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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재생되는 도시 소제동에서

소제동관사촌

by citevoix



대전역 동광장을 지나 선로를 따라 걷다 보면 마치 시간의 외곽에 머문 듯한 조용한 동네, 소제동에 이른다. 이곳은 과거 ‘소제호’라는 연못이 있었던 자리다. 일제는 그 물길을 메우고 철도를 깔았고 철도 노동자들의 삶을 위한 관사촌이 그 곁에 지어졌다. 붉은 벽돌, 낮은 박공지붕, 긴 창문으로 대표되는 이 공간은 단순한 주거지가 아닌 산업 근대의 리듬과 일상이 녹아든 역사적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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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조선인 철도청 직원들의 주거지로 전환된 뒤에도 북관사촌과 남관사촌이 차례로 사라지는 동안 소제동만은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기억의 구조’를 이어왔다. 그러나 도시가 빠르게 순환하는 동안 이곳은 오히려 정지해 있었다. 공간이 멈춰 있다는 건 언젠가는 재조명을 받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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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이후 소제동은 도시재생의 실험 무대가 되었다. 예술가들이 입주하고, 유휴 관사는 갤러리와 북스테이, 소규모 공연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특히 익선다다가 이끄는 '소제호 프로젝트'는 기존의 건축을 철거하지 않고 덧그리는 방식으로 공간을 재해석하는 방안으로 지속 가능성을 채우고 있다. 낡은 기와와 이름표, 초인종이 남겨진 마당에 새로운 기능을 입히며 이 동네는 과거와 현재, 주민과 방문자가 뒤엉킨 감각의 도시로 다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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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변화에는 단지 건축의 문제가 아니다. 소제동에서 벌어지는 재생은 ‘누구의 기억’을 중심에 둘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도린매시(Doreen Massey, 1994)는 장소란 고정된 의미의 저장소가 아니라 다층적 관계와 시간성이 결합된 구성체라 말했다. 이 관점에서 소제동은 근대 철도인의 기억, 현재 거주민의 일상, 예술가와 방문자의 기획이 충돌하는 공간이다. 그것은 단일한 ‘향수의 장소’가 아니라 도시 내부의 ‘기억 정치’가 벌어지는 무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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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재생은 언제나 균열과 긴장을 동반한다. 일부는 활기를 반기지만 또 다른 일부는 변화가 야기하는 생활비 상승과 공동체 해체를 우려한다. 도시재생은 젠트리피케이션과 공존의 경계에서 유예된 가능성으로 흔들린다. 닐 스미스(Neil Smith, 1996)의 ‘임대료 격차 이론’은 낮은 부동산 가치와 재개발 잠재 가치 간의 격차가 개발 자본을 끌어들이는 과정을 설명한다. 예술가와 문화 공간은 종종 그 선두에서 등장하고 결국 지역 원주민의 생활 기반을 흔드는 방식으로 이어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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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동의 경우, 일부 관사는 소유주가 바뀌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기존 거주자들이 밀려나는 사례도 생겨났다. 골목 끝의 작은 변화가 이웃 전체의 리듬을 바꾸는 것이다. 도시재생이 공동체를 회복하는 기획이 아니라 장소의 상품화로 전환될 경우, 그것은 재생이 아니라 재편이며 포용이 아닌 배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제동은 빠른 개발 대신 느린 보존을 선택한 보기 드문 동네다. 관사 한 채의 천장, 골목의 동선, 마당의 그림자가 살아 숨 쉬는 이곳은 도시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방식이 될 수 있다. 개발을 유예하고 기억을 축적하며 지금의 사람들과 내일의 도시가 공존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는 것. 그것이야말로 도시가 스스로를 회복하는 과정이며 소제동은 그 미시적 실험의 현장이다.


글, 사진 | citevoix






*소제동관사촌은 위 주소 일대에 걸쳐 형성되어 있습니다. 방문시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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