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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프레소 Nov 11. 2022

'돌직구' 시대에도 유효한 "네 잘못 아니야"란 위로

[씨네프레소] 영화 '굿 윌 헌팅' 리뷰


매주 토요일 연재하는 OTT 영화 리뷰 '씨네프레소'를 브런치에 저장해두는 작업을 합니다. 그 시작으로 2022년 11월 5일에 올린 '굿 윌 헌팅' 리뷰를 게재합니다.

*주의 : 이 글에는 영화의 전개 방향을 추측할 수 있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는 인간이 가장 다감한 시기다. 책을 읽든 노래를 듣든 나무가 뿌리로 물을 빨아들이듯 그 안의 양분을 강력하게 흡수한다. 같은 원리로 상처도 더 쉽게 받는다. 어린 시절 겪은 신체·언어폭력은 머릿속에서 유튜브 동영상처럼 생생하게 재생된다. 가정 및 학교폭력을 ‘집안일’이나 ‘애들 일’로 치부하는 대신 더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근거가 있다면, 바로 피해자가 받은 상처가 평생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수도 있다는 점이 될 것이다.

숀(왼쪽)은 어느 날 윌 헌팅의 상담을 맡게 된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굿 윌 헌팅’(1997)은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지만 세상에 대한 회의로 이를 드러내길 포기한 청년 윌 헌팅(맷 데이먼)의 이야기다. 한 번 읽은 책 내용을 줄줄이 꿰는 그는 수학, 법학, 인문학에 재능이 있을 뿐 아니라 예술적 감각도 뛰어나지만 대학 진학 등으로 진로를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어린 시절 학대받은 기억이 발목을 잡아서다. 어느 날 윌의 상처를 알아본 교수 숀 맥과이어(로빈 윌리엄스)가 손을 내밀지만, 그는 가시 돋친 말로 숀에게 상처를 준다.

윌은 친구들과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밤에는 맥주 한 잔 마시는 삶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도움의 손길 내밀었더니 …“아내가 다른 남자랑 눈 맞았냐”고 모욕


영화는 윌의 일상을 비추며 시작된다. 그는 친구들과 공사장에서 일하다 밤에는 술집을 돌아다니는 삶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인다. MIT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는 창문 너머로 수학 교수 랭보(스텔란 스카스가드)가 낸 문제를 곁눈질했다가 몰래 해답을 적어내면서 주목받는다. 어느 날 랭보 교수는 폭행죄로 구속된 윌이 석방되도록 도우면서 두 가지 조건을 내세운다. 하나는 그와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수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다른 하나는 상담 치료를 받는 것이다.

MIT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던 윌은 교수가 낸 난제를 창문 너머로 곁눈질하고, 그 해답을 칠판에 적어둔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윌은 교수와 수학에 관해 대화하는 것엔 흥미를 느끼지만, 정신과 치료는 불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랭보가 소개해주는 전문가들에게 예의 없는 태도를 보여주며 다가오지 못하게 한다. 다섯 명의 정신과 전문가가 그를 포기한 이후로 랭보가 떠올리는 사람이 바로 숀 맥과이어다. 랭보는 늘 숀이 심리학에 가장 정통한 인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처음부터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진 않았는데, 학창 시절 라이벌이었던 둘 관계가 껄끄러웠기 때문이다. 랭보는 두 사람의 불편한 역사에도 자존심을 굽히고 숀에게 윌을 만나 달라고 할 정도로, 윌의 재능이 아깝다고 생각한다.

랭보(오른쪽)는 오랜 라이벌이었던 숀을 찾아가 윌을 만나 달라고 간청한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여느 때처럼 관계의 주도권을 쥘 틈을 찾던 윌은 숀이 직접 그린 그림을 보고 심리학적 분석을 시작한다. 난파될 듯 위태로운 배에 탄 남성은 숀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건 숀이 ‘잘못된 여성’과 결혼해서 생긴 마음의 문제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추측한다. 상대방이 넌더리를 내며 떠나게 하려고, 가장 상처가 될 만한 부분을 짚은 것이다. 자신의 분석에 숀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자 윌은 “딴 남자랑 눈이 맞아서 떠났냐”며 질문의 수위를 높인다.

숀이 자신의 아내를 모욕한 윌의 목을 조르고 있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그러나 무례한 태도에 진저리를 내며 떠날 것이라 예측했던 숀은 윌의 목을 강하게 조르며 다시는 본인 아내를 모욕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이것은 윌에겐 새로운 경험이다. 이전의 어른들은 자신의 건방진 모습에 치를 떨며 떠났지만, 숀은 그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면서 ‘다음’을 기약한 것이다. 이후 매주 한 번씩 만나는 동안 숀은 윌의 입을 열려고 무리하게 애쓰지 않는다. 윌이 먼저 마음을 열고 자신에게 다가오지 않으면 진정한 상담이 이뤄지지 않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몇 주 동안 이어진 숀의 기다림과 인내에 윌은 농담으로 입을 뗀다.

윌은 몇 주간이나 이어진 숀의 기다림과 인내에 먼저 마음을 연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의미 있는 관계는 함께 보낸 무의미한 시간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관계 본질에 대한 얘기다. 우리가 누군가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기로 결심하는 건, 그가 나와 기꺼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보고 나서인 경우가 많다. 굳이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려 노력하는 대신, 수다를 떨고, 술을 마시고,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는 동안 한 사람과 신뢰가 쌓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가 나와 함께한 시간의 목적이 오로지 나 자신에게 있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윌은 상담사들이 전문성을 앞세워 그의 어둠을 끄집어내려고 했을 땐 호응하지 않았지만,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자신과 함께 있는 시간 자체에서 의미를 찾은 숀에겐 마음의 빗장을 열어 보인다.

윌은 여자친구와 친밀감이 깊어지자, 그녀를 밀쳐낸다. 버림받을 것이 두려워 먼저 떠나는 것이다.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소중한 친구가 된 숀 선생님, 내 진짜 모습에 실망하면 어쩌지


윌은 숀과 친해질수록 그와의 관계가 슬슬 걱정되기 시작한다. 그 불안감은 자신이 학대받은 기록을 적어놓은 서류를 윌이 모두 읽어봤다는 데서 일부 비롯된다. 인간이 가장 사랑스러운 때인 어린 시절 이뤄진 수차례의 파양, 양부모로부터 지속된 폭력은 어쩌면 자신이 사랑받기엔 부족한 존재라는 증거일지 모른다고 그는 여겨왔던 것 같다. 여자친구(미니 드라이버)와 깊은 친밀감을 느끼게 되자 먼저 밀쳐낸 것은 그런 이유다. 자신이 온전한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그녀가 발견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윌의 친구 처키는 윌에게 털어놓는다. 아침에 윌의 집 문을 두드릴 때마다 윌이 이미 이 마을을 떠났기를 기대한다고.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평가 결과는 어때요? 애정 결핍 같은 건가요?” 윌은 자신을 숀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지 궁금해한다. 어쩌면 저 질문 역시 자신을 방어하려는 노력이었을지 모른다. 자신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범위로 답변을 좁혀가는 것이다. 그러나 숀은 서류를 덮고 얘기한다.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이미지 제공=영화사 오원]

“알고 있다”고 얘기하는 윌에게 숀은 몇 차례나 거듭해서 말한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숀은 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정이라고 생각했다. 학대받은 경험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고 말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는 가해자를 원망하면서도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에서 날 가장 사랑해줘야 할 이들이 내게 가장 큰 상처를 준 이유는, 어쩌면 내가 사랑받기엔 부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일지 모른다고 의심할 수 있어서다. 위악(僞惡)으로 자신의 약한 내면을 가리던 윌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는 데는 단 한 마디면 충분했지만, 저 말이 그의 옆을 지나던 아무개의 입에서 나왔다면 위안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윌과 충분한 신뢰 관계를 쌓은 숀의 입에서 나왔을 때야 비로소 의미 있는 위로가 된다. 나와 기꺼이 무의미한 시간을 보내주며 나를 소중히 여겨준 그가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 말을 건네줬기에, 윌은 자책하던 태도를 벗어나 보겠다고 한 걸음 내딛게 된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굿 윌 헌팅’은 각본상과 남우조연상을 받았다. [사진 출처=게티이미지]

숀 같은 어른을 못 만났을지라도, 숀 같은 어른이 될 수는 있다


심리 치료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영화를 꼽을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작품이다. 맷 데이먼, 벤 애플릭이 공동으로 집필한 시나리오가 탄탄한 데다, 거장 구스 반 산트 연출이 유려하다. 무엇보다도 로빈 윌리암스의 연기가 무게감 있고 안정적이다. 그가 연기한 숀 맥과이어는 그저 좋은 말만 해주는 멘토가 아니다. 상처를 안고 사는 그는 친구처럼 이야기를 경청하다가도 필요할 땐 멘티가 듣기 싫어하는 쓴소리를 건넨다. 윌을 끌어안는 그의 위로가 진실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토록 복잡한 인물인 숀을 로빈 윌리암스가 입체적으로 표현한 덕일 것이다.

https://tv.kakao.com/channel/20341/cliplink/78193404

'굿 윌 헌팅' 예고편.

‘돌직구’와 ‘일침’이 인기를 끄는 요즘의 사회에선 이 영화가 다소 간지럽다고 느낄 관객도 많을 것이다. 2000년대 범람한 힐링 콘텐츠에 대한 반작용인지, 최근엔 ‘네 잘못이다’ ‘네 선택이다’라는 직언이 위로보다 책임감 있다고 인정하는 분위기가 있기도 하다. 그러나 ‘굿 윌 헌팅’은 모든 것을 다 덮어놓고 괜찮다고 위무하는 무대책 힐링 영화가 아니다. 숀은 윌이 남에게 상처를 주고, 무책임한 행동을 할 땐 잘못된 것이라고 분명히 지적한다. 다만, 윌이 여러 차례 버림받고, 보호자에게 폭행당한 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라고 선을 그어주는 것이다. 윌이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며 삐뚤어진 행동을 한 출발점이 ‘나는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자책하는 태도일 수 있음을 숀은 직시했다.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이 옳고 그른지를 설교해봤자 그가 반성할 가능성은 작다. 그가 올바른 삶을 살도록 이끌기 위해선 자신을 긍정하는 데서 시작해야 하기에 “네 잘못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하다.


물론 이 영화를 보다가 ‘내 인생엔 그런 어른이 없었는데’라는 아쉬운 마음이 들 수 있다. 그럼 초점을 윌에서 숀으로 옮겨가 이 영화를 다시 보는 건 어떨까. 이 작품은 윌이 숀에게 위로를 받는 영화인 동시에 숀이 윌을 품는 영화이기도 하니깐 말이다. 당신 주변의 어린 사람 목소리를 진심으로 경청해준다면, 훗날 우연히 이 영화를 만난 그가 숀에게서 당신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를 일이다.

'굿 윌 헌팅'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사 오원]

장르: 드라마

등급: 15세이상관람가

감독: 구스 반 산트

출연: 맷 데이먼, 로빈 윌리엄스, 벤 애플렉, 미니 드라이버

평점: 왓챠피디아(4.2/5.0), 로튼토마토 토마토지수(96%) 팝콘지수(94%)

※2022년 11월 4일 기준.

감상 가능한 곳(OTT): 웨이브, 티빙, 왓챠, 쿠팡플레이, U+모바일tv


‘씨네프레소’는 다음, 네이버 등 각종 포털 뉴스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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