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 후 1년

by B급 인생

정년퇴직한 지 1년이 다 되었다.

각오를 단단히 했기에 심리적, 정서적 흔들림은 크지 않았다.

금방 재취업을 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지 싶다.

반평생 하던 일과는 동떨어진 분야여서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지만 견딜만했다.

견디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국민연금을 받으려면 아직 몇 해 더 기다려야 했다.

소득은 꽤 줄었지만 그마저 없었다면 지역건강보험료, 경조사 부조금, 자동차 유지비 등 무시할 수 없는 경비를 어찌 감당하였겠는가?


꼬박꼬박 매일 출근하지 않아 육체적으로 고달프지도 않았다.

대신 집에 붙어있는 시간이 늘어 삼식이 생활이 불가피했다.

내가 먹을 양식을 직접 챙겨 먹을 양심은 있었지만 몸과 의지가 여전히 잘 따라주지 않아 난처했다.

해서, 하루 한 끼 정도는 가볍게 외식으로 때우려 노력했다.

그러는 게 심적으로 편했고 아내도 원하는 눈치였다.

덕분에 동네에서 어느 음식점이 우리 부부의 입맛에 맞는지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이 집 저 집 돌아가며 미식투어를 하는 소소한 즐거움이 생겼다.

이 또한 적으나마 소득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달라진 게 많은 현실이었지만 이 정도면 다행이다 싶었다.

그럼에도 마주한 몇 가지 소회를 이렇게 정리해 봤다.




"떠난 사람은 많았지만 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전 직장과 관련 있던 사람과 접촉이 점차 줄어들더니 아예 연락이 끊어지다시피 한 사람이 많았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소식이 없으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반평생을 한 직장에 근무했는데도 정년퇴직을 할 때 축하나 위로 따위의 안부전화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퇴직을 한다는 사실을 몰랐거나 알았다 하더라도 무관심한 사람이 많았다는 증거였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우선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나 싶었다.

나만 짝사랑하듯 그 사람들을 대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정년퇴직을 나 혼자 대단한 일로 여겼는지도 모른다.


카톡에 친구로 등록된 지인 중에도 지난 1년 간 연락이 온 사람이 얼마 되지 않았다.

대부분 직장과 연관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직장을 떠나니 많은 사람도 떠났다.


재취업의 노하우를 묻는 전화는 있었다.

자격증은 어떻게 땄냐며 도움을 청하는 사람만 있었다.

연락을 아예 안 한 것보다는 나았지만 그간 쌓인 정 때문이 아니라 내 쓸모 때문이란 사실이 서글펐다.


앞선 경험자들이 퇴직 후엔 이럴 거라 경고했지만 막상 겪어보고 놀랐다.

꼭 일 관계가 아니더라도 가끔 안부도 묻고 소식도 주고받던 사람조차 연락이 뚝 끊어졌다.

누구보다 가깝다고 여겼던 동료나 후배들로부터 전화 한 통 없을 땐 괘씸한 마음도 들었다.


결국 혼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교에 능하지 않고 내향적인 기질을 감안하더라도 이럴 줄은 몰랐다.

가족 외엔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이젠 옥석을 가리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흙탕물에 진흙이 가라앉아야 맑은 물을 얻듯이 시간이 지나니 분명해졌다.


그렇다고 새 직장이나 새로운 일 때문에 생긴 인연도 별로 없었다.

몇십 년을 다른 직장, 다른 분야 일을 해왔으니 서로 공유하는 부분이 없어 그럴지도 모른다.

학창 시절의 절친도 나이 들어 만나니 뻔한 안부 외엔 주고받을 대화거리가 거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물며 일면식도 없던 새 직장 사람과 무슨 교감이 쉽게 이루어지겠는가.


"사람이 떠나간다고 울지 말라"는 이찬원의 '시절인연'을 들으며 그러려니 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편하다."


올 초만 하더라도 자격증 하나 보고 나를 써준 새 직장의 호의에 신이 났다.

많이 줄어들었지만 기본적인 지출을 감당할 만큼은 되어 든든했다.

누가 요즘 뭐 하냐고 물으면 상근 업무는 아니지만 소속을 말할 수 있어 당당했다.

무엇보다 아내 눈치가 덜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흔들렸다.


지난여름,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담당 현장이 엉망이 되었지만 관계자로부터 연락을 받고도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막연했다.

당장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불안했고 혹시 일이 잘못되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났다.

나도 뉴스에 나오는 사고 책임자로 몰려 곤욕을 치르지나 않을까 상상했다.

자격증만 있었지 현업에선 초보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업무 현장에서 늘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어리둥절했고, 누가 물어봐도 뭐 하나 제대로 된 의견을 내놓지 못한 보릿자루였다.

지켜본 담당자들도 처음부터 어느 정도 눈치는 챘겠지만 실체를 제대로 파악한 듯했다.

점점 겉도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전에 자격증 교육을 다녀왔다.

관련업체에 근무하는 자격증 소지자는 누구나 5년에 한 번씩 받아야 하는 의무 교육이었다.

아직 4년의 여유가 있었지만 빨리 가보고 싶었다.

낯선 분야의 동향을 파악하고 종사자들을 접촉할 수 있어 인맥을 넓힐 기회였다.


자격증을 갓 취득한 사람뿐 아니라 70대 이상의 고령자도 수두룩했다.

다들 오랫동안 같은 분야에 일하던 사람들이라 소속만 달랐지 서로 교분 있는 사이도 많았다.

잘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도 서로 업계의 동향을 주제 삼아 자연스레 어울리기도 했다.

강의실에서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잡고 밥도 같이 먹으러 다녔다.

하지만 나는 몇 마디를 하고 나면 대화가 끊어지기만 할 뿐 더 이상 어울려지지 않았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살아야 한다는 말이 뼛속 깊이 와닿았다.


퇴직하고 한 동안, 나의 주 무대였던 분야를 떠나니 속이 후련했다.

지금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경험도 적지 않았, 같은 일을 오래 해 지긋지긋했기 때문이었다.

그 분야로 재취업을 했으면 속속들이 아는 것이 많아 어떤 상황에서도 눈치껏 처신하기 편했을 것이다.


재취업 한 곳은 큰 기대 없이 자격증 하나만 보고 채용해 주었기에 적극적으로 일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히려 나서면 간섭하는 것처럼 여기고 가만있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자의던 타의던 이 분야에서 투명인간 같은 존재가 아닐까 생각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가고 싶지 않다는 자존심이 슬슬 발동했다.




"내 마음은 그대로인데 모든 게 변했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렀다.

프랑스 작가 로드 아들레르의 <노년 끌어안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우리는 자기 나이에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외부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그 나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뿐이다."(115쪽)


한 직장에서 좌충우돌, 우왕좌왕하며 36년을 보냈다.

안정된 직장이 있었기에 결혼도 했고 아이를 낳아 무사히 키웠다.

정년퇴직을 하고 보니 어느새 내 나이 60대가 되어 있었다.

퇴직이 아니었다면 60대라는 나이가 실감 나지 않았을지 모른다.

벌써 1년이 훌쩍 지났다.

앞으로 체감하는 세월의 흐름은 더 빠를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많이 변해 있었다.


언제나 기둥처럼 서계셨던 부모님은 혼자서 거동도 못하는 어린아이가 되셨다.

남일이라 여겼던 치매환자가 되셨고 요양병원에서 생의 막바지를 보내고 계신다.

밤마다 얼마나 외롭고 무서우실까.


어린아이 같기만 하던 두 딸은 결혼 적령기가 되었다.

결혼은 그만두고라도 제대로 된 일자리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얼마나 답답하고 불안할까.

마음 터놓고 지내는 남자 친구라도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내의 사르릉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불을 끄려고 갔더니 드라마를 켜놓은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듯 손에 쥔 채 곤히 잠들어 있다.

이마와 귀 밑이 희끗희끗하고 눈가에 주름도 보인다.

퇴행성 관절염이 와 같이 산책이라도 하다 보면 자꾸 뒤처진다.

짜증이 나서 한 마디 하려다가도 짠한 마음에 입을 다물곤 한다.

나만 늙어가는 게 아니지 하면서 잠시 기다렸다 보조를 맞춘다.


자식 된 도리에서, 부모 된 마음에서, 또 남편으로서 어떻게 할지 늘 갈팡질팡한다.

내게서 사람이 떠나간다고 새 일자리가 불편하다고 투정을 부릴 처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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