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01
대충 10여 년 전, 파릇파릇한 30대 때 MBC 백분토론에 시민논객으로 4개월간 출연한 적이 있었다.
지금은 그 명맥이 애매해졌지만 당시만 해도 손석희 교수가 진행을 하고 있었고, 내가 출연할 당시에 광우병 소고기 문제로 연일 촛불집회가 열리던 터라 그 당시 100분 토론은 시사프로답지 않게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좌파논객을 자처하는 다음의 아고리언이었고, 그런 나의 철없던 열정에 100분 토론 시민논객은 매력적인 기회였다. 하여간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카메라 테스트까지 하고 나서 10명의 최종합격자에 들게 되었고, MBC 방송국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첫 방송부터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고, 몇 편의 방송이 더 이어지자 나를 비롯한 10명의 시민논객들의 집중력은 하늘을 뚫을 기세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우리들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니라 불행하게도 10명 모두 좌파였다는 것이다.
당시 피디는 보수든 진보든 발언권에 대하여 기계적 중립성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금과옥조로 여기고 있었는데, 10명의 논객이 모두 좌파이다 보니, 모두들 방송 당일날 준비해온 질문이 보수 쪽 패널을 공격하는 내용뿐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급기야 시민논객이 아닌 보수적 성향을 지닌 젊은이를 외부에서 섭외해와서 진보 쪽 패널에 질문을 하도록 하는 상황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되자 나와 몇몇 시민논객이 뜻을 뭉쳐 이 상황을 타파하기로 했다. 그 뜻이라는 게 뭔고하니, 스스로의 이념적 정체성을 저버리고 보수논객이 되자는 결의였다. 그래서 진보 쪽에도 문제가 있는 부분을 찾아서 우리가 공격을 하고 질문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본의 아니게 나는 진중권과 싸웠고, 강기갑 의원에게 한말 때문에 다음날 다음 아고라에 쌀 OO이라고 내 이름과 함께 욕을 얻어먹기도 했다.
아무튼....
그렇게 방송을 해 나가던 어느 날, 초상집에 문상을 갔을 때였다. 조문을 하고 자리에 앉아 소주를 한잔 들이켜려 하는데, 당시 상주였던 공기업 이사장님께서 내가 앉은자리로 오면서 크게 말씀하시는 거였다.
정이사~~ 이 친구 그리 안 봤는데, 아주 대단한 사람이야~~
당신 같은 젊은 사람이 빨갱이들하고 싸워주니 정말 좋아..
요즘 젊은 놈들은 죄다 좌빨이라 당신 보고 놀랬어~~~ 하하
열심히 하라고~~
솔직히 그날뿐만 아니라 나는 어딜 가든 칭송을 받은 젊은 보수로 인정되었다. 하지만 비즈니스를 위하여 그런 나에 대한 유별난 환대를 나는 거절하지 않았고, 그냥 그 상황을 즐겼었다.
그때 내가 주변의 분위기도 모르고, 속내를 드러내어 명박이를 깟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면 아찔하기만 하다.
누구든 다른 이에게 속내를 드러낼 때에는 그 사람의 성향을 잘 파악해야 한다. 철없이 자신의 속내를 잘못 드러내면 아주 아주 곤란한 상황을 맞이할 수가 있다. 정말이다.