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초기 영화 리뷰
*주의: 이 글에는 영화 ‘장화, 홍련’과 ‘달콤한 인생’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사람은 싫어하는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지에 따라서도 분류할 수 있다. 어떻게든 포용하려는 부류, 앞에서는 웃다가 뒤에서 욕하는 부류, 상대와 마주칠 일을 가능한 한 적게 하며 마찰 자체를 줄이는 부류 등 여러 갈래로 나뉠 것이다.
김지운 감독 초기 주요 작품의 주인공들은 이 부분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바로 싫어하는 사람을 적극적으로 경멸한다는 점이다. 그들은 멸시하는 대상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모습을 보이는 게 자기기만이라도 된다는 듯 최선을 다해 냉정하게 대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또 있다. 상대를 모질게 대했던 것이 부메랑이 돼 그들을 어려움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반복되는 서사 구조에서 관객은 감독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김지운 감독은 남을 지나치게 낮춰 보는 태도가 개인에게 어려움을 불러올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장화, 홍련’(2003) ‘달콤한 인생’(2005)을 중심으로 김지운 영화 주인공들이 업신여기는 상대를 어떻게 대하는지, 또 이로 인해 어떤 곤란에 빠지는지를 살펴본다.
‘장화, 홍련’은 계모 은주(염정아)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수미(임수정)의 이야기다. 수미는 은주가 아무리 살갑게 대화를 시도해도 철저히 무시하며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수미의 관점에서 은주는 무시당해 마땅한 사람이다. 병약한 친엄마가 아직 살아 있을 때 부친(김갑수)과 내연의 관계로 집에 들어와 결국 친모의 극단적 선택을 초래했기 때문이다.
은주는 부친이 못 보는 곳에서 때로 수미의 동생 수연(문근영)을 옷장에 가둬놓고 학대하기도 한다. 수미는 부친이 일부러 계모의 학대를 못 본 척한다고 생각하고, 어느 날 부친에게 그녀 만행을 고한다.
그러나 이를 들은 부친은 딸에게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실 수연은 이미 죽었고 그 이후 정신병이 생긴 수미는 치료를 받았으나 여전히 환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수미는 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동생이 은주에게 괴롭힘 당하는 환영을 계속해서 본다. 그녀가 동생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건 혈육 사망이 불러일으키는 압도적 슬픔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동생 죽음에 자신이 일정 부분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사건은 자신의 신세를 비관한 친모가 옷장에서 극단적 선택을 한 날 발생했다. 동생은 엄마를 밖으로 꺼내려다가 함께 옷장에 깔려버렸고, 이를 알아챈 은주는 고민 끝에 “무슨 소리 못 들었니”라고 수미에게 물어본다.
물론 일반적인 경우라면 “옷장 밑에 동생이 깔려 있으니 같이 구하자”라고 얘기한다. 해당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한 사람은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그 집 딸들에게서 무시당한 은주가 애초에 그 광경을 못 본 척할지 심각하게 고민했던 것을 감안하면, 저 정도의 질문은 아마도 그녀가 베풀 수 있는 최고치의 선의였을 것이다. 자기 물음에 수미가 “들었다”는 정도의 반응만 보여줬다면 그녀는 수연을 구하는 데 동참했을 것이다. 그녀의 윤리 수준은 매우 낮지만 그 정도는 된다.
하지만 수미는 “여기(자매의 방이 있는 2층) 왜 올라온 거야. 안방은 1층 아니야?”라며 정색한다. “이젠 엄마 행세까지 하려 드네? 부탁인데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말아줘”라는 수미의 말에 은주는 한 번 더 기회를 준다. “너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명심해.” 그럼에도 수미는 “당신이랑 이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보다 더 후회할 일이 있겠어?”라며 냉정한 태도를 유지한다. 옷장에 깔린 동생은 이 모든 대화를 들으며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여기까지 보고 나면 관객은 이 영화 전체가 수미의 후회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모진 태도에 집착하느라 동생을 죽게 했다는 후회다. 수미가 은주에게 차갑게 대한 것엔 약한 엄마와 동생을 보호한다는 명분이 있었다. 연약한 엄마를 밀어내고 집의 일원이 되려는 은주에게 모멸감을 주면 그녀 스스로 지쳐 나가떨어질지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을 지키려 은주를 무시하던 수미의 태도가 결국 가족을 다치게 했다.
이것은 어쩌면 윤리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을 대할 때도 인간적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건 위험하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 예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은 아니다. 타인이 끔찍한 인간일지라도 말할 기회 정도는 줘야 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일 수 있다.
자신이 간병하는 사람(수미 엄마)이 살아 있는데 그 사람 남편의 애인으로 집에 들어온 은주는 누가 봐도 윤리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런 은주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을 때 수미는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왜냐면 은주에겐 수미가 알지 못하는 정보(옷장이 넘어져 동생이 위험에 처했다)가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윤리적으로 더 열등한 존재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정보에서까지 열위에 있는 건 아니란 점을 수미는 간과했다.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은주가 수미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았을 때 피해는 고스란히 수미 몫이 됐다.
수미의 경멸이 집안의 새엄마를 대상으로 한다면, ‘달콤한 인생’ 선우(이병헌)는 보다 많은 사람을 폭넓게 경멸하고 다니는 쪽이다. 조직 보스(김영철)에게 인정받으며 승승장구하는 선우는 동료 문석(김뢰하)을 무능하고 예의 없다는 이유로 무시한다. 그가 존중하지 않는 인물이 하나 더 있다. 선우의 조직과 거래를 뚫기 위해 부하들을 보내 영업시간에 난동을 부린 백사장(황정민)이다. 선우는 비즈니스 매너의 부재를 이유로 그를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어느 날 문석이 두 조직 간 오해를 해소하기 위해 백사장을 영업장으로 초대하지만, 그 자리에서 선우는 두 사람을 전혀 존중하지 않고 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백사장에게 상도덕을 갖추라며 훈계한다. “오늘 백사장님 내 손님으로 오신 거야. 나한테 이렇게 해도 되는 거야?”라고 묻는 문석에게 선우는 “너한텐 그래도 돼”라는 말을 돌려준다.
선우가 문석, 백사장과 겪는 불화는 이 영화의 중심축은 아니다. 보스가 선우를 조직에서 제거하려 들며 그가 경험하는 고초를 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선우는 그 과정에서 위의 두 사람에게 인간으로서 견디기 힘든 수모를 당한다. 백사장은 선우를 줄로 매달아 놓은 채 연장으로 위협하며 정육점 고기 취급하고, 문석은 선우를 땅에 파묻는 과업을 너무나도 충실하게 수행한다. 애초 선우가 두 사람을 경멸하던 시절, 그들을 질 낮은 인간으로 판단하고 약간의 존중도 보여주지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 또한 그에게 매너를 보여줘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외려 각각 선우에게 돌려줘야 할 ‘경멸’이 있다. 선우가 평소 멸시했던 이들이 모두 선우를 짓밟으려 들면서 그의 고통은 극대화된다. 물론 조직 우두머리의 결정이니 그는 어쨌든 곤경을 겪었을 것이다. 그래도 평상시 경멸스러운 인물들에게 조금 더 여유로운 태도를 보여줬다면 그들이 곤경에 처한 자신을 향해 보여주는 적개심의 정도도 그보다는 약했을지 모른다.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초기 김지운 감독 영화의 다른 인물들도 상대를 지나치게 하찮게 여긴 자신의 태도에 걸려 곤경에 처한다. 상대방이 윤리의식, 실력, 매너 등을 갖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내려보다가 그에게 치명타를 맞는 것이다.
그렇기에 김지운 초기 영화에서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관한 메시지를 찾는다면 아래와 같을 것이다. 우리는 때로 경멸당해 마땅해 보이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은 너무 낮은 윤리 의식을 갖고 있거나, 능력이나 매너가 없기 때문에 타인에게 해를 끼친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따뜻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 때문에 피해 입은 사람들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경멸스러운 사람을 대할 때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다. 멸시당한 그가 당신에게 꼭 필요한 정보를 공유해주지 않을 수도 있고, 당신이 위험에 처했을 때 그 모욕을 배로 갚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도로에서 방어운전을 해야 하는 이유와 비슷하다. 매너 또는 실력이 없어서 난폭한 운전자가 사고를 냈을 때 절대적 책임은 난폭운전을 한 당사자에게 있지만, 방어운전을 하지 않아 사고를 당한다면 나 역시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경멸의 대상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주는 것은 난폭운전자들을 너무 자극하지 않고 적당히 피해 다니는 태도와 매한가지로 나를 위한 일인 것이다.
이 연장선상에서 김지운의 영화를 타임라인으로 쭉 늘어놓고 본다면 ‘밀정’(2016)에서는 확연한 변화가 느껴진다. 주요 인물들이 경멸스러운 대상을 대하는 태도가 앞선 작품들과 달라진 것이다. 이 영화는 의열단이 조선인 출신 일본경찰 이정출(송강호)을 밀정으로 심어 펼치는 작전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목숨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정채산(이병헌)과 김우진(공유) 입장에서 일제에 협력하는 이정출(송강호)은 인간적인 대우를 해줄 필요가 없는 인물이다.
이정출을 믿을 수 없다는 김우진에게 의열단장 정채산은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것”이라며 “그걸 열어주자”고 한다. 밀정으로 심어둔 이정출이 제 역할을 해주면서 이들의 작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다. 모든 이에게 멸시받던 사람에게 한 차례 인간적 신뢰와 존중을 보여줬을 때, 그의 인격 중 경멸스럽지 않은 면모가 드러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서사인 셈이다.
영화 ‘장화, 홍련’ 포스터. /사진 제공=영화사청어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