는 엄흥도의 얼굴도 골칫덩어리 양반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영화 초반의 그것이 아닌, 귀한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표정과 점점 닮아 간다. 그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까지 위험에 몰아넣으면서도 신념과 충의를 붙들 수 있게 만드는 힘은 결국 그렇게 사랑이 된다. 이홍위가 역모에 가담했다는 물증을 가져오라는 협박 속에서도 자신이 홍위를, 그리고 홍위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 후엔 몸 바쳐 어린 왕을 보호할 뿐 아니라 홍위의 가장 슬프고 잔인한 부탁까지 받아들이며 마지막까지 그의 충신으로 남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의 이홍위는 복위에 실패하고 죽음을 맞으면서도 초라하거나 비굴해 보이지 않는다. 끝까지 조카를 걱정하는 금성대군은 물론 어린 왕을 지키고자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군사들과 청령포에 몰려들어 진상품을 바치며 통곡하는 사람들, 그리고 왕의 마지막을 지키는 엄흥도에게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힘을 추구하는 열망이나 옳은 일에 대한 단순한 신념이 아니라 약하지만 어질고 올곧은 소년에 대한 사랑이다. 그 끔찍한 현실 속에서도 어린 왕의 마지막을 사랑 안에 둘러싸인 모습으로 그려 낸 이 영화는 단종은 물론 무자비한 역사의 흐름에 참혹하게 희생되었던 모든 ‘패자’들을 기리고 추모한다.
단종의 죽음 이후 50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영화 속 픽션을 통해서나마 실제처럼 생생하게 우리 가운데로 되돌아온 그가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이홍위의 모습이라는 사실이 의미 있고도 아름답다. 승자만 기억하고 힘의 논리에서 정당성을 찾아내는 비정한 세상이라지만 결국 온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진 것은 위풍당당한 수양대군이 아니라 유배지 마을에서 행복한 일상을 보냈던 이홍위와 백성들이라는 것 역시. 폭력적 제도와 권력이 아무리 시민을 향해 아가리를 벌려도, 이기적 탐욕이 세를 불리며 권력의 정점에 오를지라도, 세상은 언젠가 진정한 승자와 패자를 가려낸다는 진리를 증명하는 셈이다. 손해 보고 희생하면서 남을 위해 자신을 내어 놓는 사랑의 삶을 산 ‘패자’와 ‘약자’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우리 안에서 다시 부활하는 기적은 언제나, 반드시 계속되리라 믿는다.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엄마 C의 시선
지난 3월의 어느 토요일 이곳 밴쿠버에서 “왕과 사는 남자”를 딸과 함께 관람했습니다. 이런저런 소문으로만 전해 듣던 영화를 직접 보게 되었으니 참으로 감격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지요. 이미 관객수 1,500만 명을 넘어서는 흥행 기록을 보유한 영화로서 많은 분들이 여러 매체를 통해 다양한 소감과 비평을 올리기도 해 온 만큼 작품의 구성이나 줄거리 등을 자세히 다룰 필요는 없을 것으로 생각되기에 저의 이번 글에서는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한국 영화를 보며 느낀 나름의 특별한 감정을 바탕으로 작품과 관련된 이야기들을 풀어 볼까 합니다.
인구와 면적 규모에서 캐나다 내의 세 번째 순위에 해당하는 BC(British Columbia) 주 안에 포함된 밴쿠버, 그리고 그 밴쿠버 안에서도 “로워 메인랜드(Lower Mainland)”라고 불리는 저희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한국에서 크게 흥행하는 영화가 있을 경우 수입을 통해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코퀴틀람(Coquitlam)이나 아시아인들이 상대적으로 많은 다운타운의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개봉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다운타운 쪽이 저희에게 조금 더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화를 보기 위해 ‘그’ 극장들까지 가려면 - 선택의 여지가 없다 보니 - 대략 1시간 안팎(왕복 2시간)을 소비해야 하기 때문에 큰 맘 먹고 나서야 하는 데다 신경 써서 찾아 보지 않으면 언제 올렸다가 언제 내리는지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아 한국 영화를 관람하는 일이 그리 쉽지만은 않은 것이 사실이지요. 하지만 “왕과 사는 남자”는 이곳까지 그 ‘명성’을 떨치며 뭇사람들의 관심을 모을 만큼 잘 알려진 영화였기에 딸과 저도 벼르고 벼르다 ‘날을 잡아’ 관람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대체로 “시간의 검증”을 거친, 즉 개봉 이후 상당 정도의 시간이 흐른 영화들을 주로 다루어 왔던 저희이지만 이번에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굳이 그러한 ‘검증’을 기다릴 필요가 없으리라는 판단에 서둘러 영화평을 쓰게 되었는데, 사실 저는 영화를 보고 난 후의 그 벅찬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워 바쁜 딸을 뒤로 한 채 이틀 뒤 저 혼자 가서 다시 한 번 영화를 관람했습니다. 딸과 함께 극장에 갔던 토요일 오전은 영화를 보기엔 비교적 이른 시간(10:30)이어서인지 관객 자체가 많지는 않았지만 저희 좌석 옆에 앉아 있던 현지인 부부가 영화 끝나고 난 후에도 한참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않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고, 저 혼자 다시 가서 영화를 본 월요일 1회도 요일이나 시간상 극장을 찾는 사람이 많을 상황은 아니었으나 젊은 현지인 여성들이 혼자 극장에 와 한국 영화를 관람하는 나름 진기한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지요.
한국 영화 중에도 특히 ‘진입 장벽’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극이 이곳 북미권에서까지 이렇게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게 된 데는 세계적인 유명세를 자랑하는 “BTS”의 활약과 함께 “케이팝 데몬 헌터스(KPop Demon Hunters)”의 엄청난 흥행이 상당 부분 기여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UN 총회장에서의 스피치와 퍼포먼스라는 놀라운 ‘업적’을 만들어 낸 BTS가 우리 문화를 소개하는 형식의 공연을 꾸준히 선보여 온 것은 물론, “애니상(Annie Awards)” 시상식에서 10관왕의 기염을 토하며 상을 ‘싹쓸이’했다는 평가를 받은 데 이어 “골든 그로브상(Golden Globe Awards)” 2개 부문 수상과 그래미 상(Grammy Awards)” 수상, “아카데미 상(Academy Awards)” 2개 부문(주제가상, 장편 애니메이션상) 수상까지 달성하여 국제 수준의 영화상/음악상을 휩쓸면서 전 세계 남녀노소를 ‘대동단결’시킨 “케데헌”의 내용 속에 소개된 한국 고유 문화와 유적지가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한 결과라는 것이지요.
이 영화를 보며 ‘기분 좋게’ 놀랐던(happy surprise) 점들을 두세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우선 “장항준”이라는 감독이 이런 종류의 사극을 이처럼 훌륭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그 첫 번째에 해당합니다. “라이터를 켜라”라는 코미디를 통해 처음 그의 작품을 접했던 - 사실상 그의 첫 번째 연출작이기도 하지만 - 저 같은 사람들은 그의 세 번째 작품인 “기억의 밤”을 보면서도 무척 의외라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흥행 실패로 기록된 “리바운드”와 “오픈 더 도어”에 이은 그의 여섯 번째 작품 “왕과 사는 남자”가 이처럼 큰 반향을 일으키며 획기적 흥행 몰이를 하게 된 것이 ‘뜻밖의 경이’로 느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실은 장항준 감독이 고교 시절부터 시나리오 쓰기에 재능을 보였고 애초 충무로 데뷔도 영화 “박봉곤 가출사건”의 각본을 쓴 작가로서였음을 고려할 때, “왕사남”의 제작자가 현장에서 시나리오 수정이 가능한 ‘글 잘 쓰는’ 감독인 그를 연출가로 선택한 것이 무척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인정하게 될 만큼 ‘예술가’ 장항준의 다재다능함이 작품의 성공에 공헌한 바 크다고 할 수 있겠지요.
두 번째로 저에게 ‘뜻밖의(행복한) 경이’를 선물한 요소는 “박지훈”이라는 젊은 배우의 놀라운 연기력이었습니다. 프로필을 찾아 보면 “가수”라는 타이틀이 “배우”라는 직업명보다 먼저 등장하는 이 청년을 저는 “왕사남”을 보기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는데, 여러 홍보물을 통해 상당히 연기를 잘한다는 ‘정보’를 미리 접하기는 했지만 “그 정도 나이의 배우가 연기를 잘하면 얼마나 잘할까”라고 생각하던 저의 편견과 선입견은 영화 시작 후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평소 연극 무대 등에서 오랜 시간 연기 경력을 쌓은, 그리고 삶의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된 일정 연령 이상의 배우에게서나 깊이 있는 연기력을 기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견지하고 있던 저는, 이 ‘나이 어린’ 배우의 울림 있는 연기를 보며 “소름 끼치도록 연기를 잘한다”는 전율을 오랜만에 다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배우 역시 ‘전적’을 살펴보니 어린 시절부터 아역 배우로 연기를 계속해 온, 꽤 오랜 경력을 갖춘 연기자더군요. 물론 그의 빛나는 연기력을 아역 배우라는 전적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지만 말이지요.
2026년 2월 4일 개봉했던 “왕과 사는 남자”는 한 달 후인 3월 6일 1,000만 관객을 돌파한 데 이어 같은 달 25일 1,500만을 넘어서면서 손익분기점의 5배가 넘는 수익을 달성한, 역대 한국 영화 최다 매출액을 기록한 작품이 되었다고 합니다. 최근의 업데이트를 보니 개봉 8주 차인 3월 말 기준으로 1,560만 명을 넘어서며 – 총 관객수 1,626만 명이었던 “극한직업”의 기록을 위협하며 – 역대 한국 영화 흥행 2-3위권의 장기 흥행을 기록 중이라는데, 유쾌한 코미디 “극한직업”의 영화평에서 저희가 언급했던 것과도 유사하게 억지스런 ‘감동’에 집중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보는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는 점과, 거창한 ‘대의’나 명분 등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은 채 사람과 사람 사이의 평범하고도 진솔한 인간애에 초점을 맞추어 관객들에게 진정한 공감과 설득력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특별한 장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이 영화에서 ‘심금을 울린,’ 즉 자신의 눈물샘을 자극한 대사들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접하게 되지만 저의 경우 가장 먼저 – 그리고 가장 깊이 – 마음을 건드렸던 대사는 그전까지 식음을 전폐하던 “노산군 이홍위”가 마을 사람들을 호랑이의 공격으로부터 구해 내고 난 후 음식을 찾으면서 “배가 고프구나”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삶에 대한 희망을 잃었던 사람이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되는 것은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존재임을 깨닫는 경우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며 느낀 감격이었는데, 그런 그의 의지와 의욕이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공부를 포기했던 “엄흥도”의 아들 “태산”에게 전이되면서, 그 역시 의로운 성품으로 백성을 아끼는 이홍위에게서 학문을 배워 ‘공평한’ 세상을 만드는 일에 일조하고 싶다는 의지를, 또한 자기보다 배움이 짧은 동네 아이들과 어른들에게 자신이 가진 지식을 나누겠다는 의욕을 불러일으키는 ‘선순환’을 만들어 냅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딸과의 대화에서 나누었던, 그리고 영화를 본 관객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대사이기도 한 듯한, 마을을 떠나려는 이홍위의 “더 이상 나로 인해 내가 아끼고 사랑하던 이들을 잃고 싶지 않다”라는 말과 그에 대해 엄흥도가 건네는 “저도 그 안에 있습니까?... 저도 그중의(아끼고 사랑하는 이들 중의) 한 사람입니까?”라는 질문은 영화를 보기 전에도 작품 소개 프로그램 등을 통해 미리 접한 바 있지만 그 질문을 받은 이홍위의 대답에 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기에 답변의 내용이 무엇일지 사뭇 궁금했는데, 그 대답이 다름아닌(다른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그대는… 아닌가?”라는 짧은 반문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정말 가슴이 찡했습니다.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이라면, 눈빛만으로 상대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관계라면 굳이 긴 말이 필요치 않을 것임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 하나님과 저의 관계도 그런 것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게 만드는 - 대사였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이 같은 감동적 대사들을 모두 넘어설 만큼 마음 깊은 곳에 지금도 남겨져 있는 한 문장은, 노산군의 시신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한다는 무시무시한 훈령을 알면서도 그의 시신을 수습하고 곡을 한 것으로 알려진 엄흥도가 남겼다는 “의로운 일을 하고 화를 당하는 것은 내가 마음에 달게 여기는 바요,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爲善被禍, 吾所甘心)”라는 당언(讜言)입니다. 역사적 인물들의 훌륭한 삶은 물론이거니와 최근의 뉴스를 통해서도 접하게 되는 ‘의인’들의 용감한 행위를 볼 때마다 “과연 나라면 저런 상황에서 저렇게 행동할 수 있을까”를 매번 자문해 보게 되는 저로서는 이 문장을 접하면서도 동일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 주신,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떠나지 않은 채 살고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일 바르고 의로운 일의 행함을 ‘마음에 달게’ 여기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라는, 엄중하고도 본질적인 질문을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