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꿈을 향한 청춘의 전력투구는, 투박하고도 푸르게 불타오른다."
<블루 자이언트>는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타치카와 유즈루 감독의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한겨울 강가에서 열정적으로 색소폰을 연주하는 주인공 다이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다이는 세계 최고의 재즈 연주자가 되겠다는 커다란 꿈을 안고 도쿄로 상경한다. 그는 재즈바에서 만난 탁월한 피아니스트 유키노리와 고등학교 동창인 초짜 드러머 타마다와 함께 재즈 밴드를 꾸린다. 어설프고 위태롭게 시작한 그들의 재즈는 꿈을 향해 전력으로 솟구친다.
작품의 주된 소재는 재즈이다. 눈여겨 볼만한 점은 재즈가 시간과 공간, 나아가 관계까지 연결 짓고 있다는 점이다. 다이가 색소폰을 연주할 때에는 쉼 없이 달려온 지난 3년간의 고된 훈련의 기억이 스쳐 지나간다. 재즈바에서 유키노리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다이는 자신이 왜, 어떻게 재즈에 빠지게 되었는지 회상한다. 다이의 색소폰 연주를 들은 타마다는 과거를 돌이켜보며,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영화는 재즈 연주를 이용해 음악을 연주 중인 인물의 과거, 혹은 음악을 듣고 있는 인물의 과거를 플래시백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방식으로 과거와 현재를, 그리고 현재와 미래까지도 이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 속 재즈가 잇는 것은 시간뿐 아니라, 공간 역시 마찬가지이다. 무대에 오른 세 명의 청년들은 화려하고 유려하며, 강력하고 맹렬한 기세로 관중을 압도한다.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결부는 스크린 내에서 멈추지 않는다. 스크린 바깥에서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에게까지 재즈의 파동은 전해진다. 영화 밖 관객은 영화 속 관중과 마찬가지로, 같은 음악을 듣고 같은 공간을 경험하는 굉장히 흥미로운 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주인공들의 뜨거운 연주를 들으며 관객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린 여태껏 무엇을 꿈꾸며 살아왔는가, 얼마나 뜨겁게 살아왔는가, 지금 우린 꿈을 향해 정직하게 걸어갈 수 있을 것인가'와 같은 생각의 점철로 이어진다. 이 영화의 놀라운 점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람과 사람 간의 관계까지 이어주는 것이 바로 영화 속의 재즈다. 주인공 세 명은 모두 재즈를 통해 이어진다. (물론, 다이와 타마다는 고등학교 동창이지만 진정한 영혼의 결속은 재즈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재즈를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들이 서로의 진심을 이해해 나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크나큰 감동을 안겨준다. 영화 속 재즈는 시간과 공간, 관계를 이어나가는 연결의 미학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너무나도 매력적인 캐릭터의 덕일 것이다. 그러한 인물을 묘사하는 방식 역시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꿈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전력으로 달려 나가는 열정 바보 다이. 겸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오만 덩어리에서, 팀원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진심을 표현할 줄 아는 예술가로 거듭난 유키노리. 드럼을 전혀 모르던 초짜에서 점점 성장을 거듭해 나가는 성장형 드러머 타마다. 이 셋의 조합은 보는 이로 하여금 어떨 때에는 짜릿한 쾌감을, 어떨 때엔 조마조마한 심정을, 어떨 때엔 타오르는 열정을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세 인물을 깊이감 있게 묘사하는 방식으로 플래시백이 쓰인다. 앞서 얘기한 과거와 현재를 잇는 데 쓰인 재즈가 인물을 설명하는 방식으로도 쓰이는 것이다. 음악과 결부된 간략하고, 군더더기 없는 회상씬은 인물을 충분히 설명해 관객의 이입을 돕는다.
재즈를 연주한다는 것은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러한 과정을 간접적으로 묘사한다. 다이가 도쿄에 상경해 찾아간 곳은 타마다의 집이다. 작중 다이는 타마다에게 더 이상 미아기현의 사투리를 쓰지 않는다며 도쿄 사람이 다 되었다고 얘기한다. 고향의 방언을 사용하지 않던 타마다는 재즈를 시작한 뒤, 다시금 방언을 사용하게 된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일을 하며 열정을 되찾은 타마다는 마침내 진정한 자신을 찾아간 것이다.
유키노리의 경우엔 이러한 과정이 시각적으로 묘사된다. 유키노리는 훤칠한 키와 준수한 외모, 세련된 복장덕에 부잣집 도련님으로 생각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가 4살부터 재즈를 시작했다는 사실은 그의 이미지를 더더욱 엘리트에 가깝게 고착시킨다. 적어도 초반까지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중반부에 비춰진 그의 자취방은 유키노리의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좁고 허름한 데다가 지저분했다. 그의 자취방은 누구보다 세련된 삶을 영위하는 것처럼 보인 그가, 실은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은 내면이 있음을 암시한다. 이윽고, 그는 쏘 블루의 관계자에게 무대에서 자신의 감정을 전부 드러내고 있지 않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유키노리는 이후 자신의 허물을 반성하고, 스스로를 남김없이 쏟아내는 최고의 무대를 보여준다. 관객은 종반부에 이르러서 그의 허름한 자취방이나 고된 아르바이트를 여과 없이 보게 된다. 하지만 이면의 감정, 숨겨둔 진심을 드러내며 성장한 그를 보고 관객은 오히려 그에게 편안함과 친근감을 느낀다.
이 영화를 본 관객에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독자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다. 영화의 초반부, 유키노리가 다이의 색소폰 연주를 처음 들은 후, 그는 적잖은 충격에 빠져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한다. 과연 유키노리는 다이에게 재능이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없다고 생각한 것일까? 이 장면은 마치 다이의 엄청난 재능 앞에서 상실감이나 허무함을 느낀 유키노리를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유키노리가 다이에게 재능이 없다고 생각했다는 입장을 견지하게 된다. 그 이유인즉슨, "이 녀석, 노력을 얼마나 한 거야."라는 대사 때문이다. 그는 다이의 색소폰 연주가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그의 탁월한 연주는 특출 난 재능이 아닌, 엄청난 양의 노력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다이와의 첫 만남에서 재능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한 유키노리의 가치관이 뒤바뀌는 순간이다. 다이는 바로 이 순간부터 오만하고 거들먹대는 안하무인의 유키노리가, 섬세하고 진실된 재즈 피아니스트로 탈바꿈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블루 자이언트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사실 이 답은 작품 내에서 너무나도 명확하게 서술되고 있다. 항성은 온도에 따라 색이 바뀌는데, 이때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항성은 푸른색을 띤다. 때문에 제목인 블루 자이언트는 무대에서 누구보다 뜨겁게 타오르는 재즈의 푸른 거성을 뜻한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작품의 초중반에서는 파란색 불꽃의 노출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그들의 무대에서는 노란색의 빛을 빈번히 목격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공연에서, 그들의 무대는 파란색 불꽃으로 물든다. 그들의 가슴 벅차고 눈물겨운 모험이, 결국엔 노란색의 불꽃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르는 파란색 불꽃으로 향해가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블루 자이언트의 의미는 이뿐만이 아니다. 작품의 주인공들이 목표로 하는 꿈의 공연 장소이자, 마지막 공연 장소가 되는 곳의 이름은 ‘쏘 블루’이다. 블루 자이언트의 블루는 쏘 블루의 블루를 상징하기도 한다. 꿈의 무대인 쏘 블루에 서서 거인과도 같은 존재감을 뽐내고 싶은 그들의 야망을 드러내는 제목인 것이다.
재스(JASS)를 하나의 거대한 거인이라고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들이 각각 재스라는 거인의 어떤 부분일지 생각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열정 가득한 팀의 중심 다이는 재스의 심장이다. 냉철한 판단과 이성적인 결단을 내리는 유키노리는 재스의 두뇌라고 볼 수 있다. 재밌는 것은 타마다를 무엇으로 볼까 하는 문제이다. 내 생각에 타마다는 다리로 비유될 수 있다. 타마다가 들어온 이후로 그들은 하나의 팀으로서 자신들의 꿈에 다가가기 시작한다. 타마다의 서툰 드럼 실력이 조금씩 성장함에 따라, 그들은 더욱 튼튼해진 다리로 꿈을 향한 모험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분명 탁월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아쉬운 점은 있었다. 먼저, 무대 장면들이다. 작중 재스가 무대에 오를 때마다 화려한 시각 효과가 관객을 사로잡는다. 물론, 이러한 연출 방식은 그들의 무대가 환상적임을 표현하는 좋은 수단이다. 하지만 이러한 연출에는 단점이 있다. 바로 지나친 시각적 효과가 음악 감상을 저해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조악한 3D 모델링은 훌륭한 작화에 옥의 티로 남는다. 과유불급의 연출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 힘들다.
쏘 블루에서의 공연을 앞두고 일어난 유키노리의 사고 또한 아쉬운 지점이다. 캐릭터를 학대하는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감동을 느끼게 한다는 이유에서이다. 이러한 억지로 쥐어짜 내는 식의 감동은 불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된다. 유키노리의 사고는 주제적인 측면과도 잘 맞물리지 못한다. 이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청춘의 정열과 꿈을 향한 발돋움으로 관객들에게 전율을 선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마지막 대사이다. 다이의 옛 스승의 마지막 대사는 '블루 자이언트'라는 제목의 의미를 지나치게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제목의 의미를 추론해 내는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관객에게 제목이 왜 블루 자이언트일까 하는 궁금증을 자아내고, 그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주는 것이 더욱 적절한 방식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영화를 보고 우리의 과거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린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물음은 '우린 어떻게 살아가고 있나.' 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는 필연적으로 '우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가 닿는다. 꿈을 향해 절실하게 발버둥 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우리의 삶에 대한 반성을 이끌어내고, 앞으로의 열정을 다짐하게 만든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왜 이토록 뭉클하게 다가올까. 그저 뜨겁게 불타오르는 청춘의 정열과 꿈을 향한 집념을 목도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얘기는 우리 스스로의 얘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열정 가득한 청춘이었고, 언젠가 자만과 허영에 빠져 스스로의 내면을 감추기 바쁜 풋내기였고, 언젠가 남들에게 뒤처져 불안에 떨던 초짜였기 때문이다. <블루 자이언트>는 우리가 꿈을 향해 필사적인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뜨겁고도 투박한 용기를 우리 손에 쥐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