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대기업 해외영업팀에 입사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이런 장면을 떠올린다.
출장, 외국인 바이어, 협상 테이블,
그리고 계약서에 사인하는 순간.
그런데 나는 입사하고 2년 동안 영업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팀에서 영업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전략 조직이었다.
그리고 전략 조직이 하는 일은 결국 보고서를 쓰는 일이다.
해외영업본부 내 다른 팀들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접 영업을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입사 전에는 B2C라고 생각했던 사업도 해외로 나가면 대부분 B2B가 된다.
한국 대기업의 글로벌 사업 구조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걸 알아야 한다.
영업은 각 나라의 법인이나 대리점이 한다
현지 파트너사가 고객을 만나고, 지사는 그 파트너사를 관리한다.
그리고 본사는 그 지사를 관리한다.
본사는 관리한다. 실제 접점은 전부 현장에 있다.
본사 전략팀의 역할은 그 전체 구조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방향을 잡는 것이다.
누가 잘하고 있는지, 어떤 시장이 기회인지, 경쟁사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음 분기에는 어디에 힘을 실어야 하는지.
그러니까 나는 영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영업이 잘 되고 있는지를 분석하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게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해외영업팀인데 영업을 안 한다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이 일이 재미있었다.
인도 경쟁사를 인터뷰하고, 중동 지사의 경영 현황을 진단하고, 중남미의 코로나 대응 전략을 짜고, 유럽 시장 트렌드를 분석했다. 지도를 펼쳐놓고 세계 어딘가의 문제를 푸는 일.
그건 내가 뭔가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보고서를 쓴다는 건 별거 아닌 일처럼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종이로 싸우는 암투 같기도 하다.
지사에서 올라온 날것의 데이터를 가공하고, 여러 부서의 수많은 보고서를 다른 맥락으로 해석해
경영층에게 새로운 "먹거리"를 제시하는 일.
직접 숫자를 만드는 게 아니라 숫자의 맥락을 읽어내는 (혹은 만들어내는) 일.
나는 그 일이 생각보다 잘 맞았다. 2년 차가 됐을 때 나는 에이스 소리를 들었다.
출장을 가면 현지에서 파트너사 회의를 주도했다. 영어로 발표를 하고, 현지 담당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답하고, 협의 내용을 구조화해 결과물로 만들었다.
내가 쓴 보고서는 팀장 보고를 거쳐 본부장, 사장 보고까지 거의 그대로 올라갔다.
남초 회사에서 내가 정말 잘하고 있는 건지, 사람들이 그냥 예의상 잘한다고 하는 건지는 솔직히 잘 몰랐다.
그래도 첫 고과부터 최고 등급을 받았다. 그럴 때마다 이 회사와 culturally 맞지는 않을지 몰라도
그래도 나는 나름 잘하고 있다는 위안을 얻었다.
이 믿음이 나를 나중에 어떻게 몰아넣었는지는 다음에 더 이야기하겠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황을 다시 돌아보니 이상하게 채워지지 않는 틈이 느껴졌다.
내가 유능하려면, 즉 본사 전략 조직에서 인사이트 있는 보고서를 쓰려면 결국 현장을 알아야 한다.
서로 양보할 수 없는 스테일메이트에서 돌파구를 찾아보는 경험,
실제 고객 접점에서 올라오는 문제를 직접 해결해 본 경험,
영업 실적이 떨어졌을 때 숫자 너머의 구조적 문제를 읽어내는 경험.
이런 것들은 데이터만으로는 배울 수 없다.
전략팀은 결국 해외 주재를 다녀온 시니어들의 경험에 크게 의존하는 조직이었다.
데이터는 읽을 수 있지만 그 데이터 뒤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른다.
어설픈 전략을 세웠다가는 무시당하기 십상이다.
현장을 모른 채 현장을 분석하는 것. 그게 본사 전략팀 주니어의 태생적인 한계였다.
현장 경험을 쌓으려면 주재를 나가야 한다.
그런데 주재를 나가려면 최소 6~7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심지어 기다린다고 해서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회도 아니다.
뒤돌아보니 나는 그동안 에이스 소리, 해외 출장, 파트너사 미팅, 경영층 보고라는 허울에 가려
그래서 나는 팀을 옮기기로 했다.
어린 나이에 입사를 했기 때문에 지금 회사가 아니라 만일 학업을 이어나갔다면? 시험공부를 했다면? 등
기회비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계속 가짜 성취감을 느끼며 다닐 수는 없었다.
이 회사에서 진짜 일을 하기까지 N 년을 기다릴 여유도, 인내심도 없었다.
그렇게 꽤 이례적인 일이었지만 사원 3년 차에 자발적으로 부서를 옮겼다.
회사에서 "미래사업"을 담당하는 부서였다.
시간이 지난 지금 적어봐도 정말 두루뭉술한 단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일을 하면 나중에 회사 밖에서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에 보이는 무언가를 직접 만들고 그게 실제로 돌아가는 걸 보고 싶었다.
"해외영업팀 다녀요."
"어, 그럼 영업해요?"
"아니요."
"그럼 뭐 해요?"
이런 대화에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다음 편에서는 PM이 된 이후의 이야기를 씁니다.
서비스를 만들고, 지도에 핀을 꽂고, 처음으로 "내가 만든 것"이 생겼을 때의 감각에 대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