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 무라노 섬에서 건너온 나의 작은 오리

눈에 자꾸만 밟힐 땐 사는 게 맞다. 여행 중이라면 더더욱.

by Chloe

급하게 잡힌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장. 비록 급하게 잡힌 거였지만 마음이 두근거렸다. 언젠가는 가 보리라 마음 한편에 고이 품어두었던 여행지. 짧은 일정일지언정 베네치아에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매력을 마주하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본섬부터 작은 섬들까지 모두! 머물 수 있는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마음은 자꾸만 분주해졌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만들어 낸 일정과 욕심 덕에 오늘의 주인공인 무라노 글라스 오브제가 우리 집에 와 있다는 점에선 한 톨의 후회도 없다. 더 큰 작품을 데려올 걸, 조금 더 큰손이 되었어야 했는데 하는 미련은 남았지만.


베네치아에 있다 보면 출렁이는 물결 따라 배를 타는 몸짓이 자연스레 깃든다. 그러다 보면 그 배를 타고 조금은 더 멀리 나가고 싶어진다. 물살을 가르며 가 닿는 작은 섬마을은 또 다른 얼굴을 내밀며 여행자를 반긴다. 색색의 건물 덕에 인스타그래머블한 동네로 소문난 '부라노'를 가장 많이들 기억하겠지만, '무라노'도 그에 못지 않게 아름다운 섬이다. 부라노의 명성과 화려한 색채에 조금 가려져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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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Chloe Kim All rights reserved.

베네치아 산마르코 광장에서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를 타고 한 시간쯤 가면 무라노 섬에 다다를 수 있다. 다소 소란스러운 배의 모터 소리도, 물 내음 가득한 공기도, 물결의 크고 작은 일렁임도 더는 거슬리지 않게 되었을 딱 그즈음이다. 베네치아에 오기 전 부터 무라노라는 섬 이름이 익숙했던 건 무라노 글라스 덕분이다.


10세기부터 베니스 사람들은 유리나 크리스탈을 가공해 왔다. 그러다 주요한 수익창출의 수단이 된 유리 세공 기술이 외부로 유출되는 걸 방지하고자 13세기에 들어서는 유리 세공자들을 무라노섬으로 이주시켰다. 베니스의 웬만한 고급 호텔에 가보면 무라노 글라스로 완성한 환상적인 조명이 객실마다 달려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탐나서 눈독 들이던 호텔 레스토랑의 컵에도, 욕실의 비누 받침까지도 ‘무라노’라는 글자가 그 가치를 증명하듯 새겨져 있었다. 무라노 글라스는 빛을 만날 때 그 가치의 정점을 찍는다. 또렷하고 영롱한 색감을 투영해내는 오색 빛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림자마저 찬연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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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름다움에 이토록 마음을 빼앗겼으니 보는 것만으로는 절대 만족이 안 된다. 무라노 거리의 상점가를 틈날 때마다 둘러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있는 거리의 하나 건너 하나 모두 유리공예 상점이다.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쇼윈도 너머에서 찬란히 빛나는 유리 공예품에 이끌려 홀린 듯 가게 안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양손 무겁게 쇼핑백을 들고 나오는 건 맥시멀리스트 여행자에겐 너무나도 당연하게 벌어질 결과일 것이다. 욕심을 접어두고 잠시 호흡을 고른 뒤 쇼윈도에서 눈길을 거두고 유리공예 장인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본다.


"Finito Finito!" 장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손사레를 치며 말했다. 이탈리아어를 몰라도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세상에, 시연을 하는 시간이 그 찰나에 끝나버린 것이다. 다짜고짜 명함을 내밀고 저 멀리 꼬레아에서 이걸 보기 위해 왔노라고 필사적인 어필을 해본다. 결과는? 그가 작업장 한편에 빼곡히 붙어 있는 명함들 속에 또 다른 꼬레아 기자의 명함을 가리키며 뭔가를 설명한다. 물론 이 모든 대화는 영어와 이탈리어가 얽히고 섥힌 언어로 이루어졌고, 전부를 알아듣진 못했지만 여하튼 이전에 좋은 기억이 있었던 모양. 그는 손짓으로 본인을 따라오라는 제스추어를 취했다. 또다른 꼬레아 기자가 나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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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6 Chloe Kim All rights reserved.

뜨거운 불길이 피어오르는 가마 곁에 장인이 자리를 잡는다. 기다란 파이프 끝에 매달린 붉게 닭궈진 유리 반죽을 집게 모양의 도구를 사용해 빠른 손길로 모양을 잡더니 순식간에 완벽한 말 한마리가 탄생한다. 눈 깜짝할 새 벌어진 일이라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절로 나오는 탄성과 박수에 익숙한 반응이라는 듯 그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신문지 귀퉁이를 찢어 방금 만든 뜨거운 유리 위에 얹어 보인다. 화르르 종이에 불이 붙는 모습에 또 한 번 '브라보!' 박수를 보냈다. 얼마나 오랜시간 이 몸짓을 반복해 왔을까. 한 치의 망설이도 없는 장인의 정확한 움직임 하나하나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이런 퍼포머스를 봤는데도 무라노 글라스로 만들어진 무언가를 사지 않는다? 엄청난 의지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뭐라도 사야겠다는 욕심이 부풀어 오른다. 나름 합리적인 욕심이라 할 수 있겠다.


하필이면 출장에 가져온 트렁크에 여유가 없었다. 결국, 색유리가 섞인 작은병들과 펜던트, 그리고 귀여운 오리 모양의 미니 오브제를 몇 개 구매했다. 다른 어느 곳에도 없는, 단 하나의 수제 작품들. 듣자 하니 전통적인 무라노 유리공예 장인들은 집안 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유리 성분 조합의 비법을 비밀 수첩에 기록해 보존하고, 수제자를 통해 그 비법이 이어지는 게 정석이라고 한다. 책상 한편에 고이 모셔둔 무라노 오리를 이따금 바라볼 때마다 연금술사의 비밀 레시피라도 쥐고 있는 듯 기분이 달뜬다. 그럴 때마다 ‘화병과 컵도 사올 걸’하는 미련을 다시금 억누르는 것 또한 나의 몫이다. 그래서 눈에 밟힐 땐 끝내 사야 한다. 언제 또 오게 될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